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A를 통하여 친근해진 칠레는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느다란 나라이다. 남북간 길이가 4000km를 넘는다. 면적은 한반도의 약 네 배, 인구는 1800만 명, 1인당 국민소득은 구매력 기준으로 2만5000달러, 삶의 질 랭킹은 세계 38위, 그리고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이다.
칠레의 前 군사통치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2006년에 사망)는 1998년에 군사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런던을 방문했다가 척추수술을 받으러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수사판사가 발행한 체포영장으로 해서 구금되었다. 스페인이 인터폴, 즉 국제형사경찰기구에 의뢰하여 살인혐의로 피노체트를 수사하겠다는 요청을 영국이 들어준 것이다. 고등법원은 피노체트가 면책특권을 가진 외교관이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는 사이 2년간 피노체트는 영국에서 붙들려 칠레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집단살인과 같은 反인류범죄에 대해서도 면책특권을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국제법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뜨거웠다. 반대로 많은 칠레 국민들은 피노체트가 비록 강권통치를 한 사람이지만 외국에서 구금된 것에 흥분하여 만약 엘리자베스 여왕이 南美를 방문할 때는 영국식민통치기간의 만행을 문제삼아 구금해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어떤 역사적 배경으로 해서 피노체트가 등장했는지가 궁금하다.
라틴 아메리카 33개 나라 중 칠레는 세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첫째는 백인 주도 국가란 점이고 둘째는 오랜 민주주의의 전통을 가진 문화수준이 높은 나라라는 점이며 셋째는 기후가 온화하고 사람들이 친절하며 자연은 아름답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만 해도 칠레는 서구 유럽 나라들이 오히려 부러워 할 정도로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때 중학교 지리 시간에 남미의 ABC 국가에 대해서 배운 기억이 난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를 가리킨 것인데 이 세 나라 가운데서도 칠레는 민주주의의 전통이 남미에서 가장 오래라는 칭찬을 받고 있었다.
1950년대에서 70년대 초까지 남미 여러 나라들에서는 군사쿠데타가 발생했지만 칠레만은 모범적인 민주주의 체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탄탄한 기반을 가진 칠레는 1964년부터 1970년까지 집권한 에두아르도 프레이 대통령 시절에 서서히 망가지기 시작했다.
프레이 대통령은 중도좌경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칠레 외교노선은 親美, 親서방 정책이었는데 프레이 대통령은 독자노선을 걷는다면서 親동구 공산권 정책을 실천해갔다. 프레이 대통령은 스위스 계통의 사람인데 칠레의 지정학적 위치, 즉 미국의 영향권 안에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동구 공산권 국가와 가까워지려 하였다.
이런 脫美, 親공산권 외교는 南美 여러 나라들이 맺은 1947년의 미주 상호방위조약 정신에 위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970년 9월4일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집권 여당인 기독교 민주당은 로도미로 토미치란 후보를, 극우파 진영인 국민당은 호르헤 알렉산드리를, 在野의 인민통합전선은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를 각각 후보로 추대하였다.
직접선거 결과는 집권여당의 후보가 27.8%, 국민당의 후보가 35%, 사회당의 아옌데가 36.2%의 지지를 받았다. 칠레의 선거법에 따르면 직접선거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때는 국회에서 上位 두 후보를 놓고 결선투표를 하게 되어 있었다.
이때 집권여당인 基民黨은 같은 보수정당인 국민당 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사회당의 아옌데를 지지하여 그를 당선시켰다. 기민당과 국민당은 이념적 색깔이 비슷했었는데도 한 덩어리로 뭉치지 못함으로써 좌파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보수는 분열로 망하고 좌파는 자충수로 망한다는 말은 이때도 有效하였다.
아옌데 대통령은 이로써 남미 역사상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은 최초의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그러나 아옌데는 지지기반이 취약했다. 36%의 지지율을 가지고 중도 보수층을 통치하여야 했다. 미국도 아옌데 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다.
선거에서 미국은 중립을 지켰다. 아옌데의 등장으로 긴장한 것은 산티아고에 있던 한국 대사관이었다. 칠레는 남한과의 단독 수교국가였다. 그러나 아옌데는 대통령 취임 1년 전에 북한을 방문했기 때문에 그가 대통령이 되면 북한과 수교할 것이 예상되었다.
