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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가면(假面)놀이 엄상익(변호사)  |  2020-07-02
​변호사를 개업하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 한 텔레비전 방송국의 일산 촬영장을 간 적이 있었다. 그 안은 드라마를 찍기 위해 크고 작은 집부터 시작해서 골목도 있고 또다른 세상 같았다. 촬영장의 여기저기에는 스태프진들이 보이고 엑스트라나 조역들도 많았다.
  
  일을 하는데 내 앞으로 고급 승용차가 다가와서 멈추는 게 보였다. 차 안에서 낯이 익은 얼굴이 나왔다. 당당하고 멋진 역할로 인기가 높은 톱클래스에 속하는 탤런트였다. 드라마 속에서 그는 강하면서도 항상 겸손했다. 그리고 진실했다. 그래서 나도 그의 모습을 변호사의 한 모델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었다. 톱스타의 권위는 촬영장 안에서 대단했다. 주변에서 그를 본 조역이나 단역 그리고 스태프들이 달려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얼떨결에 앞에 섰던 나도 인사를 했다. 낯설지가 않고 잘 아는 사람 같아서였다.
  
  그는 인사를 제대로 받지 않고 목을 뻣뻣하게 한 채 뒷짐을 지고 갔다. 천박한 교만의 한 모습이었다. 봉건시대 아랫것들이 무릎 꿇고 있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지나치는 썩은 양반의 모습과 유사하다고나 할까. 드라마 속에서의 멋진 그의 인상이 순간 모두 증발하는 것 같았다. 그는 나의 변호사 뱃지를 흘낏 보면서 그 역할을 맡은 단역배우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맡은 작품마다 그리고 대하는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서 가면을 쓰는 것 같았다.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몇 번 그 비슷한 상황을 보기도 했다. 카메라가 비칠 때는 그렇게 선량해 보이고 싹싹하고 인정있어 보이는 사회자가 촬영을 하지 않는 순간은 퉁명스럽고 싸우고 심술궂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방송국의 스튜디오 무대도 그런 것 같다. TV화면에는 그렇게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이 무대 뒤로 가면 베니어와 못이 튀어나온 각목으로 만든 흉물스러운 모습들이었다.
  
  인생길에서 잠시 국회의원을 하는 변호사와 같은 사무실에서 지낸 적이 있다. 그는 판사를 하다가 국회의원으로 공천을 받고 바로 당선이 됐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계속 당선이 되고 권력의 핵심측근이 되어 부총리급 장관을 했다. 매일 텔레비전 뉴스 시간이면 그의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 화면에 비치곤 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알려진 그는 인기가 대단했다.
  
  그는 또 부지런했다. 저녁만 되면 지역구의 상갓집들을 빠지지 않고 방문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같은 법인에서 근무하는 변호사들에게는 교만했다. 모임이 있으면 그는 가장 늦게 와서 제일 상석에 앉았다. 그곳에는 판사 선배도 있었다. 그는 자리에 앉기 전 사람들이 모두 앞에서 일어나 자기를 환영해 주고 존경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가 악수를 위해 내미는 손에는 조금의 정도 묻어있지 않았다. 그냥 생명이 없는 종잇장을 만지는 느낌이었다.
  
  그는 나에게 사람은 판사도 해 보고 국회의원도 해 봐야 뭘 알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을 과시하면서 나를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말 같았다. 한번은 그가 자신은 정무에 바쁘다면서 자기가 맡은 사건을 법정에 나가 대신 변론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사건 내용을 그에게 물었다. 모른다고 했다. 어떤 변론을 대신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의뢰인이 절규하면서 말한 내용을 그는 마음에 두고 있어야 했다. 그는 알아서 하라고 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세상을 속이는 인간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불성실했다. 나는 그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그를 나의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나는 그에게 위아래를 모르는 건방진 놈으로 찍혔다. 나는 그가 대표로 이름을 두고 있던 로펌에서 나왔었다.
  
  그들만 가면을 쓰는 건 아니었다. 나도 수시로 가면을 쓰고 살았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았다. 길거리에서 전단지를 건네주려는 사람에 대한 얼굴이 다르고 사무실에 닦을 구두를 가지러 온 사람에 대한 얼굴이 다르고 돈 없는 변호 의뢰인에 대한 태도와 부자 의뢰인에 대한 표정이 다 달랐다. 결정권을 가진 판사 앞에서 비굴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가면을 쓰고 사는 동안 내가 거짓된 인간이라는 걸 몰랐다. 그리고 거짓된 인간은 진짜 인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세월이 다 지나간 이제야 아무것도 걸치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 내 자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삼성전자 뉴스룸
  • 1 2020-07-02 오후 7:44:00
    내 자신이 되어 사는 늙은이의 하루가 편안하다! 다시 젊어져도 내 자신의 삶은 살기 힘들것같다!!! 진짜 가면을 써야한다면 어떤 때일까??? 감사! 감사!!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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