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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장애 독일인의 모습 엄상익(변호사)  |  2019-05-20
먹물같이 검은 바다 저편에서 희미한 불이 깜빡거리며 조금씩 움직인다. 상선이 지나가는 것 같다. 내가 탄 배는 이오니아海의 밤을 건너고 있다. 이제 세 시간 후면 바다여행의 끝이다. 인생의 짙은 황혼인 노인들이 가득한 배를 타고 한 달 가량 바다 저쪽에서 수평선 너머의 이쪽 세상으로 넘어왔다. 인도양의 수평선 저쪽에서 사라진 내가 이쪽 바다에서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것도 그 비슷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세상에서는 없어졌는데 수평선 저쪽의 또다른 세상에 도착하는 건 아닐까. 하늘에 아직 희미하게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인생의 말년을 나는 어떻게 정리할까 생각해 보았다. 사색하고 글을 쓰고 또 사색하고 글을 쓰고 살아온 생활이었다. 어제 배 안의 뜨거운 사우나에서였다. 근육의 고장으로 한쪽 다리를 쓰지 못하는 독일인 노인 남자가 보조기구를 잡고 서서 그 위에 놓인 두꺼운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이 되면 기계같이 정확히 나타나 운동을 했다. 계단 하나를 오르는 게 그들 부부에게는 마치 히말라야라도 오르듯 엄청난 일이었다. 그의 늙은 아내가 남편의 사타구니에 양팔을 끼고 안간힘을 쓰면서 한 계단씩 밀어 올렸다. 계단의 난간을 잡은 남편은 그렇게 운동을 했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아내는 봤어도 늙은 아내가 그렇게 남편을 운동시키는 모습은 감동을 넘어 섬뜩한 무서움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남자가 뜨거운 건(乾) 사우나 안에서 보조기구를 잡고 선 채 깨알 같은 글씨가 박힌 천 페이지가 넘는 듯한 두꺼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그건 독서가 아니라 차라리 수행이나 구도행위같이 보였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지만 무슨 책을 읽으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가 시선을 돌려 나를 보았다. 담백하고 순수해 보이는 눈이었다.
  
  “에스파니아의 역사를 적은 책입니다. 거의 다 보고 몇 페이지 남지 않았는데 보시겠어요? 저는 근육이 마비되어 꿈을 접었읍니다만 원래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그 독일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그에게 장애는 삶을 가로막는 높고 허물 수 없는 담이 아니었다. 그는 여행 중에도 한 걸음 한 걸음 오차 없이 자기 삶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배 안에서 이천 명 가량의 유럽 노인들의 삶을 한 달 동안 지켜보았다. 그들은 매일 신앙같이 운동을 하고 책을 읽었다. 서양의 발전은 그런 근면성과 학구적인 태도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실감이 들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의 나라였고 철학자 칸트의 나라였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는 유럽이 더 이상 미국에 신세지지 말고 독자적으로 살아나가자고 하고 있었다. 우리의 영혼도 한 사람 한 사람 그렇게 강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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