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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자가 조국에 반역하였다가 피살된 경우-표트르 3세 趙甲濟  |  2018-10-21

   집권자가 조국에 반역한 경우
  
   어느 나라이든 영토, 헌법, 체제 등 國基(국기)를 훼손하거나 뒤엎으려는 반역에 대해선 大逆罪(대역죄. high treason)로 다스리는데 보통 死刑(사형)으로 처벌한다. 우리 형법엔 대역죄에 해당하는 죄목이 與敵罪인데, 사형뿐이다. 북한정권의 지령을 받아 대한민국의 영토와 주권을 떼어주고,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며, 국군을 무력화시키거나 애국자를 탄압하는 것이 이 죄에 해당한다. 대통령이나 왕 등 권력자가 그런 행위를 하는 경우도 있다. 즉 정권에 의한 국가반역이다. 좋은 예가 러시아 표트르 3세이다.
   왕이 되자 말자 평소 흠모하던 敵將(적장)을 추종, 동맹국을 배신하고, 토착종교를 홀대하고 장교들을 모욕하다가 부인이 주동한 쿠데타를 당한 뒤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경우가 러시아의 표트르 3세이다. 그는 표트르 大帝(대제)의 딸인 앤의 아들이었다. 표트르 3세의 아버지는, 스웨덴의 칼 12세(그는 북방전쟁에서 표트르 대제와 자웅을 겨루었던 영웅이었다)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칼 프리드리히였다. 덴마크 령 홀스타인 공작이었던 표트르 3세는 부모가 일찍 죽어 독일인들로부터 교육을 받아 영혼과 가슴은 독일인이었다. 러시아어를 거의 하지 못하였다.
   표트르 3세의 어머니 앤의 언니는 표트르 大帝의 딸인 엘리자베스였는데, 쿠데타로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그는 여동생의 아들인 표트르를 러시아로 불러 황태자로 지명하였다. 엘리자베스는 1761년 12월25일에 죽었다. 황제가 되어 표트르 3세로 불리게 되었다.
  
   동맹국 배신, 적국 편에 붙다
  
   죽은 황제 엘리자베스는 생래적으로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2세를 싫어하여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프랑스와 연합, 프러시아를 상대로 7년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지금의 폴란드 영토인 실레지아 영유권을 둘러싼 전쟁에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여하였다. 이 전쟁은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에선 英佛전쟁으로 확대되었다. 7년 전쟁을 1차 대전 이전에 있었던 최초의 세계적 전쟁으로 부르는 이유이다.
   프러시아는 영국 및 하노버와 동맹하였지만 막판에 영국이 휴전 협상을 압박, 코너로 몰렸다. 러시아 군은 한때 베를린을 점령하는 등 勝機(승기)를 잡았고 프르드리히 2세는 항복을 준비하고 있을 때 宿敵 엘리자베스가 죽고 표트르가 황제가 된 것이다.
   표트르 3세는 어릴 때부터 독일적 환경 속에서 자라 위대한 開明군주인 프리드리히 2세 숭배자였다. 그는 황제가 되자 평소 품었던 감정대로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배신하고, 일방적으로 프러시아와 휴전, 평화협정을 맺었다. 프러시아는 몰락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제되었다. 이를 '브란덴부르그 家門의 기적'이라 한다.
   프리드리히 大帝 숭배자였던 히틀러는 1945년 포위망이 좁혀오는 베를린의 지하벙커에서 그런 기적이 다시 일어나기를 바랐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急逝하자 히틀러는 러시아 엘리자베스 황제의 죽음이 가져다 준 그런 행운이 찾아올 것이라고 여기면서 환호하였다고 한다.
   敵將을 숭배하고 동맹국을 배신한 표트르 3세로 인해 유럽의 판도가 바뀌었지만 그의 몰락을 재촉하였다. 항복 직전까지 갔던 프러시아는 起死回生하여 오스트리아를 공격한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 군대를 프러시아에서 철수시킨 뒤엔 프리드리히 지휘 하로 넘겨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기 시작하였다. 180도의 배신이었다.
  
   모욕당한 군 장교단이 부인과 손잡고 쿠데타
  
   이 무렵 표트르 3세는 프레드리히 왕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러시아의 황제보다 프러시아의 장군이 되는 게 더 좋다'고 고백했다. 비유하면 한국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편지를 써서 '당신의 부하'가 되겠다고 하는 꼴이다. 오스트리아 편이던 프랑스와 스웨덴은 러시아가 이탈하자 세(勢) 불리를 깨닫고 오스트리아에 대한 원조를 철회하였다. 프러시아의 역전승으로 귀결된 7년 전쟁은 프러시아를 유럽의 강국으로 밀어올렸다.북미와 인도에선 프러시아 편에 선 영국과 오스트리아 편에 선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는데 결국 영국이 이겨 세계제국으로 올라선다.
   표트르 3세의 반역은 신념 체계가 러시아적이 아니라 프러시아적이었다는 데서 생긴 것이다. 그는 러시아 正敎의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개신교를 지원할 태세를 보임으로써 러시아의 오랜 전통을 무시, 러시아 민중의 분노를 샀다. 러시아 장교들은 그들이 어렵게 死地로 몰아넣은 프러시아를 살려준 '이상한 황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부모를 일찍 여의고 자란 표트르 3세는 늘 정서가 불안정한 사람이었는데, 황제가 되자 러시아 군의 복장, 훈련, 전술을, 敵軍(적군)인 프러시아 모델로 바꾸도록 명령, 장교들을 모욕주었다. 표트르 3세는 홀스타인 문제를 트집잡아 덴마크에 宣戰(선전) 포고, 수도 페테르부르크를 비웠다가 쿠데타를 당한다.
   주도자는 황비 에카트리나와 근위대의 젊은 장교단이었다. 에카트리나는 남편이 황태자 시절에 바람을 피우자 맞바람을 피워 아이까지 낳았다. 이 아이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데 생물학적 아버지는 쿠데타 때 그녀를 도운 근위대의 오를로프라는 장교였다.
   1762년 즉위 6개월만에 폐위된 표트르 3세는 직후 살해되었다. 남편을 죽음으로 몰면서 즉위한 에카트리나 2세는 大帝라고 불릴 정도로 정치를 잘 하여 러시아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대표적인 開明(개명)군주로서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다.
   이 사건을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비유를 든다면 스탈린주의자가 미국의 대통령이 된 경우나 김일성주의자(주사파)가 한국의 국가 지도부를 장악한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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