아옌데가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 정권을 수립하도록 만든 재야 인민통합전선은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등 과격한 성격을 가진 정치세력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수파인데도 집권하자마자 권력을 믿고서 사회주의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경제정책면에서 아옌데는 외국 투자기업을 국유화하고 外債상환을 보류하겠다고 선언했다.
칠레의 가장 중요한 자원은 구리 광산이었다. 銅광산에는 미국 등 외국자본이 주로 투자하고 있었는데 이들 기업을 국유화하겠다고 선언했으니 큰 반발이 생길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은행과 탄광, 동광산에 이어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ITT의 자산도 칠레 정부가 접수했다.
이런 공산주의식 국유화와 자산몰수조치는 다수 국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우려를 낳았다. 외교부문에서도 아옌데는 親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북한과는 통상관계를 수립했다. 대만과는 단교하고 중공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몽골과 수교하더니 한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과도 정식 수교하게 되었고 베트콩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쿠바의 카스트로와도 매우 가까워져서 쿠바의 경호원들이 아옌데의 경호를 담당할 정도였다. 아옌데는 사회개혁도 사회주의식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칠레는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스페인 등 유럽에서 이민온 이들, 이들과 인디언들의 혼혈인 메스티조가 다수였다. 이민들은 독일,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유태인, 동유럽 출신들이 많았다. 서구식 사고방식과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은 이런 다양성을 무시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섰다.
아옌데가 사회계급혁명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종교계였다. 아옌데는 가톨릭 교도였지만 교회와 끊임없이 충돌했다. 아옌데는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종교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종교가 국가를 지배하고 정치에 간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정치가 종교를 탄압하는 사회주의는 더 문제이다.
아옌데는 또 정치개혁에도 손을 댔다. 전통적인 양원제를 단원제로 바꾸기로 한 것이다. 칠레의 국가원수는 퇴임한 뒤 종신 상원의원이 되는데 그런 기반인 상원을 없애려 한 것이다. 아옌데의 이런 급격한 개혁은 드디어 경제에 적신호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제조업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농업이 피폐해지면서 농산물 수출국이 수입국으로 전락하고 물가가 폭등했다.
무엇보다도 아옌데 정권을 코너로 몰아넣은 것은 미국과의 불화였다. 미국은 국유화된 미국자본에 대한 보상요구, 신규차관의 동결, 투자규제, 전략적 설비의 수출통제, 동광석의 수입금지, 동광석의 국제시세 폭락공작, 동제련소에 대한 기계부품의 수출금지조치를 취하면서 아옌데의 목을 죄기 시작했다.
아옌데는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대인들을 요직에 많이 기용했다. 그는 母系가 유대인이었다. 모두 여섯 명의 유대인들을 장관으로 기용했는데도 이 유대인들은 미국내의 유대인 조직으로부터는 협력을 얻지 못했다. 아옌데가 크게 잘못한 것이 있었다. 아옌데의 사회당 산하에 좌익혁명운동이란 단체를 운영했다. 이들은 무장한 테러단체였다. 이들이 비밀장소에서 훈련을 받고 있다느니 이들이 군대로 침투하여 군을 장악하려 하고 있다느니 하는 설이 공공연하게 유포되었다. 이것이 보수적인 군부를 자극했다.
아옌데가 집권한 다음해 물가상승률은 150%였다가 그 다음해엔 363%에 달했다. 이즈음 1년만에 다시 칠레를 방문했던 한국인 외교관은 황폐해진 수도 산티아고의 모습을 보고서 놀랐다고 한다. 마치 전쟁의 狂風이 스쳐간 도시처럼 곳곳이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화려했던 商街는 상당 부분 撤市상태였으며 주유소와 빵가게 앞에는 절망적인 표정을 한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이 외교관은 탄탄했던 민주주의 모범국이 한순간 지도자의 失政으로 몰락한 모습에 큰 충격과 함께 이념이 무엇인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아옌데의 급격한 사회주의 혁명 추구로 인해 결국 자신들의 삶의 기반이 무너진다는 것을 깨달은 국민들은 군대에 기대기 시작했다. 1973년 5월26일, 칠레 대법원은 아옌데의 정책이 국가 정체성을 문란하게 한다는 일종의 위헌 결정을 내려 수개 월 뒤의 군사혁명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미국도 아옌데 타도 공작을 하였다.
