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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확인 절차가 전혀 없는 JTBC의 황당한 5·18 관련 보도 행태 정보원에게 받은 정보를 보고한 정보원의 말을 사실인양 보도 金永男(조갑제닷컴)  |  2019-05-15

5·18을 앞두고 다시 한 번 황당한 주장이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정보여단 군사정보관으로 활동했다는 김용장씨가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한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이다. 그는 올해 3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 비슷한 주장을 해 세상에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주장을 종합하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21일 광주에 내려가 비밀회의를 가지고 ‘사살 명령’을 내렸으며 그가 떠난 직후 ‘계엄군의 집단사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국가차원의 조사가 수차례 이뤄진 뒤에 나오는 것도 황당하지만 이를 보도하고 있는 JTBC의 보도 행태가 더욱 황당하다.

JTBC는 김용장씨가 국회에서 증언(?)을 한 날인 13일, 김 씨 관련 기사를 간판 프로그램인 뉴스룸을 통해 세 차례에 걸쳐 내보냈다. 두 꼭지는 이른바 ‘스트레이트’ 기사로 이날 있었던 김씨의 주장을 차례로 소개한 기사다. JTBC는 이후 김용장씨를 직접 스튜디오로 초대해 손석희 앵커와의 인터뷰를 내보냈다.

우선 1차 보도인 스트레이트 기사의 제목은 <“광주에 내려온 전두환” “발포 아닌 사살” 국회 증언>인데 유선의 기자가 보도했다. 손석희 앵커는 이 기사 보도를 다음과 같이 시작했다.

<앵커: 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계탑입니다. 오후 1시에서 1시 30분을 향해 가는 시각, 80년 5월 21일 여기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 조준 사격을 했습니다.

김용장: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허장환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를 했습니다. 앉아쏴 자세에서 사격은 절대 자위적 투사가 아닙니다. 그건 사살이지.”

앵커: “발포가 아닌 사살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 씨와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 씨는 ‘계엄군의 사격은 사살이었고,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오늘(13일) 국회에서 증언했습니다. (하략)>

손석희 앵커는 기사 소개에 앞서 5월 21일 계엄군의 집단, 조준 사격이 있었다고 단정했다. 그는 그의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어떤 출처도 밝히지 않았다. 이 기사에 소개될 김용장씨와 허장환씨의 주장을 ‘증언’으로 표현해 사실임에 틀림없다는 보도 행태를 취했다. 이 기사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측의 입장이나 전두환씨가 같이 회의를 했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 이들은 과거 검찰 조사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광주에 오지 않았다고 밝혀왔다.

JTBC는 이후 <“헬기 사격, 전투기 출격대기도…” 구제척 증언 ‘일치’>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것인데 기사 첫 문장은 “김용장 씨는 헬기사격을 백악관에 보고했다고 말했습니다”이다. 김씨가 이런 보고를 하게 된 경위나 헬기 사격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는 어떤 내용도 기사에는 없다. 미 정보요원이 백악관에 보고를 했으니 시청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식이다.  

이날 뉴스룸 후반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사실확인 노력은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용장씨의 황당한 주장이 24분 동안이나 전파를 타는 상황이 이어졌다. 손석희 앵커의 역할은 김용장씨의 주장에 신뢰성이 있는지, 무엇을 바탕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 확인하는 것이지만 이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물론 손 앵커는 김용장씨가 1997년에 받은 상패를 보여주고 ‘시청자들의 신뢰를 위해서’라고 말했다. 광주사태는 1980년에 일어났다.

이날 인터뷰에서 우선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이런 사실을 공개하기로 한 어려운 결정을 했다’는 격려성 발언을 했다. 이에 김용장씨는 “그렇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제 마음속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웠다. 감히 누가 39년 비밀을 지킬 수 있겠나?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으로서는 그 비밀이 굉장히 컸다”라고 했다.

이런 답변이 나온다면 대다수의 기자들은 ‘당시 현장에서 무엇을 했고 무엇을 직접 봤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손 앵커는 ‘미국 정보요원이라는 역할이 무엇이고 보고체계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시청자들은 광주사태와는 관련 없는 미국 정보 보고 체계에 대한 설명을 들어야 했다.

이후 손 앵커는 ‘광주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도 있을 테고 본인이 직접 취득한 정보도 있을 텐데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는 누구로부터 얻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인터뷰를 했다면 ‘당시 직접 취득한 정보는 무엇이었습니까’이었을 것이다.

손 앵커의 질문에 김용장씨는 “한국 정보기관 요원 등을 비롯한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정보원들을 통해 정보를 받는다”고 했다. 이에 ‘왜곡된 정보를 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며 “한국에 있는 정보기관도 그 첩보를 자기 기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하고 우리에게도 주고 또 그 정보가 상보하는 과정에서 크로스체크가 되기 때문에 허위정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질문 과정은 또 한 번 핵심 논점에서 벗어난다. 손 앵커와 김용장씨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전두환 장군이 광주에 와서 사살명령을 내렸다는 것일 텐데 미 정보요원의 전반적인 정보 취득과 보고 활동에 대해서만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손석희 앵커는 김용장씨가 받았다는 상패를 소개한 뒤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며 ‘전두환 씨가 (광주에) 온 것을 어디서부터 어디로부터 정보를 받았는가’라고 물었다. 이에 김용장씨는 “전두환 씨가 5월 21일 정오쯤 해서 왔는데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 첩보원은 보안사령부에서 근무하는 정보요원”이라고 했다. 이어 “그 분이 첩보를 줬고 그 후에 505보안부대에 근무하는 여러 분들도 본 적이 있다”라고 했다.

손 앵커는 “전두환씨가 온 것을 봤다는 얘기인가”라고 물었다. 김 씨는 “본 적 있다”라며 “그리고 간접적인 증명을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며 전두환씨가 탄 헬기의 비행 계획서 기록에 남아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했다.

김용장씨는 자신이 직접 본 것은 없고 남에게 들은 얘기를 자신이 보고했으니 이를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손 앵커는 의문을 갖지 않았다. 손 앵커는 본 사람이 누구냐는 질문도 하지 않았다.

손석희 앵커는 이후 “전두환 씨는 그때 광주에 안 갔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사실 자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그런 발포명령의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용장씨는 “그렇다”라면서 “아마 전두환 씨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마 기억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이라고 했다.

김용장씨는 계속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한국군 ‘편의대’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방화 등을 하면서 무력진압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계엄군의 성폭행과 관련된 보고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 모든 주장의 출처는 ‘정보원’이었다.

