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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내년에 죽는다면 나는 지금 뭘 해야지? 엄상익(변호사)  |  2020-02-14
헌책방에서 소설가 ‘최인호’의 ‘산중일기’라는 수필집을 사서 읽었다. 문득 그가 죽었다고 보도된 신문의 기사가 떠올랐다. 미소를 짓는 그의 사진이 있고 그의 작가로서의 삶을 소개한 내용들이었다. 수필집의 마지막 장에 있는 발간연도를 보았다. 이천팔년이었다. 인터넷으로 그가 죽은 해를 찾아보았다. 이천십삼년이었다. 그가 죽기 오년 전 건강할 때 쓴 수필이었다.
  
  그는 몇 년 앞으로 닥쳐온 죽음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목욕탕 사우나실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를 만나 얘기하기도 하고 스님한테 ‘해인당’이라는 나무현판을 받아 집에 걸어놓고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한다. 작가인 그는 인생 후반에는 글을 보다 천천히 또박또박 써야겠다고 결심을 하기도 한다. 그가 몇 살에 죽었나 계산기를 두드려 봤다. 예순여덟 살에 그는 죽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나이에 죽는다면 나는 내년에 죽는다. 혼자 생각해 봤다.
  
  내년에 죽는다면 나는 지금 뭘 해야지? 주변의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부장판사를 했던 제일 친한 친구는 즐겁게 인생의 노년을 보내고 있다. 오카리나를 배워 초등학교 교실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노인복지관에 가서 명상을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마작을 하고 이따금씩 골프를 치고 산다. 그는 뒤늦게 지루박 춤을 배워 콜라텍에 가 봤다고 자랑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아주 잘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대기업의 임원으로 있던 동창은 퇴직 후 공항에서 주차대행을 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생활비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라 어떤 것이라도 일 자체를 하고 싶어서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감기가 걸려 이틀 쉬었더니 더 이상 나오지 말라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얼마 후 목공소에 취직을 했다. 요즈음은 나무를 다듬고 가구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반면 법조인 선배의 대부분은 젊어서 묶였던 습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양복을 입고 사무실에 나가 신문이라도 펼쳐야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하루종일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공허한 방에 혼자 앉아있다고 오더라도 그게 편안하다고 했다. 짐승들을 말뚝에 묶어 키우면 어느 날 그들을 매어둔 끈이 풀어져도 갈 줄 모르는 것과 흡사하다.
  
  며칠 전 중앙일보를 보다가 한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아함경(阿含經)을 비롯해서 방대한 초기불경을 십여 년간 번역해서 책을 낸 인물을 소개한 것이다. 사진을 보니까 아는 얼굴이었다. 사십이 년 전 나와 그는 법무장교로 입대해서 광주의 상무대 벌판에서 군복을 입고 같이 훈련을 받았다. 내무반에서도 바로 옆자리에 누워서 자는 사이였다. 한번은 그가 술을 마시고 정신없이 내 전투화에 오줌을 누어 버린 바람에 곤혹을 겪은 적도 있었다. 그는 판사를 하다가 그만두고 변호사를 했다. 그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변호사를 하면서 법원 앞에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때 한 번 보고 그 후에는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신문에서 불경을 번역하고 해석한 인물로 등장한 것이다. 벽지의 시골 판사로 가서 혼자 살면서 그 작업을 해 냈다는 내용이었다.
  
  노년의 사는 모습들이 여러 가지다. 교수로 있다가 정년퇴직을 한 친구는 삼 년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매일 집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장자(莊子)를 연구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나도 인생의 후반전이다. 죽어도 자식부터 시작해서 모두들 살 만큼 살았다고 생각할 나이다. 하루하루가 하나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다. 평생을 해 온 변호사업은 바꿀 필요가 없어서 좋은 것 같다. 건강이 받쳐주고 정신이 있을 때까지 할 수 있다. 삼십 년 넘는 경험이 머릿속에서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법정에서 젊은 변호사들을 볼 때 그 노하우를 전수해 주고 싶을 때도 많았다. 돈을 따라가면 일이 없지만 일 자체를 하려면 아직 얼마든지 할 게 널려 있다. 손자손녀에게 먹일 피자와 파스타 값은 충분히 나온다. 인생 후반전에서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바꾸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꾸고 나 자신의 삶을 정비하려고 한다.
  
  
  
삼성전자 뉴스룸
  • 1 2020-02-14 오후 6:28:00
    하루 하루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요!!! 인생 말기인 감사의 하루를 삶을 정비하는데 쓰겠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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