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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분노한 시민단체 엄상익(변호사)  |  2022-05-18
<내가 생각하는 애국과 봉사>
  
  칠십년대 전반의 대학 시절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갑자기 시위를 주도하는 여학생이 들어왔다. 그 여학생은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싸우고 있어요. 여러분은 이렇게 도서관 안에서 자기 출세를 위해 공부만 하는 겁니까? 여러분의 애국심은 어디로 갔습니까?”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운동권 지도부 사람들이 머리에 띠를 두르고 우리들의 수업 시간에 들어와 문을 차단하고 연설했다. 공부보다 국가와 사회를 위한 행동이 먼저 아니냐고 힐책했다. 그 말을 듣고 피가 끓으면서 비겁한 내가 싫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깊은 산 속의 한 암자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다. 운동권에서 뛰던 한 고교 후배가 내 옆방으로 숨어들었다. 내가 법서를 공부하듯 그는 러시아 혁명사, 불란서 혁명사, 모택동 사상,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그는 민중을 위한 진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때도 나의 양심은 부끄러웠다. 나는 그저 나 자신만을 위해 사는 형편없는 속물이라는 반성이 들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대학시절 애국심이 넘쳐흐르던 시위 주도를 하던 사람들이 대통령 후보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다. 상당수가 다선의 국회의원이 되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다. 국가를 위하면 그렇게 일찍부터 현실정치에 뛰어들어야 했던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한 명이 대통령 후보가 되어 텔레비전 화면에서 경쟁 상대방과 진흙탕의 개싸움을 하는 걸 봤다. 그의 애국이 진짜 애국이었던가 의문이 들었다. 그의 표정에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탐욕밖에 보이지 않았다. 애국을 팔아서 권력욕을 채워온 인생 같기도 했다.
  
  시민단체를 만든 고교 후배가 있었다. 선의로 얼마의 돈을 기부하기도 하고 그 단체에서 쓸 문구류를 보내기도 했었다. 그는 사회운동의 아이콘이 되었다. 어느 날 그가 정치로 나가야 하겠다는 말을 했다. 국가를 개혁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시장이 됐다. 세월이 흐르자 그는 이번에는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는 세상의 정상을 향해 사회의 험한 암벽을 타고 오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져 죽었다. 애국을 위해서는 꼭 정계로 가야 하는 것일까. 사회의 개선을 위해서는 꼭 시민단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내가 분노한 시민단체가 있었다. 고압 송전선이 지나가는 지역의 노인들이 집단적으로 투쟁을 한 경우가 있었다. 추운 겨울 마을 노인들이 송전선이 설치될 장소에 구덩이를 파고 그곳에 들어가 결사항전을 하는 모습이 언론의 초점이 됐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뒤 어느날 그 마을의 시위를 하던 노인의 아들이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와 이렇게 호소했다.
  
  “서울에서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마을로 찾아와 그렇게 하라고 시켰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시위 천막 뒤에서 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사업가한테서 돈을 받아 세고 있더라구요. 그때야 우리가 속았다는 걸 알았죠. 그 사람들 말에 선동이 되어 농약을 먹고 자살한 우리 아버지는 억울해서 어떻게 해유?”
  
  사회운동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 주최하는 사업에 단순한 참여자로 간 적이 있었다. 그는 이미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우상 같은 존재였다. 그의 표정과 행동과 두르고 다니는 공기가 그랬다. 기업가들이 그를 보는 눈은 달랐다. 겉으로는 술을 사주고 돈을 주지만 마음으로는 기업의 기생충쯤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회운동을 하면 그는 뒷돈을 받지 말아야 했다. 캠페인을 벌이고 선전선동을 해서 사회에 소란을 일으키는 무리들은 가짜다.
  
  사람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능력에 알맞게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게 애국이고 사회를 위한 것이 아닐까. 죽은 김지하씨는 자기의 골방에서 시를 써서 전국민의 마음에 울림을 준 시대의 영웅이었다. 그는 정보부의 지하실에 끌려가 받은 고문의 체험을 글로 써서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홀로 서재에 묻혀 있으면서도 그는 대한민국 최고의 애국자였다.
  
  춤추고 노래하는 방탄소년단은 음악으로 세계를 제패하고 한국의 가치를 높였다. 그보다 더한 애국이 있을까. 세계 어느 도시에 가나 한국 대기업의 상품 간판이 붙어있다. 그들은 상품으로 애국을 하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한다고 꼭 정치를 할 필요가 없다. 사회를 개선한다고 시민운동가가 될 필요도 없다.
  
  사회와 나라를 개선하겠다고 떠들지 말고 오직 외곬으로 양심에 비치는 하나님의 명령만 좇는 사람이 나라를 구원하는 게 아닐까. 나의 직업은 내가 받은 소명이다. 그 일을 위해 이 세상에 보냄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그걸 충실히 하는 것이 국가에 유익을 끼치고 사회를 바로잡는 게 아닐까. 성경은 말한다. ‘너의 손이 감당할 힘이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최선을 다해서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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