JTBC 뉴스룸에서 13일 진행한 김용장씨의 인터뷰 기사와 관련 기사 두 꼭지, 김 씨의 주장에 정면 배치되는 관련자들의 증언을 차례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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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의 저작권은 JTBC 뉴스에 있습니다. 인용보도 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방송 : JTBC 뉴스룸 (20:00~21:20) / 진행 : 손석희

[앵커]

예고를 이미 1부에서 해드렸습니다마는, 지금부터는 김용장 씨를 직접 스튜디오에서 만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난 3월 14일에, 39년 만에 한국 언론과의 첫 인터뷰를 저희 JTBC와 가진 바 있습니다. 5•18 당시 광주에서 미군 정보요원으로 근무했던 분인데 이민을 가셔서 현재는 해외에 머물고 계시죠. 지난주에 귀국해서 오늘(1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바가 있습니다. 김용장 선생을 직접 스튜디오에 모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안녕하십니까? 손사장님 반갑습니다.]

[앵커]

그때는 전화로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앵커]

그리고 언제 좀 뵐 기회가 있을까 했었는데. 결국 오늘 이렇게 뵙게 되는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앵커]

아니 무슨 말씀을요. 오늘 국회에서 이제 기자회견하셨고요. 39년 동안 사실 이 문제, 그러니까 광주에 대한 얘기는 일절 하지 않으셨던 것으로 저희가 알고 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제가 501정보여단에서 사표를 낼 때 우리 본부에서 꼭 해야 할 절차가 있는데요. 그 절차는 근무 중에 습득했던 모든 정보를 보안을 해야겠다는 서약입니다.]

[앵커]

'말하면 안 된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말하면 안 된다' 거기에 서명을 했기 때문에.]

[앵커]

가족한테도.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39년 동안 심지어 제 처에게도 말 한마디도 한 적이 없습니다. 지난 3월 14일 JTBC에서 출연했을 때 처음으로 5•18에 관한 얘기를 했습니다.]

[앵커]

그럼 39년 동안 그렇게 지켜오시다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말씀하시게 됐냐' 하는 것을 여쭤보기 전에 한 가지 개인적으로 걱정되는 부분이 생겼는데. 부대를 떠나실 때 일절 말 안 하겠다고 서약을 하셨다면서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39년 만의 증언…군부대서 연락 없었나

[앵커]

그러면 39년 만에 말씀하셨을 때 원래 소속된 부대,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거기서 혹시 연락이 오거나 그러지는 않았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전혀 연락이 없었습니다.]

[앵커]

그렇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네.]

[앵커]

거기도 너무 오래돼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이후로 그래도 다행스럽게 다른 일은 없으셨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보통 비밀문건은 30년이 지나면 해제가 됩니다.]

[앵커]

해제되죠.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기 때문에 이 이상 비밀이 아니라고 여겼을 수도 있고, 또 저도 나이가 지금 75세이기 때문에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이 비밀을 여러 사람이 함께 공유하는 것도 좋겠다, 그리고 또 모든 이 상황들이 지금이 바로 5•18에 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질 적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JTBC에 나와서 39년의 기록을 깨고 비밀을 말하게 됐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그다음부터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은 틀림이 없는 일이고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제가 그동안에 가지고 있었던 제 마음속의 십자가는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웠습니다. 감히 누가 39년 비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현장에서 직접 본 사람으로서는 그 비밀이 굉장히 컸습니다.]
 
 5•18 당시 광주…미군 정보요원의 역할은?


[앵커]

미군의 정보요원이라는 자리,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왜냐하면 우리 시청자 여러분께서 혹시 이제 말씀은 들어서 대략은 알고 계시겠지만 이분이 어떤 일을 했다는 것인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더 신뢰가 갈 것 같아서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우리 사무실에서 하는 일은 HUMINT라고 Human Inteligence 대인정보를 하는 곳입니다. 대인정보란 사람을 통해서 첩보를 입수하는 곳인데요. 미국에 영향을 주는 모든 첩보, 정치 심지어 경제까지. 사회, 문화, 군사 총망라해서 첩보를 입수하고 그리고 보고를 하는 것입니다.]

[앵커]

어디에 보고를 합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우리 보고 채널은 501정보여단으로 보내면 그 보고서가 INSCOM이라고 Intelligence and Security Command, INSCOM이라고 정보보안사령부. 그쪽으로 보내집니다.]

[앵커]

물론 미국에 있는 것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면 INSCOM에서는 다시 그 보고를 분석하고 또 취합해서 DIA라고, Defence Intelligence Agency. 국방정보국으로 보냅니다. 그러면 국방정보국에서는 그 첩보를 완성을 해서 백악관으로도 보내고 다시 또 501정보여단으로도 내려오고 각 군으로도 보내고 그렇게 합니다.]

[앵커]

이른바 보고하신 것에 대한 팩트체크도 합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낸 첩보가 유사한 첩보들이 다른 사무실에서 보낸 경우도 있고 또 위성을 통해서도 크로스체크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과정을 거쳐서 첩보가 정보로 바뀌어집니다.]

[앵커]

그런데 그러면 김용장 선생께서 당시에 광주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은 정보도 있을 테고 또 본인이 직접 취득한 정보도 있을 테고 예를 들면 본인이 직접 뛰어서 얻은 정보는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한테 얻는 정보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한테 얻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굉장히 중요하죠. 우리 사무실뿐만 아니고 모든 MI 사무실은 협조자라는 우리 말로는 협조자라고 부르는데 우리 전문용어로는 Informer, 정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정보원들은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한국 기관요원들이어야만 합니다. 아무 사람한테나 그 정보를 받지 않고.]

[앵커]

한국의 정보기관을 말씀하십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그 받은 정보 역시 필요할 때는 제가 직접 가서 확인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앵커]

한국의 정보기관이 혹시 왜곡된 정보를 줄 때도 있지 않을까요? 어떤 정치적 목적이 있다면?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왜 가능하지 않느냐면 우리 한국에 있는 정보기관도 그 첩보를 자기 기관을 통해 상부에 보고하고 또 우리에게도 주고 또 그 정보가 상보하는 과정에서 크로스체크가 되기 때문에 허위정보를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앵커]

가지고 나오신 저 패는 어떤 것을 얘기합니까? 지금 왼쪽에는 미국 국기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태극기가 보이는데.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이 패는요.]

[앵커]

그것을 다시 아까 위치로 돌려주시겠습니까? 카메라에 잘 안 잡히기 때문에.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이 패는 영어로 Flag이라고 하는데요. 1997년도에 그 해의 정보관에 제가 선정됐습니다, 영광스럽게도. 여기 보면 미국 성조기가 있고 우리 태극기가 있고. 그런데 바로 밑에 이 마크가 501정보여단의 마크인데요.]

[앵커]

그렇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양쪽에 번개가 있고 가운데에 열쇠가 있습니다. '번개처럼 빨리 열쇠를 가지고 문을 열라'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501정보여단의 상징은 Red Dragon이라고 용이 여러 마리의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적룡, 제일 무서운 용이 적룡입니다. 그래서 이 Flag을 받았습니다.]

[앵커]

일종의 상패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상패입니다.]

[앵커]

매우 우수한 정보요원이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게 생각해도 좋습니다.]

