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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고도의 심리전-디데이: 20일 04:00 1987년 6월19일 全斗煥은 비상계엄령 준비를 명령했다!(2) 趙甲濟·金永男  |  2020-01-22

 

 
  고도의 심리전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이 계엄령 계획을 실천에 옮기진 않았다. 그날 광화문 일대의 언론과 관가(官街)에선 ‘오늘 밤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반정부 기자로 찍혀 해직된 적이 있었던 필자(조갑제)는 ‘계엄령이 내리면 맨 먼저 기자들부터 손볼 터인데 어디로 피신해야 하나’는 생각을 하면서 밤을 보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날 비상계엄령 준비는 전두환의 심리전(心理戰)이었다.
 
  군대를 동원하면 1988년 서울올림픽도, 평화적 정부 이양도 어렵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그는 한편으론 군 출동계획을 지시하고, 다른 편으론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통령 후보를 설득하고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취임할 때 나는 내 임기 중에는 어떠한 위기가 닥쳐도 그것이 외부의 공격이 아닌 한 결코 군을 동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국내 소요 사태에 군을 동원하는 순간 5공화국의 명예는 그것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날 나의 병력 출동 명령은 어디까지나 양동전술(陽動戰術)이었다. 올림픽 때문에 내가 결코 군대를 동원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서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가고 있는 세력에게 경고를 보내는 동시에, 망설이고 있는 노태우 대표로 하여금 파국에 이르기 전에 나의 결심대로 직선제를 조속히 수용하도록 결단하라고 촉구하는 뜻이었다. 일석이조(一石二鳥)를 노린 양면(兩面) 동시 공격이었던 것이다.〉
 
 
  “둘째 놈이 자고 있었더라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당시 명동성당에서 민주화 요구 시위를 하는 가톨릭 사제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명동성당에 가서 시위대를 직접 설득해보려 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이중적(?)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는 중요한 사료(史料)가 있다. 5공(共) 때 대통령의 어록(語錄)을 정리하는 사관(史官) 역할을 했던 김성익(金聲翊) 당시 비서관이 1992년에 《월간조선》에 공개한 ‘全斗煥 육성 증언’(책으로 조선일보사에서 출판되기도 했다)이다. 비상계엄령을 준비하는 과정, 그리고 6·29선언 전야(前夜)의 상황이 다큐멘터리처럼 기록돼 있다.
 
  6월 10일부터 전국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번지고, 일반 시민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전 대통령은 6월 14일 새벽에는 시위대가 농성 중인 명동성당에 직접 들어가려 했다. 학생들을 만나 설득하려 했는데 둘째 아들이 이를 막았다는 대목도 육성 증언에 담겨 있다.
 
  전 대통령은 이런 이야기를 6월 17일 측근들에게 소개한다. 저녁 7시20분부터 9시30분까지 안가(安家)에서 노태우 민정당 대표와 만찬을 함께 했다.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 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 이종률(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도 함께했다.
 
  〈일요일 새벽 한 시 반쯤 일어나서 옷을 입고 침실에서 나왔어. 둘째 놈이 안 자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나를 보고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 내가 ‘명동성당에 가려고 한다’고 했더니 ‘아버지 앉아서 말씀해보시라’고, ‘명동성당에 왜 가시려 하느냐’고 물어.
 
  내 말이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성당에 있는 신부, 성직자들한테 야단을 쳐서 자기네가 종교인으로서 정당한 활동을 하도록 주의를 주고, 둘째는 내 말을 들을지 안 들을지 모르지만 학생들한테 훈시도 하고 꾸지람도 해서 돌려보내려고 한다. 위험도 있겠지. 혹시 어떤 위험이 일어나도 나를 구출한다는 명분이 생기지 않겠느냐. 오늘 밤에 내가 이 일을 해버리려고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둘째 아이의 말이 ‘다른 분들과 상의를 해보셨느냐’고 물어. 그래서 안 했다고 했어. ‘그러면 거기서 아버지가 잘못되는 일이 있으면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외국에서 볼 때 나라 체면은 어떻게 됩니까’라고 해. 내 체면이야 어떻든 나라 체면이라? ‘전 세계 매스컴에 뉴스로 나올 텐데 국가원수로서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됩니다. 한 잔 마시지요’라면서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한 잔 가지고 왔어. 그러면서 ‘다시 생각하시라’고 해.
 
  할아버지가 손자한테서도 배운다고 하는데 ‘나라 체면이라…. 그래 위기도 아닌데 그렇게 하면 경솔한 짓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안 갔어요.
 
  그래서 날이 샌 다음 날 아침에 안보 장관과 군 지휘관들을 오라고 했었어. 둘째 놈이 그 시간에 자고 있었더라면 내가 경호실장을 오라고 해서 바로 명동성당에 갔을 것이고 내가 경호실장이 말려도 안 들었을 거야. 그러면 일이 벌어졌을 거야.〉
 
  이날 모임을 옆에서 지켜본 김성익씨는 이렇게 정리했다.
 
  〈이 시점은 전 대통령이 이미 직선제를 수용하기로 결심을 하고 나서 노 대표를 설득하고 있는 단계로서 그런 태도 변화를, 다른 참석자들에 대한 보안을 의식, 완곡한 어법으로 표시한 것이다. 6·10사태에서 나타난 민의를 며칠 후에 발표되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수용으로 풀어나가기로, 전 대통령과 노 대표 사이에서 깊은 논의를 통해 그 방향을 잡아가던 결단의 전야(前夜)이기도 했다.〉
 
 
  ‘떠나가는 全 삿갓’
 
  전 대통령은 이날 만찬에서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노태우 대통령 후보께서는 나보다 정말 훌륭한 분이다.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노 후보, 이 나라를 구출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분이 노 대표시다. 오늘은 좋은 날, 내 다음 대통령 후보 모시고 한 잔 먹는 날 아니냐. 나보다 이분이 더 권력이 세다. 나는 8개월 남았는데 무슨 권력이 있겠어.”
 
