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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아카몽(赤門)'에서 부산수산대학생들이 외친 '이승만의 평화선' 문무대왕(회원)  |  2019-08-18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간의 경제충돌이 두 나라 정치권에서 가열되고 있다. 반일과 혐한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국교가 정상화되기 전 동경대학교 강당에서 부산수산대학 학생대표들이 당당하게 외친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선' 얘기를 소개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어떻게 지키며 제압했고 부산수산대학 학생대표들은 일본 지성의 본산(本山)인 '아카몽'(赤門;동경대학의 별칭, 동경대학교 정문 색깔이 붉은색임을 별도로 일컬어 일본 사람들은 아카몽이라 부른다)에서 어떻게 큰소리로 외쳤는지 일본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자료를 근거로 그 일화를 요약 소개한다.
  
  1964년 6월 하순, 부산수산대학 학생대표 5명은 일본 '한수회(韓水會)'의 초청을 받아 일본수산업계와 수산교육기관, 수산업 현장을 시찰했다. 한일 국교정상화가 되기 6개월 전이다. '한수회'는 일본의 '동경수산대학'과 '시모노세키(下關) 수산대학' 등 일본 전국의 수산계 대학에 재학중인 재일동포 대학생들의 친목단체다. 한수회는 한일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한일 두 나라 수산학도들이 상호 교류하며 양국의 수산업 발전에 기여하고자 부산수산대학 학생대표 5명을 초청했다.
  
  한수회의 안내로 20여 일간 일본의 수산교육기관과 수산회사, 동경어시장, 재배어업(裁培魚業:진주, 방어, 광어, 미역, 김양식장) 현장 등을 시찰했다. 당시 수준으로 한국 수산업은 30년에서 50년 정도 일본에 뒤져 있다는 것이 일본측 주장이었다. 실제 대표단 학생들의 시각으로도 차이가 큼을 느꼈다. 시찰 도중 찾아간 지역의 수산대학생들과 간담회와 토론회도 가졌다. 특히 동경에서는 동경대학교 농수산학부 학생회의 초청을 받았다. 한국 수산업에 대한 현황과 한국 수산대학생들이 바라보는 한일어업회담의 전망과 평화선 문제 등 당시로서는 민감한 한일 양국간의 문제에 대해서 토론도 하고 강연도 했다.
  
  해방 이후 19년 만에 한일 두 나라 수산대학생들이 비공식적으로 만나는 기회인 만큼 일본 언론과 일본 학생들의 관심 또한 컸다. 특히 한일 국교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인 어업회담과 평화선에 대한 일본 대학생들의 관심과 질문은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부산수산대 학생대표단은 비효율적인 논쟁보다는 한국 대학생들의 입장을 전달하는 강연회를 가지기로 하고 협의한 결과 *일본에 대한 인상, *한일 어업회담의 전망, *평화선문제.*한국수산업의 현황 등에 대해 강연주제를 확정했다. 부산수산대학 학생들은 일본에 대한 인상을 말하면서 당시 일본'니가타(新瀉)'에서 발생한 지진피해에 대해 한국국민들이 보내는 위로의 마음을 전달했다.
  
  이어서 일본 언론이 한국에 대한 악의적인 왜곡보도를 하고 있는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당시 일본 언론은 한국 휴전선 부근 주민들이 북한의 '수풍댐'서 생산되는 풍부한 전력으로 북한의 밤이 밝은 것을 남한 주민들이 부러워한다는 허위 보도를 여러 차례 한바 있다. 이같은 왜곡보도를 항의한 것이다.
  
  다음은 한국의 연안수역 자원 보호를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해양주권선인 '평화선'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18일 독도를 포함한 한국연근해의 수산자원 보호를 위해 해양주권 선언을 했다. 그해 5월이면 미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일 강화조약을 체결, 일본은 미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양국간의 조약이 체결되기 전에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에 배타적 해양주권을 선제적으로 선언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선포한 해양주권선은 한국에서는 '평화선'이라 불렀지만 일본에서는 "이라인(李LINE)이라 불렀다. 일본 학생들은 평화선이 국제해양법을 위반한 일방적 선언이라며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평화선은 당시 일본 수산업계와 어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 어선은 한국 해양경찰이 모두 나포(拿捕)했고 선원들도 억류했다. 부산수산대학생들이 동경대학생들을 상대로 당당하게 발언하고 일본 언론을 질타하자 객석에서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제3국을 거쳐 일본에 입국하여 동경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한국 유학생들이 많이 박수를 친 것이었다. 비록 국교는 정상화되지 않았지만 일본땅을 찾아 온 부산수산대학생들이 당당하게 일본을 향해 외치는 주장에 감동하여 박수를 보낸것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해양주권선인 평화선을 선언한 것은 훗날 각국이 선포한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시원이 되었다. 한일 어업회담에서도 한국이 일본을 압박하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국익을 위한 미래지향적인 전망과 당당한 결단은 오늘의 위정자들이 깊이 유념해야 할 역사적 교훈이라고 본다. 그때 부산수산대학생들의 당당한 활동상황을 보도한 '수산신조(水産新潮)' 등 언론기록은 일본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한일 수산학도들의 친선가교에 다리를 놓은 '한수회'(韓水會) 회원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장이 되어 오늘 조국과 일본의 어리석은 위정자들이 벌이고 있는 경제충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삼성전자 뉴스룸
  • 白丁 2019-08-20 오후 11:32:00
    당시 대학생들은 요즘 대학 얼라들과는 質이 달랐지요. 현기증 나는 문명 진화 속도와 정확히 반비례로 한국인 質은 퇴보하고 있습니다.
  • naidn 2019-08-19 오전 11:39:00
    당시의 대학생들의 으젓하고 당당한 애국모습과
    빨갱이들에 현혹되어 미래를 보는 눈과 지혜없고 상식없는 지금의 우리 대학생 아이들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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