[앵커]

97년에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앵커]

언제까지 근무하셨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제가 98년도까지 근무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두환 광주 방문' 정보, 어디서 입수했나

[앵커]

그렇군요. 지금까지 나눈 말씀은 사실은 김용장 선생에 대한 시청자 여러분들의 신뢰를 위해서 일단은 지금까지 얘기를 나눴습니다. 지금부터 본론입니다. '전두환 씨가 광주에 왔었다.' 3월 14일 저와의 인터뷰에서 말씀하셨고 그것을 확인하려면 비행 계획표 같은 것을 보면 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사실 확인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전두환 씨가 온 것을 어디서부터 어디로부터 정보를 받으셨습니까? 광주에 왔다는 것을.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전두환 씨가 5월 21일 정오쯤 해서 왔는데요.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첩보를 받았습니다. 그 첩보원은, 첩보를 준 정보원은 보안사령부 근무하는 정보요원인데요.]

[앵커]

그 당시에.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 당시 때. 그분이 첩보를 줬고 그 후에 505보안부대에 근무하는 여러 분들도 본 적이 있습니다.]

[앵커]

전두환 씨가 온 것을 봤다는 얘기인가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본 적 있습니다. 그리고 간접적인 증명을 할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는데요. 그분이 성남비행장을 출발했는지 아니면 다른 비행장을 출발했는지 그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분명히 거기에는 비행 계획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그것이 파일럿들이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입니다.]

[앵커]

경우에 따라서는 안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군에서는 자동차 1대를 어디로 보내는데도 전부 기록을 합니다. 거기에다가 마일리지는 얼마고.]

[앵커]

만일에 전두환 씨가 내려올 때 그것이 극비리에 온 것이라면 그러한 기록이…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아무리 극비리에 온다고 해도 그분의 이름은 극비리에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비행기 자체의 여행은, 그것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Flight Plan, 비행계획서를 그쪽 기지 지휘소에다가 제출해야 되고 기지 지휘소에서는 그걸 컨트롤타워에 연락해야 합니다.]

[앵커]

그래야만 비행 자체가 안전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겠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이 절차입니다. 컨트롤타워에서 헬리콥터 조종사한테 그 상황을 봅니다. 그 당시 때 하늘에서 들어오는 인바운드는 있는지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웃바운드는 있는지 이런 것을 보고 판단을 해서 이륙해도 좋다 하고 허가를 하면 파일럿이 출발을 합니다.]

 
'광주 방문 전두환' 무슨 일 했다고 보고받았나


[앵커]

그것은 더 조사를 해야 할 사안인 것 같고요. 그런데 정말 전두환 씨가 그것을 타고 와서 그러면 어떤 일을 했다는 보고를 받으셨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분이 광주에 도착해서 단장실로 옮겼고.]

[앵커]

정보여단장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아닙니다. 제1전투비행단. 거기 사무실에서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정호영 특전사령관, 505보안부대 이재우 대장. 그리고 또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 이름은 그 당시에도 모르고 지금도 제가 모릅니다마는 4 사람이 회의를 했습니다. 어떤 얘기를 했는지 저는 그 회의 내용은 보고하지 않았지만 단지 그분들이 회의를 가졌고.]

[앵커]

시간은 21일 정오쯤이었다고.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정오쯤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1시간 후에 서울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도. 이것은 제 의견입니다, 제 의견입니다. 바로 1시간 후에 전라남도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사격이 있었습니다. 저는 심지어 그것을 사살명령이라고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싶습니다. 개인 의견입니다.]

[앵커]

오늘 같이 증언하신 허장환 씨게서도 '그것은 발포명령이 아니라 사살명령이다' 이렇게 규정을 하시더군요. 시간상으로 볼 때 정오쯤에 와서 1시간 정도 하고 돌아갔다면 그것은 1시 정도가 되는 것이고 발포는 1시 20분 경에 있었습니다, 21일. 따라서 그것이 연관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은 지난번 인터뷰에서도 잠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명확한 어떤 근거가 없는 이상 추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개연성이 높다라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이 증거가 되기는 어렵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다만 전두환 씨는 그때 광주에 내려갔다고 얘기한 바가 없기 때문에, 안 갔다고 얘기했기 때문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명확하게 드러난다면 지금 말씀하신 그런 발포명령의 개연성이 그만큼 높아질 수는 있겠죠.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아마 전두환 씨가 나이가 많이 들어서 아마 기억력이 떨어질지 모르지만]

[앵커]

요즘 뭐 지병도 있다고 하고.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분이 왔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 외에 거기에 참석했던 정호영 특전사령관, 이재우 대령. 그분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는 아마도 그분들이 양심선언을 할 수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앵커]

글쎄요, 그럴 가능성이 상식적으로 보면 좀 없어 보이는데.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물론 상식적으로는 없을 수 있지만. 단지 저희들이 HUMINT 대인정보를 하는 보고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에는 첩보위성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첩보위성들이 감청도 할 수 있고, 이런 증거들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미 국방정보국(DIA) '광주 문서'…어떤 내용?


[앵커]

저희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팀이 발견한 것이 있는데 이번에. 아까 말씀하신 DIA, 국방정보국의 문서를 하나 찾아낸 것이 있습니다. 저희가 따로 찍어뒀는데요. 보여드리겠습니다. 김용장 선생의 보고 내용이 바로 이 DIA, 국방정보국의 재조사를 거쳐서 이렇게 다시 나온 문건인데 거기에 굉장히 중요하게 보이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발포와 관련해서. 5월 21일입니다마는, 그 문제 '발포를 허가받았다. 동학혁명과 비슷한 상황이다.'라는 얘기들이 나와 있습니다. '군 병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경우나 자신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에 발포를 허가받았으므로.' 보고하신 내용입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제가 이 보고서를 보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지난주에 스포트라이트 인터뷰의 이 보고서를 보고 제가 깜짝 놀랐는데요. 이것은 DIA 저희들이 보낸 첩보가 우리 본부 501정보여단을 거쳐서 그리고 나서 DIA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거기서 모든 첩보를 취합하고 분석해서 다시 그 보고서들이 저희들한테 내려오는데요.]

[앵커]

아까 말씀하신 그 과정입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저 내용 가운데 일부는 제가 보고했습니다.]

[앵커]

아 이 내용입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동학에 대해서 제가 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마는 1번, 2번 내용은 제가 한 것 같습니다. 저기 보면 item1 또 even item2.]

[앵커]

괄호친 것이요? 좀 작게 나오는데. 이 부분을 저희가 확대는 준비하지 못한 것 같은데.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지금 보면 3번에. 'Rioters in Kwangju had deatected the tax office.' 저것은 제가 보고한 내용입니다. 저것은 틀림없습니다.]

[앵커]

Rioters라는 거는 이런 표현을 여기 그냥 해석하자면.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폭도들입니다.]

[앵커]

그 표현은 잘 쓰지 않습니다. 쓰면 안 되는데.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폭도로 얘기했고 심지어 광주 사태로 표시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저 내용은 제가 보고했습니다.]

