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2일 아베 일본 총리(오른쪽)는 필자와 8년 만에 다시 인터뷰를 했다. |
총리 관저 집무실에서 인터뷰에 응한 아베 총리(오른쪽). 필자의 왼쪽은 통역을 맡은 니시오카 쓰토무 도쿄기독교대학 교수. |
※ 무라야마 담화=1995년 8월 15일 전후 50주년 기념일에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 총리대신이 내각회의의 결정에 근거, 일본이 태평양 전쟁과 전쟁 이전에 행한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뜻을 표명한 담화이다. 아베 신조 현 총리는 제1차 총리 재임 시절이던 2006년 10월 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무라야마 담화에 대하여, “아시아의 나라들에 대해 큰 피해를 주고 상처를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면서 “나라로서 표명한 그대로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정부로서든 개인으로서든 계승해 간다고 밝혔다. ※ 고이즈미 담화=2005년 8월 15일 전후 60주년 기념일에 당시 총리였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총리대신이 각료회의 결정을 통해 발표한 담화문으로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담화에서 “통절한 반성과 진심으로 사죄하는 마음을 표명함과 동시에 지난 전쟁에 있어서 내외 모든 희생자에게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면서 “아시아 국가들과의 상호이해와 신뢰에 기초한 미래지향적 협력관계를 구축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 고노 담화=1993년 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이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강제성을 인정한 담화이다. 당시 고노 관방장관은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 요청에 의해 설영(設營)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위안소의 설치·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했다”면서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표명했다. |
2006년 10월 9일 방한한 아베 당시 일본 총리 부부가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있다. |
—국제사회의 대북(對北)제재가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이번 미일 정상회담에서 유엔 안보리의 제재와는 별도로 두 나라가 독자적 대북 압박 정책을 펴기로 합의하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제재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지금은 사무적인 사안들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하신 UN결의를 따르는 것도 필요하지만, UN결의와는 별도로 이미 일본의 독자제재를 결정했습니다만, 일미(日美)가 협력해 제재를 실시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말씀드린 겁니다.
과거에는 방코델타아시아(BDA)의 계좌를 동결했었습니다. 그때도 일미가 협력을 하고, 일본도 다른 국가들에 협력을 호소했습니다. 이러한 금융제재를 포함하는 추가적 제재를 검토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북한도 당시 제재로 인해 데미지(damage)를 받았기 때문에, 대비는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울러 이런 부분을 감안해 북한이 ‘지금의 정책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정도의 제재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금융제재가 효과가 있으려면 북한 지배층의 해외 계좌를 개인별로 동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도 특정 개인 계좌에 대한 제재는 실행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개인, 단체를 더 추가하게 될 것입니다만 이러한 것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실행해 나가면서, 일・미・한이 협력해 실태를 정밀히 조사해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정보를 서로 교환해서 효과적인 제재를 생각해 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는 북한이 저지른 핵개발, 강제수용소 등 인권탄압과 납치 등 국제범죄를 최종적으로 해결하려면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자유통일을 통하여 북한정권을 소멸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한국 주도의 한반도 자유통일에 대한 총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북한에선 정말로 인권이 탄압당하고 있습니다. 저는 한반도가 평화적으로 통일이 되어 민주적이며 자유롭고,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법의 지배를 존중하는 통일국가가 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수많은 주민들이 문화생활을 유지할 수 없고, 인권이 현저히 침해받고 있는 북한의 상황에 대해 나도 가슴이 아픕니다.”
“내가 極右라면 세계 나라 모두가 극우”
—한국의 언론은 대체로 일본이 우경화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일부 언론은 현 일본정권을 극우라고 표현하기까지 하는데, 자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도 이기면 자위대 명칭 변경 및 집단 자위권 행사를 위한 개헌을 시도할 생각입니까?
“저의 정책 자체가 극우적이라고 종종 한국의 매스컴으로부터 비판받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정권에서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킨 것, 그리고 지금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관련된 해석의 검토를 시작한 것, 또한 자민당이 헌법을 개정한 후 자위대의 명칭을 국방군으로 바꾸기로 결정을 한 것들에 지적을 받았습니다.
