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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의 별난 아이들 엄상익(변호사)  |  2021-03-05
초등학교 사학년 시절이었다. 정말 남과 다르게 보이는 뛰어난 아이가 있었다. 시험만 치면 그는 일등이었다. 몸이나 옷차림도 단정했다. 머리를 어른처럼 빗고 기름을 발랐다. 깨끗한 옷에 다림질을 한 주름이 곱게 서 있었다. 나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소년 같았다. 시험을 쳐도 그는 실수가 없었다. 한 번은 그 아이의 시험 치는 모습을 관찰했다. 투명한 자를 문제에 대고 신중하게 읽어갔다. 그리고 생각을 한 다음에 답을 골랐다. 그 아이는 전과목이 항상 백점이었다. 그런 아이가 다음에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시절 또 다른 아이가 있었다. 점심시간 무렵이면 그 집의 운전기사가 아이의 점심을 가지고 왔다. 기사가 희고 따뜻한 우유가 든 보온병을 교실 문 앞으로 가지고 오면 담임 선생님이 그걸 받아 아이에게 전했다. 교실 앞 창문 쪽에 담임의 책상이 붙어 있었다. 담임선생은 아이의 보온병을 받아 우유 한 잔을 잔에 따라 마셨다. 그 아이가 은박지 포장을 펼쳐놓은 샌드위치에서 나는 고소한 버터 냄새가 교실의 퀴퀴한 공기를 부드럽게 희석시키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변호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두물머리 강가에서 조용히 사는 한 친구와 동대문 역사공원 근처의 러시안 골목에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이 동네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어. 그런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 있어. 반에 한 아이가 있었는데 벌써 생긴 것도 남과 달랐어. 눈이 반짝이고 총명하게 생긴 거야. 그리고 점심 때가 되면 그 아이의 엄마가 아들 도시락을 가지고 오는데 보온 도시락에 우유가 담긴 보온병을 가지고 왔어. 그 엄마도 미인이고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였지. 그 아이가 보온 도시락을 먹는 걸 보면 달라 보였어. 우리와는 종류가 다른 귀족 같았지. 나야 양은 도시락에 잡곡밥이고 묵은 김치가 반찬이었지.”
  
  나도 그랬었다. 어떤 때는 반찬통의 김치국물이 흘러 책을 온통 물들였었다. 친구가 말을 계속했다.
  
  “내가 재수를 해서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어. 운동장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는데 어렸을 때 엄마가 매일 점심 도시락을 싸오던 그 친구인 것 같았어. 그래서 다가가서 아무개 아니냐고 물었지. 맞는 거야. 그 훌륭해 보이던 아이가 나하고 같은 대학에 다니는 게 좀 이상하게 느껴졌어. 좀 더 좋은 최고의 대학을 다녀야 하는데 말이지. 하여튼 그랬어.”
  
  인생은 기나긴 여행이었다. 산 속 깊은 곳 샘의 물방울 같았던 우리들은 계곡을 내려와 개천을 지나 지금은 모두들 바다를 앞에 보는 강의 하류를 맴돌고 있는 나이가 됐다. 내가 초등학교 사학년 시절 보았던 그 총명하고 훌륭해 보였던 아이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더러 궁금했다. 같은 반에서 공부해도 말 한번 붙여보지 못했고 그 이후도 인연이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엄마가 아이를 인형같이, 자기의 작품같이 집착을 가지고 전력을 쏟았던 것 같기도 하다. 우연히 그 아이의 소식을 풍문으로 전해 들었다. 아직 중국이 험했던 구십년대 초 그는 중국에 선교사로 가 있다는 것이다. 의외였다. 그렇게 귀하게 크던 아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하나님은 그 아이를 낮아지고 낮아지게 해서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귀한 사명을 준 것 같았다.
  
  점심시간이면 운전기사가 도시락을 가지고 오던 또 다른 아이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큰 음식점을 하면서 산다고 했다. 대학 동기인 친구가 어린 시절 넋 놓고 바라보던 같은 반의 총명한 친구는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 역시 특이한 곡절을 겪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었다. 어느날 그가 길을 걸어가는데 지나가던 차량이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 박혀있던 말뚝에 부딪쳤다. 그 말뚝이 뽑혀져 나와 허공을 날면서 앞에 가던 그의 뒤통수를 쳤다고 한다. 갑자기 날벼락을 맞은 그는 뇌를 다쳐 여섯 달 이상을 혼수상태에서 사경을 헤맸다고 들었다. 회복된 후 우연히 지하철역에서 만난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겸손한 모습이었다.
  
  칠십 고개를 눈앞에 둔 우리들은 이제 모두 보통사람들이다. 과거에 몸에 둘렀던 지위도 돈도 의미 없는 때가 됐다. 손녀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손자가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머나먼 기억 저편의 초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보면서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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