[앵커]

2번은 어떻습니까? 'Within this context', 이런 상황 속에서. 그리고 뭔가 까맣게 지워져 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Stated that rioting had spread within Cholla Nam province to include Naju and some other towns.' 나주를 포함한 기타지역에서도 그렇게 나와 있죠. 퍼져 있었다.]
 
5•18 관련 DIA 문건…지워진 부분 많은데?


[앵커]

그런데 까맣게 지워져 있는 부분들 있잖아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앵커]

그것은 왜 지워졌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고, 미국 입장에서는 밝힐 필요가]

[앵커]

밝혀서는 안 되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밝혀서는 안 되는 이런 내용이기 때문에 지웠는데요.]

[앵커]

여기는 드문드문 지워져 있지만 이것을 잠깐 주시겠습니까? 이곳울 혹시 보실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제가 카메라에 비추겠습니다. 이 위는 완전히 다 지워져 있습니다, 새까맣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앵커]

이것은 알 수가 없습니까? 혹시 기억하시든가.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제 생각에는요. 우리나라 정부에서 미국 정부로 요청을 하면 아마 원문 그대로 보내줄 수도 있으리라고 기대합니다.]

[앵커]

그러니까 지워지지 않은 원문을 미국 쪽에서는 가지고 있다는 얘기죠?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앵커]

그것은 어떻게 확신합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은 관례가 그렇습니다.]

[앵커]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지운 것은 누구일까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미국 정부에서 그것을 지웠는데요. 그것은 30년이 지났기 때문에 unclassified, 비밀 해제된 것인데요. 완전한 비밀 해제는 아닙니다. 여전히 비밀입니다. 물론 국무성 보고서들은 신문이나 정치적인 그런 기사들이기 때문에 원문 그대로 배포가 되지만 30년이 지나도.]

[앵커]

알겠습니다. 그러면 이거는 한국 정부에서 만일 미국 정부에 요청을 하면.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국방성 정보는 그렇게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런 비밀해제는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복차림 군인 '편의대' 투입…어떤 상황?

[앵커]

알겠습니다. 편의대 부분이 논란이 된 부분. 오늘 나온 얘기. 편의대라는 것이 민간인 복장을 한 군인?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앵커]

얼마나 내려왔습니까, 광주에?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제가 목격한 것이 약 19일 정도 아니면 20일. 아마 하루 정도 차이 오차가 있을 겁니다마는.]

[앵커]

미리 왔다는 얘기죠? 20일보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20일보다 하루 전에 왔다고 기억하고 있는데.]

[앵커]

어디서 왔습니까, 그 사람들이?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 사람들이 서울에서 C-130수송기를 타고 광주에서 내렸고 광주에 내려서 격납고에 약 이틀 정도 머물렀다고 그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버스를 타고 광주 시내로 잠입을 했고 하는 역할은 이미 제가 몇 차례 얘기를 드렸습니다마는 시위대에 들어가서.]

[앵커]

여러 가지 루머를 퍼뜨리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루머를 퍼뜨리고 또 시위대를 이끌어서 예를 들어서 방화를 하도록 하고.]

[앵커]

과격하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무기를 들게 하고. 시위대를 과격화해서 폭동화시키는 그런 일을 했다고 나중에 제가 생각을 했습니다.]

[앵커]

그래야만 무력진압의 명분이 생기므로?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다. 그 당시에 제 보고서에는 '편의대가 와서 침투했다' 거기까지만 했습니다.]

[앵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보고를 다 받으셨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은 나중에 제가 알게 됐습니다. 5월 19일 그 사람들이 들어왔을 적에, 편의대가 들어왔을 때는 몰랐습니다.]

[앵커]

그런데 그러면 그 당시에 혹시 정보를 수집했을 때 이 사람들이 예를 들면 어떤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든가 하는 것을.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 당시에 유언비어는 '경상도 군인들이 광주시민을 다 죽이려고 한다'.]

[앵커]

그때는 저도 다른 지역에서 군인이었는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렇습니까?]

[앵커]

다른 지역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제가 있던 부대에도 그런 얘기들이 들려왔을 정도입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리고 북한 특수군이 들어왔다. 광주세무서를 불 지르자. MBC를 불 지르자. 이런 루머들이 많이 퍼졌습니다.]

[앵커]

실제로 MBC는 불에 탔습니다, 그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광주세무서도 불에 탔습니다.]

[앵커]

그렇군요. 편의대 얘기는 사실 여태까지 자세하게 알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규모가 만일, 아까 20~30명 수준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광주 전역을 20~30명이 커버하기는 어려웠을 텐데 혹시 더 왔는데 모를 수도 있겠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런데 편의대가 이렇게 운영이 됐습니다. 한 번에 20명, 30명이 오면 자기 임무를 수행하고 철수를 하고, 다른 편의대가 와서 다른 단계의 일을 하고, 임무를 하고 이렇게 운영이 됐기 때문에 30명은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앵커]

교대로 왔다는 이야기군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교대로 왔고요.]

[앵커]

굳이 교대로 올 이유가 있었을까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임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안사령부에서만 편의대를 보낸 게 아니고 다른 정보기관에서도 했으리라고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당시 '성폭행' 보고…어떤 내용이었나?

[앵커]

그렇군요.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겠습니다. 워낙 말씀 많이 하셨고 워낙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많이 알려져 있기 때문에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질문 안 드리겠는데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질문만 더 드리겠습니다. 성폭행 건에 대해서 오늘 말씀하셨는데.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예 했습니다. 그 성폭행에 대한 보고는 굉장히 간단하게 했습니다. 기억하기에 두 줄, 세 줄 정도밖에 안 되고요. 공수부대 요원들이 여성들을 sexual assault harassment, sexual violence 한 두 줄, 세 줄로만 보고를 했습니다.]

[앵커]

그것은 확실치 않아서 그렇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아닙니다. 우리가 첩보 보고서를 쓸 때에는 그렇게 길게 쓰지 않습니다. 그런 보고서는 간단하게 '이런 사건이 있었다'라고만 하면 됩니다.]

[앵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상황 같은 것은 이미 정보를 수집하셨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그렇게만 하면 그다음 follow-up은 특조위가 발족하면 거기서 하면 됩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그것은 누구한테 정보를 수집하셨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 정보도 우리 정보원을 통해서 받았습니다.]

[앵커]

대략 어느 정도의, 뭐 광범위했습니까? 혹은 또 그런 사건이 굉장히 많았습니까?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제가 그때 보고하기에는 숫자를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없고 그런 사건들이 일어났다고만 보고했습니다.]

