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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회의 압구정과 김시습, 그리고 형조판서 조국 대서양의 민들레(회원)  |  2019-11-17
세조의 장자방이었던 한명회는 한미한 신분이었으나 모략에는 조선 천지에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다. 그 머리로 악역을 도맡아 이방원을 도와 만인지상이요 일인지하인 영의정 벼슬까지 누렸다. 그것도 부족해 두 임금의 장인까지 되었으니 그 세도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의 악행은 일일이 거론하기 어렵다.
  
  한명회가 말년에 한강변에 정자를 짓고 갈매기들과 노닐며 '압구정'이라는 현판을 걸고 시 한 수를 써 붙였다.
  靑春扶社稷(젊을 때는 사직을 돕고)
  白首臥江湖(나이 들어 강가에서 쉬노라)
  
  김시습이 정자 앞을 지나가다가 이 시를 보고 두 글자를 고쳤다.
  靑春危社稷(젊을 때는 사직을 위태롭게 하고)
  白首汚江湖(늙어서는 강호를 더렵혔네)
  
  오늘날의 대한민국 정국을 보면서 문득 그 시절이 떠올랐다. 세조는 아버지의 충신을 죽이고 찬탈을 했지만 국방은 튼튼히 했다. 전직 형조판서는 부인이 포도청에 갇혀 심문을 받고 자신도 수인(囚人) 신세가 될 위기에 놓이자 굳게 입을 다물고 임금님의 눈치만 살피고 있다. 비리의 고구마 줄기는 여기저기 여러 대신들과 대궐까지 얽혀 있기 때문이다. 멀리 부산까지 뻗어 있다고 한다. 전직 형조판서가 실토를 해 만 백성들이 그 실상은 알게 되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반정(反正)을 당할 우려도 있다.
  
  다급해진 임금님은 포도청 법을 고쳐서라도 한때 애총했던 형조판서를 구해주고 싶지만 벽창호 같은 포도대장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게다가 대궐 앞에서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추위도 아랑곳않고 49일이 다 되도록 "상감마마는 난군(亂君)이니 제발 물러나소서!" 하고 철야농성을 하고 있다. 철없는 왕비마마는 그 악머구리 같은 소리에 새벽잠을 설친다고 투정을 부린다.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지자 입 안의 혀같이 고분고분하던 신하들도 하나, 둘 왼고개를 틀기 시작했다. 북쪽 오랑캐는 아무리 뒷전으로 뇌물을 주고 달래도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컹컹 짖어댄다. 천 가지 만 가지 시름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는 임금님의 눈빛이 충혈됐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임금님의 옥체가 걱정되어 마음이 바짝바짝 탄다. 어찌할 거나! 이 일을 어찌할 거나! 언제까지 이렇게 맘을 졸여야 하나! 하나님 아버지! 임금님을, 이 나라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런 정치 싸움, 더러운 모략을 보자니 일손도 안 잡히고 정말 지긋지긋하다. 그래서 꼭두 새벽에 잠도 안 자고 이런 글을 올린다. 하루 빨리 모든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끝장이 나야지...
  
  자고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요
  부모를 잘못 만나면 자식이 고생,
  주인을 잘못 만나면 머슴이 고생,
  남편을 잘못 만나면 마누라가 고생,
  상관을 잘못 만나면 병사가 고생,
  임금을 잘못 만나면 백성이 고생이라고 했다.
  
  이 추운 날씨에 무슨 포원이 졌다고 백성들이 길바닥에 엎드려 "상감마마, 마마는 난군이시니 이제그만 내려옵소서!" 하고 외치겠나!
  
  
  
  
  
  
  
  
  • 대서양의 민들레 2019-11-21 오전 5:14:00
    이방원을 수양대군으로 정정합니다. 필자의 착오였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지적해주신 Stargate 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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