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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임기를 마쳐도 보통사람이 될 수 없다”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던 경호실장이나 안기부장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안부전화도 하지 않아요.” 엄상익(변호사)  |  2019-05-09
1995년경이었다. 국회에서 한 야당의원이 전직 노태우 대통령이 거액의 비자금을 몰래 챙겨놨다고 폭로했다. 금융자료까지 근거로 제시하는 그의 말은 폭발력이 있었다. 국민들이 분노하고 두 전직 대통령이 죄수옷을 입고 법정에 섰다. 신문에는 연일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사들인 빌딩들이 서민들을 슬프게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조용히 대통령의 아들이 사무실을 찾아왔다. 친구의 소개로 한두 번 만난 사이였다. 의논할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았다.
  
  “법정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통령의 아들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론에 난 대통령의 비자금이라는 게 뭔가요?”
  내가 되물었다.
  
  “사실 아버지는 돈에 대해서는 거의 몰라요. 군인 시절부터 직접 돈을 만진 일이 거의 없어요. 부관들이 계산하고 심부름을 했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경호실장이 돈에 관한 모든 일을 다 처리했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대통령을 그만 둔 어느 날 그 사람이 갑자기 검은 가방 하나를 가져다 아버지 앞에 탁 던져놓고 사라진 거예요. 아버지와 저는 비자금이라는 걸 솔직히 처음으로 본 겁니다. 이런 사실을 남에게 변명할 수도 없어요.”
  
  대통령 주변의 인물이 돈을 끌어 모으기 마련이다. 그걸 철저히 통제하지 못하면 그 책임이 권력자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었다. 국회에서 비자금 꼬리가 잡히자 돈을 관리하던 경호실장이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법정에서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통령의 아들은 안절부절 못했다. 이상했다. 전직 대통령 덕을 본 그 많은 벼슬아치들이 어디로 갔을까 의문이었다.
  
  “대변인이나 공보수석비서관은 지금 어디 있죠? 그 분들이 도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연락을 했는데 전화조차 받지 않아요.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요.”
  대통령 아들의 목소리에는 배신감과 함께 섭섭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던 경호실장이나 안기부장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안부전화도 하지 않아요.”
  권력이란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자금은 재벌들이 가져다 준 것 아니겠어요? 그 분들이 그 돈의 성격에 대해서 뭐라고 검찰에서 진술했을까요?”
  
  “아버지한테는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바칩니다. 각하가 좋은 일에 써 주십시오, 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알고 있어요. 대통령에서 떠나는 이임식장에서까지 재벌 회장들은 아버지에게 앞으로 평생을 형님같이 모시겠다고들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등 돌리는 행태를 보면 소름이 끼쳐요. 모두들 검찰에서 아버지한테 겁을 먹고 뇌물을 줬다고 하는 거예요.”
  
  나는 대통령이 퇴임을 한 후 왜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할까 의문이었다.
  
  “아버지는 대통령 후보 때 내건 슬로건이 ‘보통사람’이었잖아요? 그게 진실이라면 대통령을 마치면 보통사람으로 돌아가 소박하게 살아야 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런데 그 많은 돈이 왜 필요했던 거죠?”
  
  “대통령은 임기를 마쳐도 보통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어요. 대통령의 껍질을 벗어날 수 없어요. 말은 보통사람이라고 했지만 보통사람이 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필요했던 것 같아요.”
  
  무슨 뜻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대통령과 그 가족은 이미 다른 신분의 귀족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때의 살아있는 권력인 김영삼 대통령은 적폐청산의 명분으로 두 전직 대통령을 감옥에 보냈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재벌로부터 받은 돈들을 심복인 안기부 기조실장에게 맡겨 돈세탁을 하고 있었다.
  
  그 다음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으로 빼돌린 거액의 달러가 문제가 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가족이 받은 돈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자 자살을 했다. 이명박 대통령도 돈 때문에 구속이 됐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특활비를 자신의 전용의상실 비용 등으로 써서 국고 손실죄로 구속이 됐다.
  
  남미의 어떤 대통령은 평소 자기가 살던 변두리의 허름한 집에 그대로 살면서 낡은 차로 정부청사로 출근을 한다. 그리고 받은 월급의 반 이상을 어려운 사람을 위해 기부한다. 그런 삶 자체가 위대한 살아있는 연설이었다. 천민자본주의 속에서 돈으로 과시해야만 하는 천민 대통령들이 나왔다. 앞으로는 고결한 영혼을 가진 대통령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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