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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 파도 안 나오는 ‘5·18 암매장’ 屍身 40년간 암매장 유해 발견 건수 ‘0’ 李知映(조갑제닷컴)  |  2019-08-05

5·18 루머의 기정사실화에 집착하는 文정권

“1980년 오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 진실은 오랜 시간 은폐되고, 왜곡되고, 탄압받았습니다. …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오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5·18 기념사 中

5·18의 진상을 규명한다고 나선 문재인 정부는 과연 2018년 2월, 없던 헬기 사격을 있었던 것으로 만들어내며 국군을 ‘양민학살’ 집단으로 모는 데 성공(?)했다. 기존의 모든 국가적 조사 결과와 40년 가까이 “헬기 사격 없었다”는 당시 조종사들의 일관된 증언은 무시됐다. 국방부 장관은 사과 발표까지 했다.

문재인 정부는 광주사태 이후 떠돌던 ‘루머’들을 기정사실화 하는 데 집착하고 있다. 일명 ‘5·18 왜곡 바로잡기’이다. ‘헬기 사격설’이 그랬고, 성폭행 등 ‘여성 인권 침해행위’에 대해서도 국방부가 인정하는 발표를 했다. 실제 문 대통령은 2019년 5·18 기념식에 참석해 문 정부의 5·18 성과를 자찬(自讚)하며 ‘진상규명’을 독려했다.

“… 학살의 책임자, 암매장과 성폭력 문제, 헬기 사격 등 밝혀내야 할 진실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아직까지 규명되지 못한 진실을 밝혀내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 우리 정부는 국방부 자체 5·18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통해 계엄군의 헬기 사격과 성폭행과 추행, 성고문 등 여성 인권 침해행위를 확인하였고, 국방부 장관이 공식 사과했습니다. 정부는 특별법에 의한 진상조사 규명 위원회가 출범하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자료를 제공하고 적극 지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남은 것은 행방불명자의 암매장 확인과 발포명령자의 특정. 모두 여러 차례의 국가적 조사와 1997년 대법원 확정판결 과정에서 없었던 것으로 확정된 사실이다. 특히 ‘시체 암매장’은 1995년 광주지검이 의혹 장소 11개 지역에 대해 조사했으나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현재 ‘암매장 시신 발굴조사’를 주도하는 것은 5·18기념재단이다. 이 단체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후반까지 광주시와 함께 암매장 의심지역에 대해 발굴조사를 실시해 왔지만 5·18과 관련된 유해는 한 구도 찾지 못했다.

교도소 담벼락 파헤쳤지만 유해 안 나와

그럼에도 다시 ‘진상규명 대상’으로 끄집어내 ‘암매장 시신 발굴조사’를 시작한 것이다. 5·18기념재단은 “옛 광주교도소에 시신을 암매장했거나 이를 목격했다”는 공수부대원들의 제보와 증언을 근거로 법무부의 유해발굴 승인을 받아 2017년 11월4일부터 28일까지 옛 광주교도소 담장 주변을 파헤쳤다. 역시나 유해는 없었다. 12월14일에는 암매장지로 추정되는 옛 너릿재터널 발굴작업을 벌였지만 성과가 없었다. 단체의 홈페이지에는 2018년 1월 중순 ‘폭설로 중단됐던 옛 광주교도소 북쪽 테니스장 일원 발굴조사를 재개한다’라는 활동 게시글이 올라와 있지만, 현재까지 유해가 발견됐다는 보고는 없다.

2017년 발굴조사의 가장 큰 바탕은 5‧18 당시 광주에 파견된 계엄군 지휘관, 제3공수여단 김 모 소령이 1995년 전두환·노태우 내란죄 수사와 관련해 서울지검에서 작성한 약도와 진술조서이다. 5·18기념재단은 발굴조사에 앞서 김 모 소령의 진술서를 언론에 공개했었다.
 
<“1980년 5월23일 오후 6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는 호송하는 과정에 사망한 3명을 포함하여 제가 광주교도소에 있는 동안 12구의 시체를 가매장한 일이 있다.”
“전남대학교에서 광주교도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사망자가 발생하였던 것은 비좁은 방송차량에 30여 명의 시위대를 태웠기 때문에 부상을 당해 힘이 없는 시위대는 쓰러져 밟히고 질식해 죽었을 것이다.”

“(가매장 경위) 확실한 기억은 없으나 정보참모로부터 여단장의 지시를 전달받아 가매장할 장소를 제가 물색하였고, 저희 본부대 병력들이 의무대로 가서 시체를 운반하여 와서 매장했다.”
“(시체를 어디서 누구로부터 인계받았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병력들이 시체를 운반하여 왔을 때는 가마니로 쌓여 있었는데, 악취가 심하게 나서 상당히 부패되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가매장 위치) 야산과 논이 보이는 방면의 담장 3미터 지점에 가마니로 2구씩의 시체를 덮어 같은 장소에 연결하여 묻었다. 광주교도소 앞쪽으로 있는 주유소, 광주-담양간의 고속도로, 정문 방면의 비포장도로 쪽은 아니었다. 그래서 주유소 반대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2구 외 가매장한 시체는) 없다.”
“군인으로서 국가의 명령을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임무를 수행했는데,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군이 매도당하는 데 대하여 통분하지 않을 수 없고, 군인으로서 임무수행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체 안 나오자 “다시 파내 옮겼을 것”

옛 광주교도소에 시체가 매장되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김 모 소령의 진술과 부합하는 증언이 있다. 다음은 광주사태 당시 광주시청 사회과에서 행정서기로 근무하던 조성갑 씨가 사체 수습에 대해 1995년 진술한 검찰 조서 발췌.