  전두환 대통령은 ‘떠나가는 김삿갓’ ‘애수의 소야곡’을 불렀다.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전 삿갓(두 번 노 대표와 합창) 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 떠나가는 전 삿갓 전 삿갓 / 전 삿갓은 떠나고 노 삿갓이 들어오는 거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 눈물로 달래보는 / 구슬픈 이 밤 / 고요히 창문 열고 별빛을 보니 /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소리.(박수)〉
 
  그 다음 날인 6월 18일 재야 세력은 그날을 ‘최루탄 추방결의의 날’로 정해 전국적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위는 특히 부산 지역에서 격렬했다. 5만명 이상이 시내 중심부를 6시간 동안 장악, 자정을 넘어 19일 새벽 3시까지 시청을 위협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대구에서는 시위 학생들이 파출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19개소의 파출소가 불에 타거나 파괴됐다. 대통령은 19일 오전 8시 반 집무실에서 군을 동원해서라도 빨리 진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건의를 받고 오전 10시 반 군 고위 간부들을 소집했다.
 
 
  디데이: 20일 04:00
 
  전두환 대통령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 준비를 내밀하게 진행시키는 한편 개헌 촉구시위가 전국적 규모로 확대되고 격렬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대응책을 강구해야 했다. 비상한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는 낌새를 비쳐야 하는 것이다. 이날 오전 10시30분 군 관계자들을 소집해서 비상조치를 전제로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디데이와 시간까지 정해줬다. 20일 04:00였다.〉
 
  6월 19일 오전 10시 반 전 대통령은 안기부장, 국방장관, 3군 참모총장, 수방사령관, 보안사령관 등 군 고위 관계자들을 청와대 집무실로 소집, 비상조치를 전제로 한 군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하고 시달했다.
 
  〈(전국의 지역별 비상시 병력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와 서울 지역의 병력배치 계획에 관한 보고를 들은 뒤)
 
  대통령: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해야 될 사단의 이동은 통보하라. 통보 안 해도 되는 사단은 하지 말고. 대전과 대구에 1개 사단을 내려보내고 2개 여단은 전남·광주로 돌려라. 부산은 1개 사단과 1개 연대를 보내서 1차로 부산과 대구, 마산의 시위 사태를 진압해야겠어. 서울은 4개 연대를 배치해서 주요 대학에 배치하도록 해. 군에 가스탄은 충분히 보유하고 있는가.
 
  이기백(李基百) 국방부 장관: 20일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풀 가동을 지시했습니다.
 
  대통령: 대학교는 휴업령을 내리면 될 거고 방학기간이므로 학부모들께는 알리는 조치를 해야 돼.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입하도록 해야 돼요. 학교에 아무도 없을 때를 택해서 들어가고 농성자들은 검거하고. 농성, 데모의 배후 연계 사항을 밝혀서 그 뿌리를 1, 2개월 안으로 뽑아야 합니다.
 
  이것은 계엄선포가 아니라 비상조치입니다. 계엄령에다 플러스 알파를 하는 게 비상조치야. 군부 동원도 할 수 있고 군법회의도 할 수 있고 정당 해산까지도 가능해요. 안기부 등에서 준비가 다 돼 있지. 지금 학원사태는 중앙의 지휘부가 두뇌전을 하고 있어. 좌경 세력들은 정부가 손 놓고 넘어가는 것처럼 보고 사기가 오르고 있는 것 같아.
 
  안무혁 안기부장: 데모 학생들에 대한 작전은 6월 25일까지는 끝낸다는 계획입니다. 학생 간부들은 부산을 거점으로 하려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 10·26이 부산에서 일어났어요. 4·19도 대구, 마산, 부산, 서울, 호남으로 파급되었고, 부산·마산·대구의 이 영남 일대 삼각형이 문제야. 일차적으로 경찰이 검거를 맡도록 해야 돼요.
 
  안기부장: 부산은 학생들이 나오면 구경하는 시민들이 나옵니다. 지금까지는 경찰 병력이 모자라서 학생들이 학교에서 모여서 시내로 가는 게 아니라 시내에서 바로 모이고 있습니다.
 
  대통령: 그러면 부산에는 군병력을 투입하면서 통금 조치를 할 필요가 있어요. 부산은 내일 새벽 4시까지 군병력을 보내도록 해요.〉 (계속)
 
삼성전자 뉴스룸
  • onoda74 2020-01-25 오후 6:59:00
    어느시대든 정상적인 정부라면 격변 상황을 앞에 두고
    여러 시나라리오를 염두해 두고
    이런 대비, 저런 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찾아보면 계엄령 시나리오, 위수령 시나라오, 또는 반대 방항의
    온건책 시나리오, 등등
    수없이 있었겠지.

    그런데
    좌빨에 물어뜯길 빌미나 제공할
    이런 기사를 CGJ가 왜 지금 내는지 이해할 수 없다.

    중요성도 별로, 시의성도 별로다.
    아무라 봐도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만 한다.

    '나 이런 거 알고 있어'라고
    잘난 척 하는 것 외에
    누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것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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