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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즈船의 희귀종-재벌家 ‘둘째’와 ‘전직 경찰총수’ 엄상익(변호사)  |  2019-05-19
세계 일주를 하는 크루즈 선의 한 구간을 가는 코스에 잠시 올라타 희귀한 한국인을 구경했다. 얼핏 생각하면 부자만 탈 것 같지만 그 안에서도 극과 극이었다. 세계 일주라는 평생의 꿈을 이루기 위해 가지고 있는 아파트를 팔아 여행길에 오른 늙은 부부도 있었다. 평생 동사무소에서 하급 공직자로 있으면서 저축한 돈으로 퇴직 후 세계 일주 배에 오른 육십대 중반의 독신여성도 있었다. 그들은 끝없이 고요한 인도양의 납빛 바다에서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보기 원하는 것 같았다.
  
  그 반대편의 두 형태의 부자가 있었다. 한 남자는 자신을 모 그룹의 둘째아들이라고 소개했다. 타고날 때부터 금수저 출신인 자신을 의식한 발언 같았다. 이상하게도 ‘둘째’라고 표현하는 그의 얼굴엔 묘한 고독과 우수의 그림자가 깔려 있었다. 부자라도 또 그 안에서 최고의 위치가 되지 못하면 행복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 부부는 크루즈 선이 잠시 들르는 나라의 항구마다 고급호텔에서 자고 배로 돌아오곤 했다. 그의 젊은 아내는 호텔 화장실의 향수나 휴지까지 세계적인 명품이더라고 자랑하기도 했다. 그들의 공허는 그렇게 채워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부자쪽에 또다른 희귀종이 존재했다. 여행객들은 그가 전직 경찰총수라고 하면서 노골적으로 주눅이 들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전직을 은근히 과시하면서 얼마나 목이 뻣뻣한지 인사조차 제대로 받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다. 몇 사람 안 되는 한국 여행객들 분열의 원인 제공자였다. 좁은 사우나 안에서 그와 우연히 마주쳤다. 그가 처음 보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미 쪽에서 말이요 디자인이 기가 막힌 벨트를 봤는데 다른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어. 그걸 꼭 사야 하는데 기회를 놓쳤단 말이야. 우리 여편네가 돈 좀 쓰려고 하면 꼭 브레이크를 건단 말이야 나 참.”
  
  그 한 마디에 칠십 년 넘게 살아온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약간은 짐작할 것 같았다. 사람들은 그를 전직 경찰총수라고 하지만 그게 아닌 것 같았다. 중간 간부 정도를 하다가 오래 전에 그만둔 경찰의 퇴물 정도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제복과 그 어깨에서 번쩍이는 계급장만이 인생이었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이 혼자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한 눈매를 가진 억세 보이는 칠십대 초쯤의 여자였다. 그녀는 심장 박동기를 달고 있었다. 그 기계의 전원이 나가면 바로 죽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하루하루를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영택이가 없으니까 밥을 혼자 먹어야겠네. 어제 바람이 부는데도 운동한다고 갑판을 한 바퀴 돌더니 드러누웠어.”
  나이든 남편을 얘기하는 것 같은데 ‘우리 영택이’라는 표현이 얼핏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호기심에 물었다.
  
  “영택이라뇨? 바깥 분 성함입니까?”
  “아니 우리 영감택이라는 말이지.”
  
  웃자고 하는 말 치고는 좀 썰렁했다. 그 속에는 목이 꼿꼿한 남편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심장 박동기를 달고 하루하루를 줄타기를 하듯 살아간다는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강남에 건물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을 했다. 월세를 받아서 한 푼도 안 쓰고 꼭꼭 모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여행이 끝날 무렵이었다. 배에 탄 한국인들이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차로 공항을 가기로 한 모양이었다. 혼자 세계여행길에 오른 육십대 중반과 팔십대 여성을 그 차에 태워주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나 영택이라는 그 분의 단호한 반대로 팔십대 노인이 따돌려졌다. 자기들은 비싼 돈을 내고 여행사를 통해서 왔는데 왜 공짜로 차를 타려고 하느냐는 논리라고 했다. 정말 죽기 전에 살이 가득 찐 짐승 같은 희귀종의 한국인 부자였다. 그들은 행복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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