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뢰인으로 알게 된 칠십대쯤의 남자가 있다. 이면도로의 가게에서 부부가 돼지고기를 구워 팔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가난한 시골집에서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면서 컸다고 했다. 서울로 올라와 가구 만드는 일을 비롯해서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다. 그는 태극기 부대의 소속원이라고 하면서 집회가 열리면 빠짐없이 참석한다고 했다.
“태극기 부대에는 왜 참석하게 됐어요?”
내가 궁금해서 물었다. 얼핏 환경을 생각하면 그는 보수 우익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아니라 촛불부대 쪽으로 가야 하는 환경 같았다. 국가에서 주는 복지혜택을 받아야 하는 노인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경제가 침몰하고 있잖아요? 경기가 좋아야 사람들이 돼지고기에 소주를 마시기도 하는데 영 장사가 안되요. 시급(時給)이 높아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서민이 땀흘려 일해서 집 한 채 장만하면 그 값이 올라가는 걸 보고 흐뭇해하고 예전 같이 집을 사고 팔고 그렇게 부동산 경기가 있어야 술도 마시고 고기도 사 먹으러 오는데 이건 영 아닌 거예요. 집값이 올라도 양도소득세로 정부에서 다 뺏어가요. 앞으로 공시지가를 올려서 세금을 왕창 뜯어가려고 한대요. 복지를 한다고 하면서 뜯어낸 세금으로 막 인심을 쓰는 거에요. 이 정부가 사회주의로 가고 있어요. 그걸 막으려고 태극기를 들고 나선 거에요. 매달 3만 원씩 내 돈을 내가면서 시위대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가면 태극기하고 떡과 물을 주기도 해요.”
순수한 그의 철학만은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에 의해 그 프로그램이 머리 속에 입력된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글 속에 나오는 공산당원인 세탁소 아저씨는 또다른 사상이 입력되어 있었다.
“태극기 부대는 대부분 노인이던데 힘들지 않아요? 갑자기 화장실을 가고 싶을 때도 있으시고 말이죠.”
“태극기 부대도 서울역 앞에 모이는 사람들, 시청 앞에 모이는 사람들같이 지역적으로 나뉘어져 있어요. 처음에는 노인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청년들도 많이 가담해요. 얼마 전에는 민주노총 시위와 맞서서 했는데 모두 용감해졌어요. 이제는 애국당으로 정치적으로 조직화됐어요. 국회의원 한 분이 애국당을 이끌어가요. 그 분 연설을 들었는데 자기는 절대 대통령이 되려고 태극기부대를 이끄는 게 아니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더라구요. 그러니까 믿고 따르는 거죠.”
이미 노인의 마음에는 그 국회의원을 존경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는 표정이었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 시위를 하시는 거죠?”
“나는 잘 모르는데 연사로 나오는 변희재씨의 말을 들으면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이 완전히 잘못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태극기부대에서 매주 수백통의 편지를 박근혜대통령에게 보낸다고 그래요. 박근혜 대통령 석방운동을 하는 거죠. 또 지금 정권에서 한미동맹을 깨려고 하고 있대요. 한미동맹이 없어지면 우리가 바로 적화될 게 아닙니까?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해요. 공산주의가 되면 안됩니다.”
노인의 얼굴에는 투사 같은 강한 확신이 비치고 있었다. 그가 덧붙였다.
“시위 때 맨 앞에 선봉인 사람들이 서고 그 뒤를 나같은 노인 시위대가 받쳐주고 있어요. 뒤에서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굳건히 밀어주고 앞의 선봉에서 몇 명의 희생만 나오면 정권도 엎어버릴 수 있다고 하더라구요. 우리 태극기 부대는 이미 민주노총 시위대와 맞서고 있어요. 벌써 광화문 시위에서 다섯 명이나 죽었다고 하는데 신문에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대요. 좌파데모에서 백남기 농민 한 사람이 죽어도 그 난리인데 말이죠.”
노인은 다혈질이었다. 스스로 불 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는 투사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이어야 하는데 그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대립을 조장하고 불이 붙는 속에 기름을 붓는 느낌이다. 뼈와 뼈가, 돌과 돌이 부딪치는 세상이다. 법원의 재판현장에서 민주노총 금속노조나 피복노조의 골수 조합원을 보면 눈에서 증오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태극기 부대의 노인은 이승만 박사를 존경한다고 하고 내가 본 민주노총의 조합원은 박헌영 동지를 존경한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자유를 다른 한쪽에서는 복지를 구호로 세우고 있다.
자유와 복지는 배척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 수레의 두 바퀴가 아닐까? 복지가 든든한 바탕이 되어야 그 위에 자유는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서로 험한 눈을 뜨고 증오와 증오가 부딪치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개개인의 영혼이 깨어났으면 좋겠다. 정치학자이고 우리의 역사를 꿰뚫고 있던 고 김상협 고대 총장의 말처럼 자유복지국가로 나침반을 설정하고 갈 수는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