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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사람' 박시춘과 김원봉 박시춘은 ‘친일’ 딱지로 폄하, 월북한 김원봉에겐 독립훈장 주자는 자들 문무대왕(회원)  |  2019-04-11

“밀양사람”이란 말은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의 “나 밀양사람 김원봉이요”라는 대사에서 나온다. 요즘 밀양 출신 작곡가 박시춘과 김원봉에 대한 논란이 여론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먼저 박시춘은 밀양시가 추진 중인 ‘밀양가요박물관 건립’이 사실상 ‘박시춘 기념관’을 세우기 위한 꼼수가 아니냐며 밀양 지역 일부 문화예술인이 트집을 잡고 나섰다. 친일(親日) 성향의 가요 네 곡을 작곡한 ‘친일 작곡가 박시춘’이기 때문에 ‘밀양가요박물관’ 건립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다음 김원봉은 국가보훈처가 독립운동 유공자로 서훈(敍勳)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김원봉이 독립운동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해방 이후 월북하여 김일성정권의 노동상과 국가검열상 등을 지내며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했고 김일성의 남침에 적극 동참하여 동족을 살상한 전범(戰犯)이기 때문에 훈장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여론이다. 동아일보 4월11일자 기사 내용부터 소개한다.

< …경남 밀양이 가칭 밀양가요박물관을 짓겠다고 한 것은 밀양 출신 작곡가 박시춘(1913~1996)을 기리려는 목적이 아니냐며 일부 시민단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있어서다. 박시춘은 일제강점기부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시기에 대중가요 3000여 곡을 지었다. ‘애수의 소야곡’ ‘감격시대’ ‘비단장사 왕서방’ ‘전선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신라의 달밤’ ‘봄날은 간다’ ‘럭키 서울’ ‘낭랑 18세’ ‘세상은 요지경’ 등은 그야말로 당대를 풍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술집에서, 노래방에서 박시춘의 노래를 불렀다.

박시춘은 한국가요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2년 보관(寶冠)문화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일제의 패색이 짙어진 1943년 이후 학도병 참여를 권유한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아내’ 같은 노래를 짓기도 했다. 이 때문에 밀양가요박물관이 박시춘기념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자 밀양시는 부인하고 있다.

밀양시는 일부 시민단체와 시의원의 반대에 대해 ‘밀양아리랑의 고장에 가요박물관을 지어 흥이 많은 밀양 시민들이 우리 가요를 체험하고 관람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밀양에는 박시춘 외에도 정풍송, 남백송, 박정웅, 은방울 자매 같은 많은 예능인이 배출됐다. 밀양시청 홈페이지에는 친일의 잘못은 교훈으로 삼고 작곡가로서의 업적은 기리는 방향에서 가요박물관건립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올라 있다. … >

밀양시는 박시춘이 자란 영남루(嶺南樓) 뒤편에 그의 생가를 복원하고 국가 환란의 시기에 노래로 국민을 위로하고 달래준 박시춘의 위대한 음악 인생을 추모하고도 있다. 이 부분은 필자가 조갑제닷컴에 기고한 ‘박시춘의 옛집’에 소개된 바 있다. (칼럼 하단 ‘관련기사’ 참고)

다음은 김원봉에 대한 11일자 중앙일보에 게재된 중앙일보 대기자 박보균의 칼럼 ‘장준하는 김원봉을 경멸했다’를 요약 소개한다.

<… 영화 ‘암살’의 출발은 김원봉이다. 김구와 김원봉의 제휴를 그린 것이다. 그것은 허구다. 진실은 대립과 갈등이다. 임시정부 내부는 복잡했다. 김원봉 세력은 좌파(左派)다.

장준하는 파쟁에 실망했다. 장준하는 수기(手記) ‘돌베개’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임정 내 각 정당에서는 우리에 대한 포섭 공작을 했다··· 심지어 김원봉 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이었다.”
일제 패망 직후 상황에서는 이렇게 개탄했다.
“일군 출신(한국인 장병) 부대로 하여금 임정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어부지리(漁夫之利)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
이런 영화를 1200만 명이 관람했다. 당시 야당 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보고 이런 영화평을 남겼다.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싶다.’ 이때 김원봉은 ‘문재인의 역사공간’에 진입했다.

