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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美선동했다고 우익소년 칼에 죽은 日사회당 당수(黨首) 이야기 “천왕, 전쟁 책임 있다” 발언했다 총격받기도 李知映(조갑제닷컴)  |  2020-02-13

1960년 10월12일, 도쿄 히비야(日比谷)공회당에서 총선거를 앞두고 자유민주당·사회당·민주사회당이 3당 당수(黨首) 합동 연설회를 개최했다. 2500여 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민사당 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 사회당 위원장,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자민당 총재 순으로 연단에 오르게 되어있었다.

아사누마 사회당 위원장이 연단에 선 것은 오후 3시경.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우익단체의 격렬한 야유와 함께 삐라가 뿌려지기 시작했다. 사회를 맡았던 NHK 아나운서는 “장내가 소란스럽다. 맨 앞줄에 나와 있는 언론사 기자들의 취재가 불가능할 정도니 조용히 해주시길 바란다”며 자제를 요청했다. 청중들의 박수와 함께 야유가 멈췄다.

아사누마 사회당 위원장의 자민당 선거정책에 관한 비판 연설이 시작됐다. 아사누마 위원장이 “선거 때 국민에게 나쁜 평가를 받는 정책은 전부 엎어두고, 선거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이라고 발언하던 오후 3시5분경, 단상에 뛰어오른 한 소년이 아사누마의 가슴에 33cm 칼을 두 차례 찔러 넣었다. 아사누마 위원장은 비틀거리면서 몇 걸음 걸어가다 쓰러졌다. 비서관은 아사누마의 몸을 살펴보고 출혈이 없어 안심했지만, 거구였던 아사누마 위원장의 지방층이 상처를 막아 외출혈이 나타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제로는 일격에 좌측 흉부로 들어간 30cm가 넘는 칼이 대동맥을 절단한 상태였다. 내출혈로 인한 출혈 과다로 거의 즉사 상태에서 근처 병원으로 이송됐으나 오후 3시40분 완전히 사망하고 말았다. 범인은 자결을 시도했지만 달려든 형사에게 저지, 현행범으로 즉각 체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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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니치신문에 보도된 아사누마 암살 사건 사진. 이 사진을 찍은 기자는 퓰리처상을 받았다.

 

  
범인은 17세 우익 소년
  
범인은 당시 17세의 야마구치 오토야(山口二矢). 소년법에 따라 실명 비공개 대상이었으나 사건이 엄중해 이름이 공개됐다.

야마구치는 육상자위대원 아버지와 우익사상을 가지고 있던 형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우익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 5월, 16세에 애국당 아카오 빈(赤尾敏) 총재의 “일본은 혁명전야다. 청년들은 지금 당장 좌익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연설을 듣고 감명받아 애국당에 입당했지만 1년 뒤 탈당한다. 그는 이때부터 좌익 지도자의 처단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좌익 지도자를 쓰러뜨리는 것으로 좌익 세력을 즉시 저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들이 지금까지 해온 죄악은 용서할 수 없고, 1명을 쓰러뜨리는 것으로 향후 좌익 지도자의 행동이 제한되고 선동가의 감언이설에 부화뇌동하는 일반 국민이 1명이라도 더 각성해 주면 좋다고 생각했다. 가능하면 신뢰할 수 있는 동지와 결행하고 싶었지만, 결심을 털어놓을 사람 중, 아카오 선생님에게 말하면 검거되는 것은 분명하고, 내가 하면 당에 폐가 된다. 나는 탈당하고 무기를 손에 넣어 결행하자고 생각했다.”(야마구치의 진술 중)

1960년 6월 우익청년들이 카와가미 죠타로(河上丈太郎) 사회당 고문을 습격, 좌측 어깨를 칼로 찌른 사건에 대해 야마구치는 “자신을 희생해 매국노를 찌른 것은 나라를 생각하는 순수한 마음이라고 생각해 탄복했다. 내가 할 때에는 철저하게 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10월4일, 야마구치는 집에서 아코디언을 찾던 중 우연히 와키자시(脇差, 작은 요도)를 발견하고 ‘이 와키자시로 죽이자’고 결심한다. 야마구치는 메이지 신궁을 참배 후 고바야시 다케시(小林武) 일본 교원노동조합 위원장, 노사카 산조(野坂参三) 일본공산당 의장 집에 각각 전화해 “대학 학생 위원인데 배우고 싶은 것이 있다”며 면회를 신청할 계획이었지만, 고바야시 위원장은 이사, 노사카 의장은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실패했다. 그리고 10월12일 마침내 아사누마를 습격, 살해한다.


