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5월호에 실린 조성호 기자 작성의 미국내 김대중 비자금 의혹 추적 기사엔 국정원이 이희호를 비자금(12~13억 달러 추정) 관리자로 추정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관련 대목을 소개한다.
/////////////////////////////////////////////////////////////////////
국정원 자료에서는 동·서부 비자금에 관한 분석이 담긴 전문도 발견된다. 2011년 7월8일자 전문이다.
〈자금 형성 및 성격
■ 在美 전성식이 관리 중인 비자금(12억~13억 불)과 뉴욕 A 등이 관리 중인 자금(3억6000만 불)은 자금 형성 과정과 비자금 관리 인물이 전혀 다른 별개의 자금으로 별도의 추적이 필요.
■ 이희호 지휘 아래 전성식이 관리 중인 자금(12억~13억 불)은 데이비슨 부부가 비자금 관리자(전성식·Hans Lui)를 직접 면담한 정황 등으로 보아 데이비슨이 직접 동 자금을 조성(조풍언?) 관리하다 데이비슨이 사망하자 이희호가 관리 중인 것으로 판단.
■ 동 자금 집행 시 데이비슨 집사 이○○(전 ○○컴퓨터 명예회장) 등의 공동 승인이 필요한 점을 감안 시 데이비슨이 은퇴 이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계속 유지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적 자금으로 보임.
■ 최근 이희호(07년부터 40회 방중)가 동 자금을 중국으로 도피시키려는 정황이 포착되고 있는데 06. 4. 문○○의 고발로 김홍업 미 비자금(3억6000만 불)이 폭로되고 동 건을 계기로 미 당국이 데이비슨의 미 은닉 비자금을 조사할 움직임을 보이자 07년부터 중국으로의 자금 도피 작업에 착수.
■ 09. 6 북경가리화무역 설립을 시작으로 홍콩 KIQ 설립….〉
국정원은 동부 비자금과 서부 비자금의 관리인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추적해야 한다고 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앞서 언급한 동부 비자금 3억6000만 달러의 실소유주를 DJ의 차남 김홍업씨로 본 대목이다. 이 부분에 관해선 국정원이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아, 차후 면밀한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국정원은 또 전성식이 관리하는 비자금 12억~13억 달러의 실소유주는 고 이희호씨라고 판단했다. 이희호씨의 빈번한 중국 방문이 비자금과 관련 있다는 기술도 있다. 국정원은 DJ 측이 2006년 동부 비자금의 폭로로 인해 수사가 진행될 움직임이 보이자 비자금을 중국으로 유출시켰다고 본 것이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단서가 바로 앞서 언급한 동방가리화상무라고 국정원은 밝히고 있다.
참고로 전문에 등장하는 조풍언(2014년 사망)은 DJ와 동향(同鄕)인 재미 사업가로, 생전 DJ 비자금 관리자라고 의심을 받았다. 1999년 DJ가 대통령으로 재임할 당시, DJ의 경기도 일산 사저(私邸)를 매입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DJ 부부와 친분 있는 이○○ 목사 부부의 놀라운 이야기
그로부터 20여 일 후인 7월 29일 국정원 요원은 동·서부 비자금에 있어 한발 더 나아간 전문을 작성한다.
〈‘데이비슨’ 비자금 추적 중간보고
■ 11국장이 미주 동북아재단 상임이사 이○○(목사)·이○○ 부부를 방한 초치. 2회(7. 22, 7. 25) 접촉하여 파악한 데이비슨 및 박○○ (김홍업) 재미(在美) 비자금 추적 중간보고임.
■ 11국장은 이○○ 부부와 2002년부터 각별한 친분관계를 유지.
추적 결과
금번 이○○ 부부를 통해 파악한 바에 따르면, 데이비슨은 IMF 당시 대한생명보험 등 부실기업 정리 및 해외 헐값 매각으로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 약 10억 불을 조성한 후 2001년부터 전성식 등을 영입·본격 관리해오다.
■ 06. 4 뉴욕 서울플라자 인수 관련 고발로 데이비슨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전성식이 추적 회피를 위해 07년부터 중국 내 WTC 건립 투자를 명분으로 중국 이전(移轉)을 획책해온 것으로 확인.
■ 전성식은 WTC 투자 협의 과정에서 이○○ 부부 및 김진경에게 2차례에 걸쳐 자신이 데이비슨 비자금 10억 불을 관리 중임을 직접 밝힌 바 있으며,
■ 이○○ 부부는 퇴임 이후 방미(訪美)한 데이비슨 부부와 포틀랜드에서 3박 4일간 함께 지냈을 당시 데이비슨 부부가 전성식을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고 전성식의 언급이 사실임을 재확인….〉
국정원 국장이 DJ 부부와 친분이 있는 미주 동북아재단 관계자인 이○○ 목사 부부를 통해 확인한 내용은 주시해볼 필요가 있다. DJ가 어떤 방식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중요한 증언이기 때문이다. 이○○ 목사가 속해 있는 동북아재단은 서부 비자금 사건에 등장했던 김진경 평양과기대 명예총장이 이사장으로 있던 그 단체를 말한다.
‘DJ가 대한생명보험 등 부실기업을 해외에 헐값 매각해 그 대가로 리베이트를 받아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이○○ 목사 부부의 이야기는 놀랍다. 대한생명보험은 DJ 정권 때 해체된 신동아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다.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은 2009년 12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그룹 해체는 DJ 정권의 시나리오에 의해 실행됐다”고 폭로해 파문을 일으켰다. 대선(大選) 때 DJ를 돕지 않아 보복을 당해 그룹이 해체됐다는 취지였다. 물론 국정원의 첩보는 확인을 요하는 수준으로, 사실이라고 단정할 순 없다.