칠레 군부는 사회당이 무장조직을 운영하면서 테러를 자행하고 있는 데 분노하고 있었다. 군의 상층부는 아옌데가 장악하고 있어 쿠데타의 가능성은 약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더구나 칠레에서는 1932년에 쿠데타가 있었고 그 뒤에는 政變이 일어나지 않았다. 1973년9월11일 육군총사령관이던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는 군의 일파가 주동한 것이 아니고 육해공군 三軍이 합동으로 일으킨 全軍 쿠데타였다.
아옌데는 쿠데타의 와중에서 자살하였으며 군부가 정권을 잡고 무자비한 탄압을 통해서 사회주의 정권을 청산했다. 이런 탄압으로 해서 피노체트는 국제 인권단체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왔다.
사회주의 세력을 조속히 뿌리뽑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란 위기감을 느낀 군부는 무리한 수사와 탄압을 통해서 칠레가 內亂 상태로 빠져드는 것을 막았다. 피노체트 정권은 북한과는 斷交하고 박정희의 성공적인 경제개발 모델을 참고하기도 하여 국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칠레 정부는 많은 전문가들을 한국에 유학보내 박정희 정부의 경제개발계획, 외자유치전략, 수출주도 산업구조, 자유무역지대 설치, 사회간접자본 투자 등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가서 응용했다고 한다. 칠레 북부의 항구도시에 설립된 이키케 공단은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복사품이라고 한다. 칠레 정부는 이 공단을 만들기 전에 우리나라 마산수출자유지역에 사람을 보내 견학시켰다고 한다. 피노체트 정부는 또 외교노선을 다시 親서방쪽으로 돌려 놓았다. 1974년에 경제는 성장세로 회복이 되었다. 연간 수백 %나 하던 인프레도 안정되었다.
피노체트는 군사혁명으로 집권한 후 17년간 권좌에 머물러 있었다. 대통령직을 이양하고나서도 육군총사령관직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정치를 조종하였다. 앞에 든 한국 외교관은 10여 년 전에 칠레를 방문하고는 번창한 산티아고의 거리를 산책하면서 생각에 잠겨보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란 신비한 결과를 창조할 수도 있고 한 국가의 멸망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역사의 진리를 실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정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는 피노체트에 대한 평가도 역사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20여 년 전 칠레의 한 언론인을 만났는데 피노체트에 대해서 상당히 높은 평가를 하고 있는 데 놀랐다. 피노체트의 인권탄압에 대해서는 서구 언론이 과장하고 있는 측면이 강하다고 하면서 칠레 사람들 가운데는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오히려 더 많다고 옹호했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분열로부터 구하고 경제를 부흥시킨 점이 그의 어두운 면인 인권탄압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하다는 주장이었다.
칠레 사람들은 아옌데를 대통령으로 뽑는 선택을 함으로써 가혹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그는 선거 사회주의자였다. 보통 사회주의는 폭력혁명을 통해서 달성되는데 아옌데는 선거를 통해서도 사회주의 정권이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 사회주의 정권은 그러나 오래 지탱될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가 가진 본질적인 요소 때문이었다.
사회주의는 계급혁명을 지향한다. 즉 특정 계급이 국가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특정계급이란 노동자일 수도 있고 약간 범위를 넓히면 민중일 수도 있다. 어쨌든 계급적인 관점에서 정책을 펴게 되니까 그런 사회는 분열할 수밖에 없다. 한국의 좌파세력은 양극화, 1 대 99, 기득권층, 촛불세력 등의 분열적 용어를 정치선동에 이용하는 버릇이 있다. 이런 계급주의적 관점에 서서 국민의 복리와 국가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계급에만 유리한 정책을 추진하면 그런 나라는 통합 될 리가 없다. 이런 계급주의는 국민국가의 단결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이라 계층 간 반목과 국민갈등을 부채질 하고 악화되면 내란이 일어난다.
우리 헌법은 어떤 형태의 계급도 허용하지 않는다. 정치 지도자는 혁명, 계급, 민중, 착취자 등의 말을 국민을 향하여 써선 안된다. 계층이란 말은 계급의식이 없는 중산층, 지도층 같은 가치중립적 분류법이다.