과거 서울대학교에서 소수의 청중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도 제가 방위청을 성(省)으로 승격시켜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함으로써 일본을 극우적인 군국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게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은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할 수 없습니까? 한국의 방위를 담당한 정부기관은 다른 부처보다 격이 낮은 기관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국을 포함한 대다수 국가도 채택하고 있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는, 안전보장 체제와 비슷하게 되려는 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칭에 있어서도 한국도 군대입니다. 저의 주장이 극우적이라면 세계 국가들 모두 극우국가가 됩니다.”
—한자(漢字)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동북아의 한·중·일 세 나라는 외교적 갈등과는 별개로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항구적 공존공영(共存共榮)을 위하여 국가 간 문제해결 방식에서 정경(政經)분리 원칙이라든지, 군사적 해결방식의 배제 등 최소한의 안전판을 만들 필요는 없을까요?
“군사적 선택지(選擇肢)를 배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에 동의함으로써 3개국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안정감이 보다 향상되어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국경을 접하거나 하면 여러 가지 과제, 혹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경제압력을 가한다든지, 경제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은 그것을 발동시킨 국가 자체가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므로 서로 삼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일본은 중국과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중국에 투자해 또는 수출해 큰 이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중국도 일본의 투자로 고용을 확보하고 있으며, 일본만이 만들 수 있는 반제품을 수입, 가공해서 수출함으로써 큰 이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를 서로 훼손하는 것은 양국에 마이너스가 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현실을 서로 이해하는 것은, 중한(中韓)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대응을 지도자가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상호방문 늘어야 국민감정 해소”
—저는 기본적으로 한자문화를 공유하는 한·일·중, 그리고 동남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는 역사 문제, 영토 문제 해결은 어려울 것이나 미래를 위해 협조함으로써 영토 문제, 역사 문제의 갈등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경분리, 무력사용 배제, 국민친선의 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나 자신도 기본적으로 전(前) 편집장의 생각에 찬성합니다. 우선 군사적인 선택지를 배제해야 합니다. 경제는 서로 필요한 관계입니다. 일・중・한이 경제관계를 강화해 나가는 것은 각국의 국익 증진에 서로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과제가 발생해도 영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냉정한 대응이 필요합니다.
또한 일한(日韓) 사이에서도 지금 문화교류가 활발합니다. 오늘 텔레비전을 보면 아시게 될 텐데, 한국 드라마가 많이 방영되고 있습니다. K-pop이 거리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서부터 서로에 대한 이해가 진행되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의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시아의 청년들을 일본에 초청하는 ‘제네시스 2.0’이라는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제네시스 2.0’ 계획에 따라 한국에서도 4000명의 젊은이들을 일본으로 초대하고 싶습니다. 문화의 교류, 사람의 교류, 젊은이의 교류를 더욱더 활발하게 만들어 가고 싶습니다.”
—지난해 8월 이후 한일 정부 간 갈등이 과거와는 달리 두 나라 국민들 사이의 반감으로 악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엔저(低)의 영향도 있겠지만 최근에는 한국에 입국하는 일본인 관광객이 크게 줄었습니다. 두 나라의 정치 지도층이 책임지고 이러한 국민 감정의 악화를 막을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당장의 상세한 수치까지는 아직 알고 있지 않습니다만, 작년엔 351만명의 일본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전년 대비 7%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왕래가 늘어나면 양국관계도 안정되고, 이해도 늘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스컴 등으로부터 얻는 정보만으로 상대를 판단할 것이 아니라, 실제로 상대방 국가를 방문해 그 나라의 사람들과 교류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판단을 통해 인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면 한국의 반일적(反日的) 분위기, 또는 일본의 반한적(反韓的) 분위기가 해소되는 방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방향으로 가도록 저 자신도 노력해 나갈 겁니다.”
“사소한 발언이 외교 악화시킬 수 있어 나도 주의”
—작년 한일관계 악화의 계기가 된 이명박 대통령의 이른바 천황(天皇) 관련 발언은 사실관계가 잘못 알려진 면이 있습니다. 이(李) 대통령의 그 발언은 준비되거나 계획된 발언이 아니었습니다. 교사들 모임에서 예정에 없던 질문을 받고 한 이야기였습니다. 언론의 제1보는 발언 내용을 잘못 전달한 일종의 오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의 정치인들이 과민, 과잉 반응을 하여 사태가 악화된 면이 있습니다.
