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돈이 전혀 되지 않는 일을 했다. 그는 몇 번이고 보수우파 활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손을 놓지 못했다. 그는 새벽이고 낮이고 아주 당연한 듯이 내게 연락해 필요한 자료를 찾아달라고 하거나 자신이 만든 문건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게 휴일에 전화하여 뭐하는지 묻고는 ‘지금 뭐하는 거냐 나라가 좌파한테 넘어가게 생겼는데, 지금 한가하게 있을 때냐’고도 했다. 누가 보면 꼭 우리가 어디 함께 소속된 동료 같은데, 그런 것도 아니다. 나는 나대로 그는 그대로 ‘내 돈’ 쓰면서 싸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수사기관에 불려다닐 일이 많았다. 재판도 많이 했다. 언제가 우리는 서로 이런 맹서 아닌 맹서를 하였다. ‘아무리 곤란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보수우파의 명예에 먹칠을 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는. 우리는 수사 받을 때나 재판을 할 때 그 수사관, 판사 하나하나를 우파적 계몽 대상으로 삼자는 생각을 가졌다. 때로 상황적, 법률적인 면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해 유죄를 선고받거나 좌파에게 민사에서 지더라도 검찰이, 법원이 보수우파에 대한 인식만큼은 좋게 가지도록 하자고 다짐했다.
전두환 정권 말에는 안기부 직원 중에도 운동권 학생들에게 감명을 받는 이가 많았다. 장기징역형을 무릅쓰고도 소신을 버리지 않는 모습에서 그랬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정보기관 요원으로서는 순진하고 얼빠진 태도이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 자에게 감동받는 원초적인 면이 있다.
수사기관이 미운 피의자에 대하여 ‘야비하게 다 불었다’는 식으로 없는 말로 깎아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사실을 전하는 경우가 많다. 좌파인사를 수사했던 이들은 대부분 자신이 수사했던 좌파들이 ‘끝까지 신념을 버리지 않더라’고 뒷얘기를 한다.
그러나 이른바 보수우파 진영에는 그렇지 못한 이들이 다수였다. 요즘에야 수사 받는 노하우(?)가 널리 퍼져서 제법 당당하게 조사에 임한다지만 다소 물리력이 동원되던 예전에는 그렇지 못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팬 격인 이들 앞에서는 온갖 강한 척은 다하면서 막상 수사 받을 때는 비열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 고작 뒤로 묶여 뺨 한 대 맞고는 지레 큰 위협을 느껴 자신의 평소 주장을 접는 진술을 한 것도 모자라 어떨 땐 구속될까봐 검사와 수사관이 보는 가운데 고소인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한 이도 있다. 이런 모습이 적힌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게 되는 이들도 민망해 할 지경인데.
그런 비열하고 약해 빠진 자칭 강성 보수우파에게 다른 강성우파가 ‘내가 도와줄 테니 그 폭력적 수사관을 규탄하는 시위를 하러 검찰청 앞에 가자’고 해도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더라나.
좀 젊은 보수우파들도 마찬가지이다. 무리한(?) 수사를 하지 않는 근래에도 동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들만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온 후 유튜브 방송을 잘해먹고 사는 이들도 있다. 좌파 성향이 아닌 수사관들조차 그런 이들을 통해 보수우파를 경멸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 있다. 이는 그들의 진술조서를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싶다.
이런 실태를 나뿐 아니라 나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한 그 보수우파 인사도 잘 알았다. 그도 실은 여러 보수우파 인사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내색하지 않고 응대했다. 그는 명예를 소중히 생각했고 의지도 강해서 수사기관에서 구속영장을 청구할 분위기가 감지되어도 당당히 받아들였다.
한 번은 심상치 않은 수사가 있었다. 나도 느낌이 이상하여 그날은 내가 먼저 그의 검찰 가는 길에 동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는 평소와는 다른 캐주얼한 복장으로 검찰로 향했다. 구속될지도 모를 일을 염두에 둔 것 같았다.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보수우파 진영에서 얼굴 내밀고 사는 이들 중 다수는 걸핏하면 무슨 법원서류를 공개하고 ‘내가 이렇소’ 하면서 재판일정을 떠벌리곤 하는데 반해 그는 그렇지 않았다. 자신의 수사나 재판 일정을 알린 것은 한 번밖에 없었던 것으로 안다. 고소장이나 법원 서류 따위를 공개한 적도 없다.
아무튼 거기 가서 나는 복도에서 서류를 챙겨보며 대기하고 그는 복싱 경기를 치르듯 수사 도중에 잠깐씩 내게로 와 의견 교환을 하고 들어갔다. 그와 나라님 간에 고성이 오가는 것이 간간히 들렸다. 나는 중간에 그에게 ‘당당히 임하되 너무 적대적으로 응하지 말고 세련되게 받는 게 좋겠다’고 권했다. 우리는 자료를 충실히 준비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마무리 되는가 했는데, 그 수사 외에 예고에 없던 수사를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는 지쳐 있었고 내가 나서서 거부 의사를 밝혔다. 신경전이 좀 있었지만 일일이 다 말할 순 없고, 그날 검찰청을 나서기 전에 민원인 휴게실에서 쉬고 있는데, 낯모르는 누군가가 조용히 들어왔다. 다른 방 검사였다. 나와 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경계했다. 검사는 그에게 자신이 어떤 수사를 했던 사람인지 밝히며 정중히 인사를 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훌륭한 수사를 한 분이었다. 그런 분을 눈앞에서 보니 나도 반가워서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검사는 나와 그에게 격려라고 여겨도 될 만한 얘기들을 쭉 했다. 그날 나는 상당히 감동받았다.
검사는 우리 같은 이들의 동향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말도 툭 던졌다. “○○건으로 수사 받는 것도 있지요? 거기도 저하고 비슷할 겁니다.” 나는 이 말을 ‘○○사건 검사도 좌파적인 사람이 아니니 적대적으로 보고 너무 경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수사를 받아도 좋을 것이다’는 그런 뜻으로 이해했다. 물론 그 말을 참고로 그 수사도 잘 받았고.
그의 보수우파 활동에 경의를 표하는 듯 검사는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와 정중히 인사하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 긴 호흡으로 멀리 보고 준비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 때까지 나는 검사의 눈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내려오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옆에 선 그의 눈이 조금 촉촉해진 것 같았다. 가는 차 안에서 그는 보수우파 활동하면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며 감격했다.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고도 했다. 나는 그에게 좋은 세상이 올 때까지 그 검사 이름은 우리 둘만 알자고 하였다. 우리의 칭찬이 그에게 인사 불이익 등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까봐서 그랬다. 물론 이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사실 좌파적 법조인 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 저들이 이념적 사건이 흘러가는 길목마다 터를 잡고 앉아 있어 많아 보일 뿐이다. 저들은 그 격렬함을 무기로 원하는 자리를 꼭 차지하고 마니까. 그래도 나는 저 검사 같은 이들이 있는 한 아직 법조계에 희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검찰을 다녀온 얼마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무혐의 처분통지서가 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