[앵커]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오늘 인터뷰하면서 느낀 것은 김용장 선생께서 그렇게 과장해서 말씀하신 분은 아니다라는 그런 믿음은 제가 갖게 되는데, 사실 이런 문제도 과장해서 말씀하실 수 있는데 그러지 않고 계시기 때문에.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그것은 우리 손석희 앵커께서 몰라서 그런 질문하시는데 미 육군정보요원들은 여기서 밝힐 수 없는 그런 시스템이 있습니다.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우리는.]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여기서 좀 마치기는 해야 되는데요. 가시려면 날짜가 좀 더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저희들이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따로 연락을 드리든가 아니면 괜찮으시다면 한 번 더 모실 수도 있고요.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저에게 요청하시면 제가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제가 고려해 보겠습니다.]

[앵커]

잘 알겠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지에서 미군 정보요원으로 활약하셨던 김용장 선생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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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계탑입니다. 오후 1시에서 1시 30분을 향해 가는 시각, 80년 5월 21일 여기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조준 사격을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허장환/5•18 당시 보안부대 수사관 :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를 했습니다. 앉아쏴 자세에서 사격은 절대 자위적 투사(投射)가 아닙니다. 그건 사살이지.]

'발포가 아닌 사살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 씨와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 씨는 '계엄군의 사격은 사살이었고,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오늘(13일) 국회에서 증언했습니다. 김용장 씨는 39년만에 진실을 밝히고자 나섰는데, 오늘(13일) 뉴스룸에 직접 출연해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먼저 유선의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김용장 씨는 80년 5월 21일 전두환 씨가 광주에 와서 한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21일은 첫 번째 집단 사격이 있던 날입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이것 또한 제가 (백악관에) 보고한 내용입니다.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 보안부대장…]

회의 참석자로 지목된 이재우 505 보안부대장의 직속부하였던 허장환 씨는 전씨가 그 회의에서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허장환/5•18 당시 보안부대 수사관 :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했습니다. 전두환은 사살명령을 내린 겁니다.]

80년 5월 21일 오후 1시에서 1시 30분 사이, 전남도청 앞에서는 계엄군의 집단•조준사격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날 오전 11시, 국방부에서 회의를 한 전씨는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고 정오 무렵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1시간 뒤 사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두환 신군부가 이런 강경 진압을 위해 시민을 가장한 계엄군, 이른바 '편의대'를 보냈다고도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격납고로 찾아가서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나이는 20 혹은 30대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습니다.]

계엄군이 보낸 편의대가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그것을 명분으로 계엄군이 사격을 하는, 이른바 시나리오에 따른 진압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군 침투설은 말할 가치도 없다고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북한군 600명이 미군의 첨단 감시망을 피해서 들어오는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저는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보고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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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 있는 시계탑입니다. 오후 1시에서 1시 30분을 향해 가는 시각, 80년 5월 21일 여기서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집단•조준 사격을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발포 명령과 사살 명령은 완전히 다릅니다.]

[허장환/5•18 당시 보안부대 수사관 :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를 했습니다. 앉아쏴 자세에서 사격은 절대 자위적 투사(投射)가 아닙니다. 그건 사살이지.]

'발포가 아닌 사살이었다.' 5•18 당시 광주에서 활동한 미군 정보요원 김용장 씨와 보안부대 수사관 허장환 씨는 '계엄군의 사격은 사살이었고,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오늘(13일) 국회에서 증언했습니다. 김용장 씨는 39년만에 진실을 밝히고자 나섰는데, 오늘(13일) 뉴스룸에 직접 출연해 구체적인 내용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먼저 유선의 기자의 보도입니다.

[기자]

김용장 씨는 80년 5월 21일 전두환 씨가 광주에 와서 한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21일은 첫 번째 집단 사격이 있던 날입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이것 또한 제가 (백악관에) 보고한 내용입니다. 오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했습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 보안부대장…]

회의 참석자로 지목된 이재우 505 보안부대장의 직속부하였던 허장환 씨는 전씨가 그 회의에서 사살명령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허장환/5•18 당시 보안부대 수사관 : 그 사격은 제가 직접 목도했습니다. 전두환은 사살명령을 내린 겁니다.]

80년 5월 21일 오후 1시에서 1시 30분 사이, 전남도청 앞에서는 계엄군의 집단•조준사격이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증언을 종합하면 이날 오전 11시, 국방부에서 회의를 한 전씨는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고 정오 무렵 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1시간 뒤 사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은 전두환 신군부가 이런 강경 진압을 위해 시민을 가장한 계엄군, 이른바 '편의대'를 보냈다고도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격납고로 찾아가서 제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나이는 20 혹은 30대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습니다.]

계엄군이 보낸 편의대가 시민들 속으로 들어가 폭력적인 행동을 하고 그것을 명분으로 계엄군이 사격을 하는, 이른바 시나리오에 따른 진압이었다는 것입니다.

북한군 침투설은 말할 가치도 없다고 했습니다.

[김용장/5•18 당시 미군 정보요원 : 북한군 600명이 미군의 첨단 감시망을 피해서 들어오는건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저는 북한군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보고는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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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가 키운 사람의 황당무계한 주장
“전두환이 광주 방문해 사살명령…남한특수군이 방화•차량탈취 등 극렬행위 나서”
金永男(조갑제닷컴)  
1980년 당시 미 육군 501정보여단 군사정보관으로 활동했다는 김용장씨가 전두환이 5월 21일 광주를 방문해 ‘사살 명령’을 내렸다는 주장을 했다. 그는 올해 3월 JTBC와의 인터뷰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김씨는 1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라는 기자회견을 갖고 “죄 많은 십자가를 여러분 앞에서 감히 내려놓으려고 한다. 심지어 제 아내에게도 39년 동안 단 한마디 말하지 않았던 사안들”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이인영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를 비롯한 민주당 의원 여러 명이 참석하기도 했다. 박광원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은 사회를 봤다.

김씨는 “전두환은 (1980년 5월) 21일 점심 헬기를 타고 광주비행장에 왔다”며 “오자마자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다.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불상자 1명 등 4명이었다”고 했다. 이어 “이는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고 여기까지가 내가 보고한 내용”이라고 했다.

그는 “이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고 전제한 뒤 “그러나 오후 1시 도청에서 집단 사살이 이뤄졌고 이런 점을 보면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사살 명령이었다고 생각된다”고 했다. 그는 “발포명령과 사살명령은 완전히 다르다”며 “발포는 상대방이 총격을 가했을 때 방어차원에서 대응하는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전두환씨가 헬기를 타고 광주에 왔기 때문에 ‘플라이트플랜(비행계획서)’가 남아 있을 것이라며 5.18 특조위가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보면 될 것이라고 했다.

전두환 대통령 측은 당시 광주를 간 적이 없다고 수 차례 밝혀왔다. 이희성(李熺性) 당시 계엄사령관은 과거 崔普植 조선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광주 진압은 내가 지휘했고 전두환은 관련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는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 번 내려갈만하지 않은가’라는 최보식 기자의 질문에, “내려가 본들 뭘하겠나.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라며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이 있다.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라고 답했다.