우리는 노동자의 계급성을 강조해도 안되고 자본가의 계급성을 강조해도 안된다. 이미 先進자본주의 단계에 들어가 있는 우리 사회는 어느 계급, 어느 계급으로 딱 부러지게 구분할 수가 없는 복잡한 사회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자들이라고 해도 과거의 노동자와는 달리 사무실 근무자들보다도 더 많은 임금을 받는 경우도 있고 그들이 하는 일도 단순노동이 아니라 불도저를 움직인다든지 정밀장치를 조작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고도의 기술을 보여주고 있어 노동자와 기술자의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지경이다.
자본가라고 하면 소수의 富를 독점한 특권계급을 연상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중산층도 자본가가 될 수 있고 샐러리맨도 증권투자를 통해서 자본을 축적할 수가 있으니 자본가가 따로 존재하고 그들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너무나도 위험한 분류법이다.
사회주의 혁명이란 개념은 19세기의 유럽에서 생긴 것이다. 그 뒤 우리 사회가 과학기술의 발달로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도 아직 그런 낡은 잣대를 가지고 생동하는 거대사회를 분석, 통제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생동하는 현대사회를 낡은 틀 속에 가두는 일이 될 것이다.
1951년 서독의 사회민주당은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마르크시즘이나 계급이란 말을 쓰지 않고서 政綱을 설명한다. 「사회민주당은 경제권을 전체 국민의 손에 넣어주고 자유민들이 평등하게 함께 일하는 공동체를 창설하는 데 목표를 둔다」. 1959년 바트고더스베르크에서 채택된 행동지침 강령에서도 사회민주당은 계급, 계급투쟁의 용도를 폐기하였다.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의 유산을 버린 덕분에 브란트 시대에 집권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갈등적이고 분열적인 계급이란 개념 대신에 통합적이고 화합적인 국민이 민주사회의 주체임을 수용함으로써 서구식 사회민주주의는 비로소 자유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존립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하나의 쟁점은 우리 헌법이 선거를 통해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것을 용인할 수 있느냐 마느냐이다.
한 헌법학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면 모를까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우리 헌법상의 자유민주주적 기본질서에 반한다. 사회주의 정당은 위헌 정당으로 해산되고 사회주의자는 국가보안법 등 실정법 위반으로 처벌된다. 이는 명백한 원칙이다. 다만 그가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 밝히는 작업은 공안 당국이 할 일이다.』
선거를 거치면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사회주의라도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다른 법률가는 또 이런 주장을 한다.
『사회주의이든 민주주의이든 그 용어가 문제가 아니고 실체가 중요하다. 북한도 인민민주주의라며 민주주의란 용어를 쓰고 있지 않은가. 우리 헌법이 표방하는 자유민주주의에는 계급이란 개념이 없다. 그러므로 서구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선거 사회주의란 우리 헌법질서에 반한다. 또 다른 교수는 이런 주장을 했다.
『사회주의는 넓고 편차가 큰 개념이다. 사회주의를 일도양단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우리 헌법상의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가 반드시 反사회주의이거나 반공이라고 볼 필요는 없다. 프롤레타리아 폭력혁명을 버린 공산당이 서구 사회에서는 인정되기도 한다. 사회주의라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세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다른 정치학과 교수는 서구의 현실과 다른 우리 사회의 특수성을 전제로 두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주의 개념은 다양하다. 그러나 누가 어떤 주장을 하더라도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특수한 상황을 기본 전제로 해야 한다. 남북한이 대치해 있는 분단상태는 엄연한 현실이다. 이를 도외시하면 현실을 誤導할 수 있다. 아직 냉전상황이 지속되는 현실에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주의를 수용할 수 없다. 사회주의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폭력적 혁명을 선거로 대체한다고 해서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접근방법이 바뀐 것뿐이다. 민중을 주체로 한 사회주의 건설이란 주장은 딴 나라에 가서나 할 일이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법무장관이었던 유명한 법철학자 라드부르흐는 이런 충고를 하였다.
<민주주의는 상대주의적 세계관에 기초한다. 상대주의는 관용의 정신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적」에 대해서는 그 관용을 철회해야 한다.>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너무나 이상적인 헌법을 갖고 있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파괴하겠다는 세력의 정치활동도 허용할 정도였다. 이 약점을 이용하여 히틀러의 나치당이 선거를 통해서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이런 사태를 체험했던 라드부르흐의 경고 - 즉, 자기 체제를 파괴하려는 세력에까지 자유와 관용을 허용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살행위란 경고를 귀담아들어야 할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