“귀하도 매스컴의 일원이십니다만, 어떻든 언론은 계획되지 않은, 준비되지 않은 발언을 끌어내려 합니다. 외교에선 그러한 사소한 것이 계기가 되어 관계가 악화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나도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는 서울시장 시절부터 몇 번 만난 적도 있어 기본적으로는 사람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에 일본에 와 보니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베노믹스’로 불리는 경기 부양책 덕분인지 경제가 살아나고 활기가 느껴졌습니다. 아베 총리의 지지율도 높아졌습니다. 궁금한 건 금융완화, 즉 통화량 팽창 정책을 중심으로 하는 인위적 부양책이 단기적인 것인지, 장기적으로 견지할 것인지 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10년 이상 디플레이션(물가안정, 금리안정, 소비둔화 등)을 겪으면서 불황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금융정책에 대하여 설명드리면 물가상승률 2%라는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시키기 위해 일본은행은 대담한 금융완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이와 동시에 기동적인 ‘재정 출동’(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과감한 공공투자)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는 여러 번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번의 ‘보정예산’은 상당한 대규모이지만, 우선은 디플레에서 탈출하기 위하여 모든 정책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지금도 아직 디플레 중이므로 바깥에서 보면 큰 변화로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루빨리 경제를 안정적인 성장궤도에 올리고 싶습니다. 성장전략을 추진하면서 규제완화도 하고 혁신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을, 해외투자가와 비즈니스맨들에겐 가장 일하기 쉬운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한국의 비즈니스맨이나 기업에 있어서도 일본이 투자선(投資先)이나 기업활동을 하기 쉬운 나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朴 대통령과 신뢰관계 구축, 새로운 시대 만들고 싶다”
1971년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기시 노부스케(가운데) 전 일본 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기시 전 총리는 아베 총리의 외조부이다. |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부탁합니다.
“나의 지역구는 조선통신사가 처음 상륙한 시모노세키로서, 조선통신사의 비(碑)를 세울 때 이곳 출신 정치인으로서 참석했습니다. 한국에선 김종필(金鍾泌)씨가 참석, 훌륭한 휘호를 남겼습니다.
시모노세키는 부산과 자매도시로서 매년 ‘부산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나는 지역구 출신 정치인이므로 늘 맨 처음 인사를 드리곤 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글 표기가 가장 많은 도시인데, 모든 표지판에 한글이 병기(倂記)되어 있습니다. 그런 곳이 저의 지역구입니다.
역시 지금부터 일본도 한국이 필요하고, 한국도 일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주면 합니다. 지금부터 더욱 일한(日韓)관계를 발전시키려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과 나는 정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대단한 고난을 극복해 대통령이 되셨습니다. 나도 공감하는 부분이 있고 신뢰관계를 구축해 나가고 싶습니다.”
—저는 박정희 전기를 썼는데,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는 박 의장이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1961년 11월에 만나 인연을 맺었고, 1979년 10월 26일 박 대통령이 피살되어 국장(國葬)이 치러졌을 때 일본 측 조문단장으로 오셨더군요. 총리께선 2006년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유세 중 피습되어 입원하였을 때는 사람을 보내 위로의 뜻을 전했습니다. 양국을 대표하는 정치 집안 출신으로서 미래의 한일관계를 잘 이끌어주셨으면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모가 암살되고 본인도 습격을 받아 얼굴에 상처를 입었는데 그런 어려움을 겪고도 고난을 극복한 분입니다. 정말로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합니다. 관방장관 시절엔 함께 식사를 한 적도 있습니다. 박 대통령과 신뢰관계를 구축하여 일한(日韓)의 새로운 시대를 만들고 싶습니다.”
安在鴻 연설
기자는 약속한 인터뷰 시간이 끝날 때 준비한 마지막 질문 아닌, 연설 하나를 일본 총리에게 소개했다. 약간의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1984년 여름 나는 도쿄 부근 가와사키역에서 모리타 요시오씨(森田芳夫)를 만났다. 당시 72세의 이 노인은 서울의 한 대학교 일본어학과 교수로 있었다. 여름방학을 틈타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가 우방협회(일제 시절 한국 거주 일본인들 모임)의 지원을 받아 쓴 ‘조선終戰의 기록’(1964년 출판)은 1038쪽에 달하는 大作이다.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1945년 패전 뒤 철수할 때까지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뺄 수 없는 자료로 현대사 연구에 古典이 돼 있다.
