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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소설가 최인호와의 대화 엄상익(변호사)  |  2019-12-06
헌책방에 가서 서가를 훑어보는데 죽은 소설가 최인호의 수필집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아, 저분도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분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우리 세대 문화계의 우상이었다. 기지가 번뜩이면서 봄날 내리는 꽃비처럼 화사한 언어가 가득차 있는 그의 문학작품들을 보면서 가슴이 들뜨기도 하고 울컥 눈물이 쏟아지기도 했었다. 어쩐지 그는 절대 죽지 않을 사람 같았다. 소설 속 주인공들의 운명을 만드는 그는 창조주 같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느 날 신문에 그가 암을 앓고 있다는 소리가 들렸다. 믿어지지 않았다. 항상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을 제공하는 그에게 비극은 걸맞지 않았다. 인생의 종말에서도 그는 작품을 쓰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그가 죽었다는 특집기사가 났다. 신문지면의 가운데 사진 속에서 그는 빙그레 웃고 있었다. 뜬금없이 이 사람도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속의 그가 나를 보면서 뭐라고 한 마디 메시지를 전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이제 헌책방의 서가 위에 한 권의 낡은 수필집으로 변해 있었다. 책을 사가지고 돌아와 내 작은 방의 책상 앞에 앉아서 경건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죽은 그와의 대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표지 이면에 처음 그 책을 산 사람의 이름과 날짜가 자그마한 여성의 필체로 적혀 있었다. 죽은 그가 살아 있는 나에게 하는 말들이 페이지 사이사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혼에게 가만히 가자고 속삭이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죠, 나도 이제는 막연하지만 느끼기 시작합니다, 삶이란 무엇이었을까요?’
  내가 대답하면서 그렇게 되물었다.
  
  ‘우리 모두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 아닐까요? 이 별들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였죠. 이 섭리가 인연이죠. 인생의 밤하늘에서 인연의 빛을 밝혀 나를 반짝이게 해 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삼라만상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네요.’
  
  그는 명예보다 돈이나 권력보다 사랑하는 관계를 더 소중히 하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가 살아있던 시절 겪었던 신비체험 하나를 덧붙였다.
  
  ‘언젠가 시청 앞에서 혼자 차를 몰고 가다가 신호등 앞에서 출발신호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순간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이 내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왔죠. 나는 얼마나 축복받은 인간인가 하는 희열이 걷잡을 수 없이 왔어요. 나는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소리 높여 말했어요. 살아 있음은 축복이며 차창으로 스며들어오는 햇살도 신의 은총이었죠. 곳곳에 삶의 기쁨이 있었어요. 눈이 멀어서 그것을 보지 못하고 썩은 악취에만 신음하고 있었던 거죠.’
  
  화려한 지구별에 잠시 왔던 그의 영혼은 지금 은하계의 보석 같은 수많은 별들을 구경하면서 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온 죽음은 또 다른 마음의 눈을 열게 하는 것 같다. 나도 마흔다섯 살 무렵 처음으로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나를 검사한 의사는 암이 틀림없다고 했다. 다른 병원의 의사들에게 다시 확인했다. 어느 누구도 오진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는 해주지 않았다.
  
  수술을 받기로 했다. 의사는 죽음에 동의하라고 기계적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그들에게는 단순한 사무이지만 내게는 우주를 포기해야 하는 납처럼 무거운 결정이었다. 수술하는 날은 산과 들에 연두색 물감이 퍼지는 따뜻한 봄날이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평생 처음 보는 듯한 황홀한 광경이었다. 내가 살았던 이 지구가 그렇게 아름다운지 처음으로 알았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것이다. 숲에서 나는 시원한 새소리도 욕심에 막혀 듣지 못했었다. 표본실의 개구리처럼 발가벗겨 수술대 위에 묶였다. 그게 나의 본체였다. 체면도 명예도 아무것도 없었다. 의사가 마취액을 링거에 투입하고 입에 가스마스크를 씌웠다. 나는 파르스름한 불빛이 흘러나오는 수술실 천정의 형광등을 보면서 아직 마지막 의식이 남아 있을 때 곧 만나게 될 그분을 향해 기도해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의 삶에 감사했습니다. 잘 살다가 갑니다. 사랑해 주는 부모님을 만났고 좋은 교육을 받았습니다.’
  
  순간 아쉬움이 있었다. 평생을 이기주의자로 살아왔다. 이기주의자의 삶은 그가 죽으면 남는 게 없는 허무였다. 작은 선도 사랑도 심어놓은 게 없었다. 후회가 됐다. 그리고 그날 처음 느낀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이 떠올랐다. 밤하늘의 별도 하얗게 물결치는 파도도 좀더 봐두었을걸. 갑자기 천정이 갈라지면서 나의 의식은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한없이 떨어졌다. 존재 자체가 행복이었다는 생각을 하면서. 여섯 시간의 긴 수술을 거쳐서 나는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행복한 이십여 년이 흘렀다. 덤으로 얻은 새 삶이었다.
  
  육십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는 요즈음 평범한 하루의 생활이 소중하다. 반복되는 일상의 굴레 자체를 감사하게 생각한다. 오후가 되면 호숫가를 산책하고 따뜻한 물에서 목욕을 할 때 나는 행복하다. 작지만 미소로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 할 때 나는 행복하다. 죽은 소설가 최인호 씨는 아직 수필 속에 살아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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