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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이승만 제거 작전’을 반대한 사람, 월터 S. 로버트슨 美국무부 차관보 이 사람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미동맹도 불가능했을 것 愼鏞碩(尙美會 대표)  |  2020-03-30

6·25전쟁이 시작된 지 1년이 되던 1951년 6월30일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공산군 측에 휴전 실무회담을 제의했다. 이에 따라 본격적인 휴전 협상을 위한 최초의 공식 접촉은 1951년 7월8일 개성 광문동의 민가에서 양쪽 영관급 연락장교 간에 이루어졌으며 본 회담을 7월10일 11시에 열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개성시 송악산에 있는 99칸짜리 한옥 내봉장에서 첫 휴전 회담이 개최되었다.

첫 회담이 끝난 후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이어서 16일에도 유엔군 측의 휴전회담에 임하는 기본 전략을 설명하고 동의를 얻으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통일을 포기한 휴전협상에는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을 재차 분명히 하면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한국 국민들에게는 사망 보증서나 같은 38선을 인정하고 유지하는 전제의 휴전에는 동의할 수 없다”면서 통일을 염원하는 한국 국민들의 소망을 이해해줄 것을 요망했다.

휴전 회담이 시작되면서 이승만에게는 무력 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전선과 휴전을 강행하려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새로운 외교 전선이 추가되었다. 당시로써는 만 76세의 고령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국내 정치의 반대세력과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는 전선에 이어서 미국 정부를 상대로 하는 외교전까지 3면전을 펼쳐야 하는 힘든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이승만에게 “휴전 회담이 끝난 후 개최되는 정치회담에서 한국의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애매하고 형식적인 답신을 보냈다.

휴전 협상이 시작된 다음 해인 1952년에도 전쟁 중인 한국의 방방곡곡에서 휴전 반대운동이 계속되며 더욱 거세지게 되자 그해 3월 트루먼은 이승만에게 휴전 협상에 대한 협조를 또다시 정식으로 요청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대해 한국군의 증강과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는 것이 휴전의 전제조건이라고 회답했다. 이 같은 조치가 없이 휴전이 되면 한국은 6·25전쟁 이전처럼 포기되는 나라로 전락해 국가 안위가 계속 위협받게 된다고 지적했다. 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의 증강이 보장되면 자신이 나서서 국민들에게 휴전을 설득할 것이라고 부언했다. 그러나 당시 국무장관이던 애치슨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상호방위조약 체결 요구에 회답하지 말라고 건의하면서 대신 한국 정부와 국민들에게 한국을 포기하는 것이 미국과 유엔의 의도가 아니라고 강조하고 한국군 증강은 적극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국전쟁을 조속히 끝내겠다는 공약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이 끈질기게 요구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 대신 미국 정부의 한국 방위 성명과 10억 달러 경제원조를 제시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상호방위조약을 재차 강력히 요구하자 그를 “정신착란자”라고 격렬하게 비난하면서 부산 정치 파동 시 클라크가 입안했던 이승만 제거계획을 기초로 에버레디(Ever-ready) 작전을 만들어 실행하기에 이른다.

그해 5월29일 워싱턴에서 열린 국무부와 합동참모본부 연석회의에서 고위 당국자들과 에버레디 작전 실행을 앞두고 이를 점검하는 과정에서 로버트슨 차관보는 발언권을 얻어 “우리가 무슨 권한으로 한국 정부를 접수합니까?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입장이 되게 하자는 것입니까?”라고 반문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거에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그의 용기와 소신있는 발언과 설득에 따라 에버레디 작전은 극적으로 취소되고 두 나라 사이의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미국의 정책이 바뀌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그토록 바라던 안전 보장과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담보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세부적으로 협상하기 위해 로버트슨 차관보는 한국으로 급파되어 16일 동안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들과 긴밀한 협의를 계속했다. 로버트슨 차관보를 파견하기 직전 덜레스 국무장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보면 미국정부 최고위층의 이 대통령에 대한 존경심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휴전에 반대하는 한국 대통령을 제거하고 휴전협상을 강행하려던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을 설득한 월터 S. 로버트슨 차관보가 없었다면 오늘의 한미동맹을 가능케 한 상호방위조약도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경제적 번영을 가능케 한 한미동맹은 6·25전쟁에서 흘린 피와 국민의 염원을 소중하게 받들던 이승만이라는 유능한 지도자의 국제정세를 꿰뚫는 혜안과 탁월한 외교력 그리고 필사적 투쟁으로 이루어낸 것이다. 그러나 휴전 협상을 타결시키는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존경하며 장시간 만났던 로버트슨 차관보가 없었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햇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6·25전쟁 70년이 되는 오늘날 한미동맹의 가치와 의미를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소중히 여기면서도 막상 이를 가능케 한 월터 S. 로버트슨 씨를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필자는 3년 전 조선일보 양상훈 주필의 칼럼 ‘작전명 에버레디(Ever-ready)를 아십니까?’와 남시욱 화정평화재단 이사장의 ‘6·25전쟁과 미국’이라는 역저를 통해서 에버레디 작전의 실체와 이를 무산시킨 로버트슨 차관보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그를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과 함께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알아본 그가 있었기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가능했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1893년 버지니아 주의 리치먼드에서 태어난 로버트슨 씨는 1944년 내전 중이던 중국 주재 미국 대사관의 경제 담당 공사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중국에서 근무하는 동안 미국 내에서도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공산 반군에 쫓기는 장개석 자유 중국 정부를 끝까지 지원한 고위 외교관으로 꼽힌다. 1949년 귀국 후 고양 리치먼드에서 활동하다가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덜레스 국무장관에 의해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로 임명되어 1953년부터 1959년까지 근무하는 동안 6·25전쟁 휴전을 위해 이승만 대통령과 오랫동안 만나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기틀을 만들었다. 중국 내전을 통해서 투철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자유중국의 장개석 총통을 끝까지 지원한 그는 이 대통령의 반공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미국 정부가, 중국 본토를 석권해 1949년 건국한 중화인민공화국을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던 것도 그의 일관된 반공 사상을 덜레스 국무장관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수긍하고 이해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1959년 국무부에서 은퇴한 후 로버트슨 씨는 리치먼드 금융계에서 일하며 버지니아 역사자료관과 미술관 업무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남시욱 이사장과 재미 사업가 임성빈 회장의 협조로 그의 손자가 되는 월터 S. 로버트슨 3세를 찾을 수 있었다. 리치먼드의 금융회사 간부로 근무하고 있는 그는 자신의 조부가 생전에 한국에 대해서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대한민국의 발전에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해왔다면서 조부의 모든 자료는 버지니아 역사 자료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앞으로 한국과 미국의 각종 외교문서와 로버트슨 씨 개인의 자료를 통해서 휴전협정과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과정의 비사와 로버트슨 씨의 역할을 밝혀내는 것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사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삼성전자 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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