<“광주교도소에서 사람이 많이 죽어 묻혀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보았는데 소문에 듣던 장소에 가보니 묘목이 급히 심어져 있는 것처럼 엉성하게 되어 있는 곳이 있어 그곳을 삽으로 파보았더니 포플러나무 옆 도랑의 한 구덩이에 2구씩 가마니로 암매장되어 있는 사체 8구를 발굴했습니다.”
“또다시 교도소 정문 앞산에 묻혀 있다는 곳을 찾아가 풀이 뭉개진 부분을 파보았더니 과연 남자 사체 2구가 묻혀 있어 발굴하여 조선대 병원에 안치했습니다.”>

사체가 나오지 않자 5·18기념재단은 ‘암매장된 시신을 다시 파내 옮겼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한편, 그래도 암매장 발굴을 계속한다는 입장이다. 이를 뒷받침하듯 2019년 4월 8일 경향신문이 ‘5·18 때 공군 수송기가 김해로 시체 옮겼다’는 비밀문건을 입수했다며 단독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이 옮겨진 시체가 군인 사망자가 아닌 일반 시민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행방불명자 수, 광주시 “76명” vs. 일부단체 “400명 이상”

2018년 초 광주가 밝힌 5·18 당시 행방불명자 신청자는 242명이다. 이 중 심사를 통해 광주시가 인정한 공식적인 행방불명자는 76명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계엄군에 의해 암매장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광주시와 5·18 관련 단체들의 주장이다. 광주시가 밝힌 행방불명자 신청건수는 448건인데, 이는 중복 신청이나 탈락 후 재신청하는 경우를 포함한 숫자다. 그러나 일부 5·18단체는 이 신청건수를 행방불명자 숫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2014년 5월 청주의 건설현장에서 발견된 420여 구의 유골이 “5·18 행방불명자 숫자와 비슷하다”며 암매장된 5·18 행불자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조사결과 청주시청이 1990년대 중반 공동묘지에서 이장(移葬)한 무연고자 유골인 것으로 밝혀졌다.

5·18 행방불명자와 암매장은 ‘사망자 2000명’설과 연계된다. 1985년 7월호 월간조선에 실린 광주사태 현장취재 기자 좌담회 대담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사망자 2000명’설의 근거로서 암매장 및 행방불명자가 제시된다.

<-당시 사망자는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前에 취재할 때는 대체적으로 200명 線(선)으로 봤습니다. 요즘엔 2000~3000명이란 게 유행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5년이 지난 지금 광주시민들을 만나면 한결같이 2000~3000명 선이라고 말합니다. 그 근거를 물어보면 “50여 명이 모처에 암매장됐다”느니 “바다에 쓸어 넣었다”는 식의 얘기를 합니다. 전부 “~더라”식의 이야기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입니다.
 
-‘2000명說’에 대해 과거 취재노트를 들추어봤습니다. 25일 도청 앞 궐기대회에서 한 학생이 나와 “확인된 시체 69명, 파묻은 것이 100구쯤 되리라고 추정. 부대로 데려간 시체는 700구 쯤 될 것이다. 연행자 수가 1000~2000명이고 다친 사람은 중상자만 300~400명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5월26일 마지막 궐기대회에서는 “시체는 101구까지 확인했다. 변두리에서 버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500구다. 연행자는 2000명, 부상자 2000명”이라고 발표했습니다. 지금 ‘2000명說’은 당시보다 엄청나게 부풀려진 것입니다. 이번에 광주사태 부상자 모임에 가보니 부상자가 800명이라는 겁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사망자 수가 부상자의 2배를 넘는다는 것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정부 발표 191명 외에 사망자가 다소 더 증가될 가능성은 있습니다. 광주 시내 밖에서 죽은 사람 가운데 혹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숫자를 합쳐도 광주사태 때의 사망자수가 200명대 이상은 안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2000명이 아니라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몇백 명만 더 있다 해도 문제가 벌써 터졌을 겁니다. 광주 시내에 밝혀지지 않은 사망자가 2000여 명이나 된다면 동네마다 그런 사람이 몇 명씩 있어야 할 테니까 드러나지 않으려야 드러나지 않을 수가 없거든요. 또 당시 광주에는 100여 명의 기자들이 몰려 취재를 열심히 했는데 어느 누구도 ‘2000명說’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를 캐내지는 못했습니다.>

5·18 이후 40년, 광주사태 취재기자들의 예견처럼 사망자 수는 200명 선을 넘지 않았으나 행방불명자 암매장설은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1980년 광주사태 현장취재로 해직 기자가 됐고, 이후 40년 동안 5·18을 둘러싼 루머를 반박해온 조갑제(趙甲濟) 기자의 발언을 덧붙인다.

<-이번 진상 규명 대상에 ‘시체 암매장’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1995년에 이미 11개 장소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근거 없는 걸로 밝혀진 내용이다.
“국민만 분열시키고 결코 합의된 결론을 내지 못할 것이다. 광주를 ‘야수(野獸)’로 키우지 말고 편안하게 잠들게 해야 한다. 이게 정치인 특히 집권자의 책무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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