아사누마의 반미(反美) 발언이 실행 동기
  
야마구치가 결행 당시 안주머니에 넣어둔 유서에 따르면, 아사누마를 암살 대상으로 지목하게 된 데에는 그가 1959년 4월 사회당 서기장으로 중국을 방문해 “미국은 일본과 중국 공동의 적”이라고 발언한 일이 크게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너, 아사누마 이네지로는 일본 적화(赤化)를 꾀하고 있다. 나는 당신 개인에게는 원한이 없지만 사회당 지도자로서의 책임과 방중(訪中)에 즈음한 폭언, 국회 난입 선동의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내가 네놈에게 천벌을 내린다. 야마구치 오토야>

사실 아사누마는 사회당 내에서 온건파에 속했다. 야마구치를 자극했던 아사누마의 발언도 정확히는 “미 제국주의는 일중(日中) 양국 인민 공동의 적”이었다. 북경 주재 일본 특파원이 아사누마의 발언에서 ‘제국주의’를 삭제하고 기사를 송고한 것이다. 집권당이었던 자민당은 “사회당은 중국 공산당의 앞잡이가 되어 미국과 싸우려 한다”며 격렬하게 비판했고 아사누마는 ‘미국’이 아닌 ‘미국 제국주의’라며 해명했지만 효과는 없었다.

1960년 무렵의 일본은 좌우 대결이 극렬한 시기였다. 당시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내각이 미일(美日)안보조약 비준을 조인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좌익들이 국회를 에워싸는 등 시위가 격화되자,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기시 내각이 총사퇴하기도 했다.

사건이 일어난 연설회는 NHK 공동주최로, 실황 녹화 및 NHK1라디오로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사건의 처음부터 끝까지 라디오를 통해 일본 전역으로 방송됐다. NHK TV는 오후 3시13분, 야구 중계를 중단하고 속보를 내보내다 3시21분에는 아사누마가 야마구치에게 찔리는 범행의 순간을 방영했다. 야마구치가 아사누마를 찌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은 마이니치신문의 나가오 야스시(長尾靖) 카메라맨으로, 이 사진으로 일본인 최초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경찰은 배후를 철저히 밝히겠다고 천명했지만, 야마구치는 줄곧 단독범행이라고 진술했으며 11월2일 도쿄소년감별소에서 자살했다.


“천왕, 전쟁 책임 있다” 발언했다 총격
  
히로히토(裕仁) 일왕의 전쟁 책임론을 주장했다가 총을 맞은 정치인도 있다.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 나가사키 시장은 3번째 임기 중이었던 1988년 12월7일, 일본공산당 의원이 시의회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에 관한 의견을 질문하자  “전후 43년이 지나고 나니 그 전쟁이 왜 있었는가 하는 반성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제 군대생활을 했고 군대교육에 관계했던 점에서, 천황의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답변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천황이 중신회의 상소에 응해 종전을 좀 더 빨리 결단했더라면 오키나와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투하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 기록으로 봐도 분명하다”고 발언했다.

본래 발언은 “천왕에게도 전쟁 책임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인 대다수와 연합군의 의지에 따라 책임을 면하고, 새로운 헌법의 상징이 됐다. 우리도 거기에 따라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는 취지였지만 언론은 ‘천왕, 전쟁 책임 있다고 생각’을 강조해 보도했다. 당시 와병 중이었던 천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태평양 전쟁 관련해 천황을 평가하는 것을 자제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모토시마 시장의 이 발언이 더욱 부각되었다.

모토시마 시장의 지지기반인 자민당에서는 이 발언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발언) 철회는 정치적 죽음’이라며 거절, 자민당 나가사키현 지부 연합회 고문에서 해임된다. 이후 다수 우파계열 인물들과 단체의 협박에 시달렸다. 1년 후 천왕도 타계하고 우익단체의 항의도 잠잠해진 것으로 보이자 경찰은 모토시마 시장의 신변보호를 해제, 사건이 발생했다.

1990년 1월18일 오후 3시경, 모토시마 시장이 나가사키 시청 현관 앞에서 공용차에 탑승하려는 순간, 등 뒤 1미터 거리에서 우익단체 간부가 총격했다. 탄환은 왼쪽 흉부에 명중했지만 근육에 맞아 탄도가 변경되어 심장이나 대동맥 등을 비껴 관통해 목숨을 건졌다. 범인은 나가사키현 의회 의원 시절에는 일본교원노조 타도를 주장하던 모토시마가 시장이 되고 ‘전향’한 데 대해 면담을 신청했지만 거절당한 적이 있다고 한다. 범인은 살인미수죄로 기소되어 징역 12년을 선고받아 2000년 형기 만료로 출소했다. 모토시마 시장은 폐렴으로 2014년 별세했다. 향년 9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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