이재우 당시 광주보안부대장은 1995년 1월 20일 이뤄졌던 진술 과정에서 전두환의 광주 방문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당시 이뤄진 관련 문답을 소개한다.

<문: 위 양심선언 내용에 의하면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작전부대의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인데 윤흥정 장군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난 일이 없다고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저도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장사복 당시 전교사 참모장은 1995년 6월 5일 이뤄진 진술 과정에서 “당시나 사후에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노태우 사령관의 내광사실에 대해 그와 같은 이야기 자체를 들은 사실이 없다”고 했다. 그는 “그들이 만약 전교사에 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참모장인 제가 알고 있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
 
김용장씨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더욱 황당한 주장도 내놨다. 그는 “북한군 침투는 전혀 없었고 보고할 가치도 없었다”며 “남한군특수군 관련 보고서는 직접 작성해 보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시민행세를 하던 사복군인들이 실제로 존재했고 이들은 5월 20일쯤 광주비행장으로 왔다”며 “성남비행장에서 약 30~40명이 수송기를 타고 광주에 왔다”고 주장했다. 그는 “첩보 입수 후 제 눈으로 확인했다”며 “나이는 20~30대 젊은이들이었고 짧은 머리에 일부는 가발을 썼다.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고 그 중에는 거지처럼 넝마를 걸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김용장씨는 “이들을 보낸 사람은 바로 전두환의 보안사령부였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지금부터 말할 내용은 ‘합리적인 추정’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특수군이 했다던 방화, 총격, 장갑차 및 군수송 차량 탈취는 일반 시민들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매우 극렬한 행위인데, 이 편의대, 감히 남한특수군이라고 부르겠는데, 이 남한특수군이 선봉에서 시민들을 선동하거나 직접 벌인 소행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들고 강경진압을 펼치기 위해 전두환이 고도의 공작을 펼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후 이뤄진 질의응답 과정에서는 ‘시신 수장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시신 소각이나 암매장에 대한 정보가 있었느냐’는 한 기자의 질문에, “5공 청문회 때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암매장은 없었다. 있었다면 가매장일 것’이라고 말했었다”며 “가매장한 시신들을 재발굴해서 광주통합병원에서 소각을 했고 시신 9구인가가 김해공항으로 수송됐다”고 말했다. 이어 “제 추론은 틀림없이 수장을 했을 것이고 시신들을 바다에 던졌을 것이라고 추론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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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이 1980년 5월21일에 광주에 내려왔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
당시 전교사 참모장과 보안부대장의 진술

장사복 전 전교사 참모장(1995.6.5 검찰 진술조서)
 
  문: 일부 고소인들과 당시 505부대의 수사관이던 허장환 등은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 K-57비행장을 통해 광주로 와 전교사에서 브리핑을 받고 귀경한 직후 전교사 기밀실에서 정호용, 윤흥정, 부사령관 김기석, 참모장인 진술인, 3개 여단장, 505부대장 등이 참석하에 회의를 열어 정호용과 여단장들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자위권 발동을 결정하였다고 하고 있으며, 당시 전교사 작전참모이던 백남이는 93.5.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시 5.22 전두환이 내광하여 전교사로 왔으며 당시 전두환 사령관의 비행장 도착과 전교사 출발사실에 대한 보고를 받은 바도 있으며, 5.27 작전개시 전 노태우 수경사령관이 전교사를 방문하였는데 자신은 노 사령관의 얼굴을 본 사실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는데 사실인가요.
  답: 저가 그 당시나 사후에라도 들은 이야기를 종합하더라도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나 노태우 사령관의 내광사실에 대해 그와 같은 이야기 자체를 들은 사실이 없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들이 만약 전교사에 와서 지휘관들을 만났다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고 누구보다도 참모장인 저가 알고 있을 터인데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으며, 참고로 당시 전교사의 주요 간부들 즉 윤흥정 사령관, 김기석 장군, 저, 김순현 장군, 임헌표 장군과 백남이 대령 등 전교사의 대령급 장교들로 구성된 친목모임인 “무등회” 라는 것이 있어 거의 매월 모임을 가지고 있는 바 백남이의 인터뷰 직후에 백남이도 있는 자리에서 인터뷰 기사를 화제삼아 백남이에게는 물론 참석자들끼리 서로 확인을 해보았지만 아무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고 당시 백남이도 우물쭈물하며 확실한 답변을 하지 않아 더 이상의 추궁을 하기도 무엇하여 넘어간 사실이 있었습니다.
 
  (중략)
 
  문: 백남이가 사실과 다른 증언을 할 이유가 있는가요.
  답: 저가 말씀드리기는 무엇하지만 통상 전교사 작전참모는 장군으로 승진을 할 수 있는 보직으로 여겨졌음에도 백남이는 장군진급을 하지 못하고 전역하였는데 그것은 아마 광주사태를 조기진압하지 못한 데 대해 당시에도 육본 작전참모부장 등으로부터 질책을 받았으며(저에게 하소연하며 눈물을 보인 사실이 있음) 5.24 교도대와 공수부대의 오인사격에 대해 백남이의 상황전파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사태 직후 징계를 받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이 되며, 이와 같은 일과 함께 저의 기억상으로도 노태우 사령관이 사태 후에 보안사령관이 되어 광주와 전교사에 한 번 온 사실이 있는데 이를 착각하여 증언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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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우 전 광주보안부대장(95.1.20 진술조서)
 
  문: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이었던 허장환의 양심선언(김영진 저, 충정작전과 광주항쟁 상권, 228정 이하) 내용에 의하면 보안사령부 대공과장 홍성률 중령이 5.18 오후에 광주사태의 진행과정을 확인키 위해 사태 감독관이라는 직책으로 내려와 5.20 저녁에 상경한 바 있다는데 그 내용이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홍성률 중령이 광주에 내려 왔던 것은 사실이나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5.21 이후에 보안사령부로부터 광주시내의 상황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내려와 광주 시내에 민간인 복장으로 들어가서 상황파악을 하는 등 임무를 수행하다가 5.27 도청 진압작전이 끝난 후에 상경한 것입니다.
 
  문: 위 양심선언 내용에 의하면 5.21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에서 사태진행과정에 대한 보고를 받고 헬기로 광주 일원을 둘러보고 간 바 있다는데 사실인가요.
  답: 그 내용은 사실이 아닙니다. 만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왔다면 두 가지 목적이 있을 것인데 하나는 작전부대의 위문이고 또 하나는 비밀 지시사항 시달로 추측할 수 있으나, 그렇다면 최소한 전교사 사령관을 만났어야 하고 저도 알고는 있어야 할 것인데 윤흥정 장군도 국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장군을 만난 일이 없다고 증언하였을 뿐 아니라 저도 전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터무니없이 꾸며댄 거짓말로 생각됩니다.
 