모리타 씨는 군산에서 났다. 合倂(합병) 전에 벌써 한국에 건너왔던 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京城帝大(경성제대)를 나왔으며 그의 아내도 한국에서 난 일본인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에서 철수할 때 거류민 단체에서 실무를 보다가 귀환, 일본 외무성에 들어가 패전 뒤의 철수관계 조사원으로 일했다. 1965년의 韓日국교 정상화 1년 전부터 駐韓(주한) 일본대사관에서 근무하기 시작, 1975년에 참사관으로 퇴직할 때까지 줄곧 한국 생활을 했다. 퇴직 뒤 바로 서울의 한 대학교 일본학과 교수가 되었으니 그의 한국 생활기간은 일본 생활의 세 배나 된다.
“책을 쓰면서 저의 생각도 많이 정리되었습니다. 역시 힘에 의한 지배는 좋지 않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억지로 합쳐졌지만 헤어지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의 가장 큰 책임은 한반도의 분단입니다. 역사에 가정이란 게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만, 항복을 결정한 御前(어전)회의가 8월9일이 아니라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진 8월6일에 열렸다면 소련은 참전의 시기를 놓치고 38선도 없었을 것입니다. 반대로 8월9일 御前회의에서 決死抗戰(결사항전)의 주장이 이겼다면 소련 기갑부대는 부산까지 남하했을 것이고, 미군은 인명손실을 막으려고 상륙을 포기, 한반도는 赤化(적화)되었을 것입니다.”
모리타 씨는 이것만은 꼭 기사에 써달라면서 설명했다.
“책을 쓰면서 제가 감격에 못이겨 눈물을 흘린 자료가 있습니다. 8월15일 오후 3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安在鴻 선생(建準 부위원장)이 한 연설 대목입니다.”
나는 아베 총리에게 “끝으로 역사적 연설을 하나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이 이 연설 덕분에 많은 생명을 구하였다고 고마워합니다”면서 모리타 씨로부터 들은 연설 내용을 읽어주었다.
‘(끝으로 국민 여러분께서는 각별히 유의하여 일본 거주민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40년간의 총독 통치는 이미 과거의 일이 되었습니다). 조선·일본 양 민족의 정치 형태가 어떻게 변천하더라도 두 나라 국민은 같은 아시아 민족으로서 엮이어 있는 국제 조건 아래서 自主·互讓(자주 호양)으로 각자의 사명을 수행해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일본에 있는 500만의 조선동포가 일본에서 꼭 같이 수난의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조선에 있는 백 수십 만 일본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총명한 국민 여러분께서는 잘 이해해 주실 것을 의심치 않습니다.’
아베 총리는 경청하더니 “아주 훌륭한 연설입니다”고 말하면서 인터뷰를 끝냈다. 사무실을 나오는데 도쿄 방송 인터뷰 팀이 장비를 갖고 들어오고 있었다.
박근혜-아베 통화
지난 3월6일 아베 총리는 朴槿惠 대통령과 최초의 전화 통화를 가졌다. 총리는 '일본과 한국을, 21세기에 어울리는 미래지향의 관계로 발전시켜야 하므로 긴밀하게 협력하고 싶다'고 했다. 대통령은 '韓日은 동아시아에서 중요한 파트너이므로 역사문제가 다음 세대에 짐이 되지 않도록 미래지향의 관계를 만들어가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두 사람은 또 北核 위협에 공동 대처하기로 합의하였다. 지난 3월8일 새벽 아베 총리는 핵실험을 한 북한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결의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번 제재가 유엔헌장 7조에 근거한 구속력 있는 것이란 점을 강조하고, 北核은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일본에도 똑 같은 위협이므로 韓美日(한미일) 세 나라가 연대하여 대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날 일본 방위청은 미군이 추가 배치하기로 한 미사일 탐지 엑스 밴드 레이더의 설치 장소를 동해에 면한 단고(丹後)반도로 결정, 미국에 통보하였다. 한국과 일본의 ‘北核(북핵) 대비 安保(안보)협력’이 영토 및 역사관의 차이를 어느 정도 희석시킬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