최순영 전 회장은 인터뷰에서 동부 비자금 건에 등장했던 D씨를 언급하기도 했다. D씨가 어느 모임에서 ‘(대선 때) 정치자금도 안 내고 도와주지도 않았는데 손 좀 보자’는 식의 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룹 해체 뒤 신동아그룹 계열사들은 헐값에 매각됐다.
국정원의 최종 판단 “증거자료로 볼 때 실존 가능성 多大”
전문을 보면, 이○○ 목사 부부는 DJ 부부와 제법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미국 포틀랜드에서 DJ 부부와 함께 지냈다는 기술이 주목된다. 실제로 DJ 부부는 대통령 퇴임 후 두 차례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 번은 DJ가 생존해 있던 2008년 4월이고, 또 한 번은 DJ 사후(死後)인 2010년 9월이었다. 이때는 이희호씨만 방문했다.
공교롭게도 포틀랜드는 서부 비자금 중 1억 달러가 예치될 계획이었던 페이퍼컴퍼니(국정원 추정) LHL Investment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DJ 비자금 관리자’로 지목된 전성식은 포틀랜드주립대 교수를 지냈다고 하며, 김진경이 이사장으로 있던 동북아재단과도 인연이 깊다.
국정원은 전성식이 “중국 내 WTC 건립 투자를 명분으로 중국 이전을 획책해온 것으로 확인”이라고 전문에 적었다.
《월간조선》(2020년 3월호)은 전성식이 테리 스즈키에게 “중국 선양(瀋陽)에 월드트레이드센터(WTC)를 건립하기 위한 자금 1억 달러를 ‘김홍걸로부터 조달받기로 했다’”며 “WTC 사업 참여를 권유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DJ 미국 내 비자금에 대해 국정원은 최종적으로 ‘실재할 가능성이 크다’고 결론 내렸다. 국정원 방첩국은 〈특명공작 사안별 진행현황 중 DJ비자금 내사 부분〉이란 보고서에서 “DJ 비자금 실체 평가 보고: 증거자료로 볼 때 실존 가능성 다대(多大) 평가”라고 적시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2012년 DJ 비자금에 대한 추적을 중단한다. 중단 이유에 대해 국정원 보고서는 “대선 임박 시점에서 DJ 비자금 문제 공론화 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2012년 8월 모든 협조망에 대해 잠복 조치하는 한편 대선 직전, 사업(DJ 비자금 추적 등) 관련 철을 폐기하고 핵심내용만 보관”이라고 적었다. 국정원·국세청이 주도했던 약 3년간의 미국 내 DJ 비자금 추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2018년 검찰은 최종흡 전 국정원 3차장과 김승연 전 대북공작국장을 DJ를 ‘뒷조사했다’는 혐의(국고 손실 등)로 구속했다. 두 사람은 보석으로 풀려났다가 지난 2월, 2심에서 각각 징역 1년6개월과 2년의 실형(實刑)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기자는 이번 취재 과정에서 안면이 있는 법조 기자를 통해 최종흡 차장의 1·2심 판결문을 구할 수 있었다. 읽어보니 1·2심 판결문 내용 대부분이 국정원의 회계 처리 미비(未備)에 관한 내용이었다. 비자금의 실체에 관한 내용은 사실상 전무(全無)했다. 그나마 2심 판결문은 김승연 국장, 국정원 이○○ 처장의 진술을 인용했는데, 이마저도 모두 최 전 차장에게 불리한 내용들이었다. 적게는 수천억원에서, 많게는 1조원에 달하는 DJ 비자금 의혹을 대하는 재판부의 시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법부와 검찰이 간과한 사실
최종흡 전 차장은 줄곧 DJ 비자금이 ‘대북 관련성이 있었다’며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돈이 북한으로 유입되려 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상황에서 이를 조사한 건 직무 관련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국정원의 DJ 비자금 추적이 ‘정치적 목적을 두고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검찰의 이 논리는 최 전 차장의 유죄(有罪) 근거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번에 입수한 자료에는 오히려 정치적 목적이 없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여럿이다.
전술(前述)한 두 건의 국정원 보고서가 이를 뒷받침한다. ‘대선 임박 시점에서 오해를 줄 수 있다’는 2012년 보고서의 한 대목과 IRS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한 국정원 문건에 적힌 ‘미 사법당국의 범죄 수사와 병행한 국내 동시 조사는 정치적 오해와는 무관(하다)’이란 기술이 그것이다.
국정원이 정보 제공의 대가(代價)로 테리 스즈키가 요구한 ‘10만 달러’를 거절한 것도 마찬가지다. 수사기록에 따르면, 도○○ 정보관은 스즈키가 돈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김○○ 국정원 차장에게 보고했다. 김 차장은 “리스크가 크고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서 돈을 지불할 수 없다”며 스즈키의 요구를 거절했다. 만약 국정원이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스즈키를 돈으로 매수해 어떤 식으로든 DJ 비자금을 국내 정치에 활용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사실은 한미(韓美) 양국의 정보기관(국정원), 수사기관(FBI) 그리고 비자금 추적 전문 기관(국세청·IRS)이 해외 첩보망을 통해 입수된 정보를 통해 비자금을 조직적·전방위적으로 추적했고, 그 과정에서 DJ 비자금으로 유력해 보이는 천문학적인 규모의 자금이 발견됐다는 점이다.
국정원·국세청은 미국 당국과의 합동조사 결과, 비자금의 실존 가능성이 ‘다대하다’고 했다. 그 자금의 상당 부분은 대북(對北) 관련성이 의심되는 게 사실이다. 재판부는 이처럼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는 간과해버렸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