  문: 5.21 공수부대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하고 난 뒤에는 광주시내 상황을 어떻게 파악했는가요.
  답: 당시에는 보안부대 활동망, 경찰 정보망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여서 광주시내의 상황에 대하여는 거의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보안사령부에서 홍성률 중령을 내려보낸 것이며 진압작전과 관련해서는 작전부대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침투시켰었다는 사실을 진압작전이 끝나고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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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성 당시 계엄사령관, '광주 진압은 내가 지휘, 전두환 관련 없다.'
 
  최보식
  
   [(편집자 注)광주 5•18 사건 36주년을 앞두고 崔普植 조선일보 기자가 진압작전의 최종 지휘자였던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 李熺性(이희성) 씨를 인터뷰하였다. 월요일마다 조선일보에 실리던 '최보식이 만난 사람'은 어제 나오지 않았다. 이희성 씨는, 당시 신군부의 실력자였던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 겸 중앙정보부장이 광주 진압 작전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李 씨는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위험을 느껴 쏜 것일 뿐, 발포 명령도 없었다'면서, '광주 사태가 불처럼 他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民亂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알려진 인터뷰 全文은 다음과 같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5•18에 대한 유감 표명과 광주 망월동 묘역 참배설(說)이 보도됐을 때, 그쪽 관계자는 이렇게 해명했다.
 
   '광주 방문은 와전된 것이다. 5•18에 본인 책임이 있다는 뜻도 아니다. 당시 희생자가 있었고 대통령이 된 뒤로 충분히 수습을 못 한 데 대해 아쉽다는 표현이다. 지금까지 그는 광주의 가해자로 잘못 인식돼왔다. 이는 사실관계에서 명백히 틀린 것이다. 본인이 가장 억울해하는 대목이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광주 학살 주범'인데, 반성 없이 억울해하니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판단과 해석 문제가 아니라, 사실관계 문제라면 기자(記者)로서 한번 확인해볼 필요성은 느꼈다. 1980년 당시 정국을 관장한 李熺性(92) 전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만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첫인상이 단아했다.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전원주택에 살고 있는 그는 방문객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 무엇이 궁금하오? 하나하나 질문하면 답변드리지. 늙어서 생각이 잘 날지는 모르겠소.'
 
   나는 곧바로 본질로 들어갔다.
 
  ―당시 계엄사령관이라면 5•18 상황을 전체적으로 가장 잘 알 수 있는 위치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전국 계엄 상황이었으니, 국방장관과 대통령께 주요 사안은 보고했지만 내가 全權을 쥐고 통괄했다고 할 수 있소.'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5•18과 관련돼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았지요?
 
  '그렇소. 계엄사령관이었기에 책임을 진 거요. 5•18을 어떻게 보느냐를 떠나 결과적으로 피해가 크지 않았소. 희생자와 유족이 많이 생기지 않았소. 국가적으로 이를 추스르는 차원에서 이들의 요구와 주장을 감안해야 하는 거요. 내가 높은 자리에 있었기에 그걸 피할 수는 없는 거요. 도의적 책임을 진 거요(8개월 복역하고 특별사면됨).'
 
  ―당시 국정 수반인 최규하 대통령도 도의적 책임이 있습니까?
 
  '그건 아니오. 군의 작전 상황이니 계엄사령관과 국방장관에게 있지, 군을 잘 모르는 대통령께서야 책임질 일이 아니오.'
 
  ―도의적 책임은 그렇고, 실제적인 책임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5•18 당시부터 대학가에서는 '광주 학살 주범'으로 전두환을 특정했습니다.
 
  '그건 군의 작전 지휘 계통을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요.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5•18과는 무관하오. 그는 12•12(19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수사를 이유로 정승화 육참총장을 강제 연행한 사건)와는 상관있지만 5•18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소.'
 
  ―계엄군 출동과 발포 명령을 그가 배후 조종했다는 게 통설입니다.
 
  '법정에서도 '지휘 체계가 이원화됐다'는 말들이 있었소.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나 몰래 따로 보고받고 지시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범죄요. 그러면 내가 그냥 두고 볼 것 같소. 내가 있는데 있을 수 없는 일이오.'
 
  ―계엄사령관이 위계상 높지만 당시 모든 힘이 전두환에게 쏠리지 않았습니까?
 
  '전두환은 새카만 후배였고 내게 '형님, 형님' 하며 어려워했소. 나를 뛰어넘어 감히 월권해? 내 성격을 알고 이런 관계만 알아도, 그런 소리가 안 나옵니다. 전두환은 밝은 사람이지, 음습하지 않아요. 몰래 그렇게 하는 스타일이 아니오. 내 단호히 얘기하오. 광주에 관한 한 전두환 책임은 없소.'
 
  ―그렇다면 5•18에 전두환을 지목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라고 봅니까?
 
  '광주가 수습되고 3개월 뒤 그가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오. 대통령만 안 됐으면 전두환 이름이 그 뒤로 나오지 않았을 거요.'
 
  ―전두환이 아니라면, 누가 5•18에 대해 책임이 있는 겁니까?
 
  '지휘 계통의 최고위에 있는 계엄사령관인 나와 국방장관(周永福)이오.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았소. 전두환에 대해 과대평가하고 있어요. 그는 보안사령관이었고, 내 참모에 불과했소. 참모로서 내게 건의할 수는 있었겠지만, 작전 지휘 체계에 있지 않았소. 진압 작전에 개입할 수 없었소. 그는 광주에도 내려간 적이 없소.'
 
  ―적극적인 스타일인 전두환이라면 광주에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니 오히려 한번 내려갈 만하지 않았습니까?
 
  '현지 보안 부대를 통해 보고가 올라오니까 그도 광주 상황을 알고 있었소. 내려가 본들 뭘 하겠소. 부대장에게 격려금이나 건네주는 게 고작이잖소.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내게 보고하고 광주에 내려간 적 있소. 광주 현지 부대에 배속시킨 공수여단 격려차 간 것이오.'
 
  ―전두환이 육사 동기생 정호용을 통해 작전 지시를 했다는 설도 있었습니다.
 
  '재판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데, 정말 군대 체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요. 특전사령관도 광주에 파견된 자기 부하들을 지휘할 수가 없소. 작전 책임과 지휘권은 배속된 부대 지휘관에게 있소. 조언은 할 수 있겠지만, 이래라저래라 작전 지휘를 하는 것은 군법에 어긋나는 거요.'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1980년 5월 21일 '자위권(自衛權) 보유 천명' 담화를 발표할 때 보안사 참모가 초안을 건네줬다'고 진술하지 않았습니까? 이를 전두환의 5•18 개입 증거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내가 검찰 조사를 서너 번 받았어요. 꼭 밤중에 잠 안 재우고 심문을 했어요. 졸려서 정신이 몽롱해질 새벽에 진술서 서명을 받아요. 검찰이 신사인 줄 알았는데 그런 트릭을 써요. 그래서 보안사 참모인지 계엄사 참모인지 헷갈렸던 거요. 계엄사 참모였다고 하더군요. 설령 보안사 참모라고 해도 그런 건의를 해올 수 있는 거요.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오. 애초에 담화 발표 구상은 나 혼자서 한 거요.'
 
