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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기 마음의 물을 흐리게 만들어가면서까지 미꾸라지를 맞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엄상익(변호사)  |  2019-10-13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대학 동기 모임에는 가급적 참석하려고 한다. 참석한다기보다는 자석 같은 어떤 보이지 않는 푸근한 힘에 끌려간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게 무엇인지 한번 유심히 관찰해 보았다. 연말경 삼십 명 가량의 법대 동기생들이 조촐한 식당에서 모인 적이 있었다. 한 사람씩 일어나서 간단한 자기소개가 있었다.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거의 다 자기 자랑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나 못난 점들을 자연스럽게 내뱉고 있었다. 삼십이 넘게까지 고시 공부를 하다가 뒤늦게 늦깎이 회사원으로 실수하던 얘기들이 튀어나왔다.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걸 고민했다. 만년과장이라는 푸념도 나왔다. 자기 자랑을 거의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사회적으로 뒤처진 것만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는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재벌그룹의 계열사 사장도 있었고 대기업의 임원들도 많았다. 판검사도 있고 변호사들도 있었다. 그리고 동네 슈퍼마켓의 주인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구석에 말없이 앉아 있던 국회의원이 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열네 표 차이로 간신히 당선이 됐어. 사실상 떨어진 거야. 정말 신기해. 늙고 직업이 없는 놈을 하나님이 구제하시려고 국회의원을 만들었나 봐.”
  
  국회의원인 사람들은 어느 모임에서나 중심이 되려고 하고 마이크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의도적인 겸손이 아니라 마음 그대로였다. 표정을 보면 안다. 철도공사 사장이 된 전직 경찰청장은 이렇게 말했었다.
  
  “노조에서 들고 일어나 내가 사장으로 오는 걸 거부하더라구. 경찰청장하고 철도공사 사장하고 도대체 무슨 유사점이 있길래 오냐고 따지는 거야. 그렇긴 그래. 그래서 내가 생각하다가 제복이 비슷하지 않느냐고 했지.”
  그 말에 모두 ‘와아’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가 덧붙였다.
  
  “말도 하지 마라. 한 자리 얻으려고 내가 얼마나 아부했는지 모른다. 대통령 옆에는 수십명이 몰려 있어요. 그 측근들이 내가 접근하면 뒷발로 걷어차도 이 비대한 몸으로 뒤뚱거리면서 끝까지 따라붙었다.”
  솔직하게 자기폭로를 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작은 슈퍼마켓을 하는 친구 차례였다.
  
  “동네 경로당이 가까이 있어서 노인들이 막걸리를 많이 찾는 거야. 그런데 마켓에 물건을 대는 본사에서는 자기들 허락 없이는 사탕 하나라도 다른 걸 파는 걸 허락하지 않아. 그래서 몰래 막걸리를 진열대에 놨다가 걸릴 것 같으면 그걸 박스에 넣어 짊어지고 지하창고로 가지고 가서 숨겨놓는데 그런 비상이 걸릴 때면 이제 늙어서 그런지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아. 그렇다고 작은 점방에서 알바를 쓸 수도 없고 말이야.”
  
  그 말에 모두 들 함께 고통을 공유하는 감정이 전파된다. 모두들 자기의 상처들을 그대로 드러내고들 있었다. 자기를 감추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다. 숨길 것도 없고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그런 친구들이었다. 천진난만한 아이같이 말하는 친구들의 마음은 속까지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는 가을 계곡물 같았다. 그런 맑은 물 속에 개개인의 마음의 상처들을 담그고 서로 치유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래서 대학 동기들의 모임에 나간다.
  
  대학동기회를 해병대 전우회, 호남향우회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끈끈한 단체라는 소리도 있다. 나는 그런 친구들이 좋다. 자기를 자꾸 감추려 드는 사람을 싫어한다. 자기 혼자만 높은 데 우뚝 서서 다른 사람을 내려다보는 사람도 싫어한다. 또 자기 주위에 높은 성벽을 쌓고 자기의 내부를 다른 사람이 엿보지 못하게 하려고 애쓰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좋아하는 사람들만 만나려고 하고 있다. 더러 아내가 그렇게 사람을 가리는 걸 뭐라고 한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고. 두루두루 사람들을 사귀어야 한다고 조언을 한다. 만약 맑은 물에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면 나는 마음의 물을 흐리게 만들어가면서까지 미꾸라지를 맞아들이고 싶지는 않다. 나는 마음에 맑은 물을 고이게 하고 거기에 천사의 모습을 비추게 하고 싶다.
  
  
삼성전자 뉴스룸
  • 초피리1 2019-10-15 오전 11:11:00
    엄상익변호사님의 마음이 맑은 글을 읽으면 제 마음도 맑아집니다.
  • 이중건 2019-10-13 오후 9:10:00
    공감하면서 나는 한편으로 엉뚱한 생각을 하군합니다.
    탈북자로서 종북친북분자들의 모임에 참가하면서
    저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아직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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