영화 속 김원봉은 강렬하다. 실제 항일현장의 젊은이들에겐 어떻게 다가갔을까. 1944년 태평양전쟁 중국 전선의 일본 군부대들, 학병 출신 장준하, 김준엽이 있었다. 일본 군대를 탈출한, 학병 50여 명은 1945년 1월 충칭(重慶)에 도착, 백범 김구의 환영사에 감격했다. 김원봉 군무부장도 나왔다. 김준엽의 ‘현대사 장정(長征)’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원봉의 첫인상) 거무스름한 얼굴은 혁명가다운 굳은 의지가 보였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구재(口才)가 모자라는 듯 이론적으로 우리의 투쟁을 설명하려 하면서도 충분히 표현 못 하는 것 같이 보였다. …”

독립운동가 김원봉의 월북 후 행적은 치명적이다. 그는 김일성정권의 국가검열상을 지냈다. 6·25 남침 때 전선 지휘는 아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요직이다. 군사 행정을 관장한다. 김원봉에겐 전범(戰犯)의 그림자가 그렇게 서려 있다.

4월11일은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일. 여의도공원에서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장면이 재연된다. 74년 전 주역은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이다. 문 대통령은 “임정은 대한민국의 뿌리”라고 했다. 김원봉은 오랜 기간 임정을 거부했다. 그것은 김구의 개탄으로 이어졌다. 독립훈장은 국가의 정체성이다. 문 대통령은 국가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고민할까? 장준하의 울분, 김구의 고통을 알고 있을까.>

암울하고 고달팠던 시대를 함께 살아온 밀양사람, 박시춘과 김원봉. 박시춘을 친일작곡가로 폄하하며 매도하는 자들, 그리고 임정을 거부하며 김구와 장준하의 분노와 개탄의 대상이 된 반역자가 되어 동족살상의 전범이 된 김원봉에게는 훈장 서훈을 주장하는 무리들. 역사의 준엄한 평가는 어느 편일까?

삼성전자 뉴스룸
  • love 2019-04-15 오후 1:08:00
    누가 歷史를 裁斷하는가?

    現在의 잣대로 過去를 裁斷하려는 卑怯한 자들! 權力을 도둑질해서 自由大韓民國의 자랑스런 歷史를 辱보이는 자들의 행태를 보고도 모르는가? 이들은 자신의 조국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자진하여 김일성主義者로 북한에 附逆한 叛逆者들이다! 그러한 행태를 볼 때, 그들이 日帝의 악랄한 植民統治 시절을 살았더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는 不問可知다!

    한 人物에 대한 評價는 그가 살아온 時代 狀況에 대한 理解를 바탕으로, 그의 행적을 통해 과거를 類推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이 무슨 권리로, 우리 民族 指導者들이 日帝의 武斷統治에 따른 暗鬱한 조국의 미래에 절망하여 저지른, 식민지 조국에 기여한 그분들의 功에 비하면 玉에 티같은, 逸脫을 문제삼아 그들을 斷罪한단 말인가? 아무도 ‘그 시대를 온전히 살아보지 않은’ 後代에게 先代를 비난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異民族의 植民地 治下를 살아보지 않은 자신들이, 일제 식민통치에 온몸으로 저항한 卍海 韓龍雲 선생 등 여러 愛國先烈이라도 된 듯, 착각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과거는 인간의 불확실한 記憶 속에만 존재할 뿐,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역사의 한계 때문에 ‘역사에는 假定이 필요 없다’는 말이 존재하는 것이고, 특히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愼重해야 하는 이유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역사의 거울에 비추어, 良心에 한 점 부끄럼 없는 자만이 타인을 비난할 자격이 있다! 따라서 이 나라를 亡國의 길로 이끌어가는 현 執權勢力에게는 더더욱 그럴 名分도 權利도 없다고 확신한다!
  • 고호 2019-04-14 오전 10:02:00
    지금은 종북좌파 정권이라 공산주의를 칭송하고 복원 하려는노력은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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