  ―왜 그런 구상을 했습니까?
 
  '계엄군이 일방적으로 공격당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다만 담화 내용에 대해 신경을 썼어요. 장차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봤으니까. 그래서 참모들을 불러 문안을 검토한 뒤 발표했소.'
 
  ―장차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걸 그때 예상했다는 건가요?
 
  '재판 과정에서 '사정을 모르는 병사들은 자위권을 발포 명령으로 알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왔소. 그런 해석은 오버요. 공격을 받아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 개인마다 정당방위 차원의 '자위권'이 있다는 것이오. 피동적인 것이오. 발포 명령과는 다르오. 더욱이 담화문에서 '자위권이 있다'고 한 게 아니라 '자위권이 있음을 경고한다'고 했소. 예방 목적이지, 자위권을 적극적으로 발동하겠다는 뜻이 아니었소.'
  
  ―자위권을 천명한 담화 발표 뒤 계엄군에게 실탄이 지급됐습니까?
 
  '실탄 지급은 일선 부대 지휘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거지, 계엄사령관이 이래라저래라 할 사안이 아니오.'
 
  관련 재판 기록을 보면 '자위권 담화'가 있기 전에 실탄 발사가 이미 있었다. 5월 19일 시위대에게 포위된 계엄군 장교가 위협사격을 한 게 첫 발포였다. 20일 밤 광주역에서는 실탄 사격으로 4명이 숨졌고, 21일 담화 발표가 있기 전에도 총격전이 벌어졌다.
 
  ―누가 발포 명령을 한 겁니까?
 
  '1996년 재판 당시 광주 현지까지 내려가 조사를 벌였으나 발포 명령을 내린 지휘관이 없었어요.'
 
  ―총 맞은 시민들이 있는데 발포 명령자가 없다는 게 과연 말이 됩니까?
 
  '전투라는 게 우발적이고 부화뇌동해서 일어날 수도 있소. 겁에 질려 있는 사병들이 막 쏘고, 어디서 날아온 총알에 누가 맞았는지도 가릴 수 없었소. 한밤중에 아군끼리 교전도 있었소. 다만 5월 27일 전남도청 재진입 작전은 적극적이었소. 도청 지하실에 TNT와 수류탄 등 무기가 있었고 무장한 주동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당시 북에서 이를 이용 안 할 리가 있었겠소.'
 
  ―당시 담화문에 '상당수의 다른 지역 불순 인물 및 고정간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해 광주에 잠입해…'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근거가 있는 겁니까?
 
  '첩보는 있었지만 확증을 잡지 못했소. 확증이 없는데 어떻게 얘기하겠소. 다만 무기고를 털고 시위대를 조직적으로 이끄는 등 민간인이 할 수 없는 행동이 있었소.'
 
  ―광주가 수습된 뒤 왜 조사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때는 뒤처리와 민심 위무(慰撫)가 시급해 그런 조사에 착수할 수 없었소.'
 
  ―공수부대를 투입해 초기에 과잉 진압을 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주장이 있었는데요?
 
  '당시 공수부대는 소요 진압 임무가 있었소. 5월 18일 아침 휴교령이 내려져 있는데 학생들이 들어가겠다며 전남대 정문에서 군인들과 충돌한 게 발단이었소. 학생들은 가방에 넣어온 돌을 던졌고 군인들이 무방비로 맞은 거요. 그 뒤 시내에서 학생들이 집결하자 군인들이 뒤쫓아가며 진압봉으로 두들겨 팼소. 이를 본 시민들은 공수부대원들이 무자비하다고 흥분한 거요. 어떤 세력이 '경상도 공수부대가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며 악성 루머를 퍼뜨렸소.'
 
  ―광주가 수습된 뒤인 6월 초 정부 합동조사단이 현장 조사를 마치고 '초기 진압 작전의 과오 책임을 물어 당시 현장 지휘관을 군법회의에 회부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린 게 맞습니까?
 
  '그건 맞소. 하지만 내가 반대했소. 현장 지휘관은 잘못한 것이 없는데…. 결과적으로 많은 피해자가 생겼으나 그건 앞서 말한 대로 불가피한 상황도 없지 않았소. 나는 지금도 작전 실패는 아니라고 봐요.'
 
  ―숱한 사상자를 낳은 국가적 비극을 초래했는데?
 
  '한 사건을 이쪽•저쪽, 위•아래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오. 광주 사태가 불처럼 타 지역으로 번져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나라가 어떻게 될까, 그때 우리 군에서는 그런 국가 위기 상황을 걱정했고, 절실했습니다.'
 
  ―1996년 '역사 바로 세우기' 재판에서 그 나름대로 진실 규명이 이뤄졌다고 봅니까?
 
  '내 입장에서 보면 허무하게 진행됐소. 공판 과정에서 내게는 질문이 거의 없었소. 오직 전두환에게만 하고. 당시 정국을 총괄한 계엄사령관에게는 별로 질문할 것이 없었던 모양이오.'●
 
 
 [ 2019-05-13, 15:29 ]

  • 白丁 2019-05-20 오전 7:23:00
    JTBC 가 언제 사실 여부 확인하고 보도했나? 이런 게 언론이면 파리도 새다.
  • 1 2019-05-17 오후 8:08:00
    사실은 단하나 밖에없는것 진실이다!!! 이더이상 5.18을 장식하거나 새롭게 조명하거나 진실이라는 미명하에 이런 저런 에기 하지말라!!! 현재까지의 5.18의 명예만으로도 과대 포장된 면이 없지않다!!! "민주화 투사(?) 양산","지역분렬조장적인 지역 우월적인 행패"는 더이상 명예롭지못한 5.18 정신이다!!! 이제는 5.18의 사실을 재검에 재검하여 보다더 빛나는 5.18로 만들어 국민의 사랑과 존경받는 참 5.18정신이 되도록 갈고 닦아야한다!!! 사이비 민주화 운동자 특히 특수한 당의 고위 정치인들에게 민주투사의 칭호는 가당치않다!!! 가차없이 쏚아내고 참된 5.18인을 엄선하여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도록 해야한다!!! 진정한 자유 민주 대한민국의 애국적인 5.18이 되라!!! 지역주의적 편파성을 배제하고 전국민과 더불어 융합되는 5.18이되기를 간절히바란다!!!
  • 골든타임즈 2019-05-17 오전 5:55:00
    거대 보수 여당, 한나라당을 파괴하고,
    우파가 우파를 배신한 사기탄핵자들,
    그들의 기회주의. 출세주의는 좌파와 동일하다.
    도장들고 나르샤, 만악의 핵심이다.
    두 번 속지 않는다.
  • rhois99 2019-05-15 오후 10:39:00
    해마다 5.18일 되면 무슨 양심선언이 그리많은지 내년에는 어떤 증언이 또 나올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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