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1. 칼럼
“정.상.참.작.바.랍.니.다" 엄상익(변호사)  |  2020-07-10
<두 재판장의 채찍>
  
  나는 따뜻한 인간의 피가 느껴지는 변론문을 써 보려고 노력해 왔다. 검사가 인생의 한 검은 점에 불과한 죄를 공소장에 요약해 쓴다면 변론은 그 점이 희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왜곡시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변론이란 검은 점보다 훨씬 넓은 면인 그의 인생을 재판정에 올려놓는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흉악한 강도범이 있었다. 정상참작을 할 사유가 수사기록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열심히 강도범의 인간적인 면을 찾았다. 마지막에 막 태어난 아기 우유값이 없어 도끼를 들고 나섰다는 범죄 동기를 들었다. 냉랭한 법의 세계는 변명 같은 그런 얘기를 비웃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각박한 흉악범의 눈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의 눈물을 변론서에 묘사하려고 노력했다. 변호사로서는 법 지식 자랑보다는 감옥에 있는 사람이 단 하루라도 징역을 덜 살 수 있는 사실과 증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변론문을 쓰기 시작한 사십대 초반쯤 교만한 한 재판장을 만났었다. 그는 출세의 길에 필요한 사람에게는 입에 혀같이 부드러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대신 법정 안에서는 폭군같이 군림한다는 평이 돌기도 했다. 재판장인 그가 내가 변호를 맡은 사건번호를 부르자 피고인이 재판장 앞에 섰다. 재판장은 위엄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면서 방청석 쪽을 향해 말했다.
  
  “지금 앞에 선 피고인의 가족 있어요?”
  그 말에 방청석 뒤쪽에서 주눅 든 얼굴로 그의 늙은 어머니와 아내가 일어섰다. 재판장이 그들을 향해 내뱉었다.
  
  “변호사가 쓴 변론문을 보니까 이건 변론문도 아니에요. 그냥 당사자나 가족이 쓰는 게 더 낫겠어. 변호사를 사지 말고 그렇게 하세요.”
  
  순간 나는 여러 방청객들이 보는 앞에서 오물을 머리부터 뒤집어 쓴 느낌이었다. 개결한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법조인에게 그보다 더한 모욕은 없었다. 재판장은 의자 등받이에 삐딱하게 앉은 자세로 내가 쓴 변론문을 들추어 보면서 덧붙였다.
  “여기 사정이 진실이라면 내가 생각은 좀 해보겠어.”
  
  왕같이 오만한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전형적인 틀 속에 매여 있는 법률서류의 내용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대법원 판례를 보면 그 자체가 하나의 문학적인 단편소설이었다. 한국의 대법원 판례를 보면 법조인들조차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호한 말에 고개를 갸웃할 때가 많았다. 일심 판결문을 해석해 달라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부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또 다른 항소심 법정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그 재판장도 여러 변호사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교만한 판사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가 법대 위에서 내가 쓴 항소이유서를 손에 들고 내게 말했다.
  
  “이게 수필입니까? 아니면 항소이유서입니까? 나는 도대체 그 취지를 모르겠어요.”
  
  정해진 틀이 있는데 왜 이따위로 쓰느냐는 노골적인 질책이었다. 나는 거대한 두꺼운 성벽 같은 법원의 봉건성에 분노가 일기 시작했다. 재판장은 자신이 정신적 전족(纏足)을 한 채 사건 기록이라는 바늘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광야의 세례요한 같이 바른 말을 하기로 결심했다.
  
  “재판장님! 항소이유서의 취지를 모르시겠다구요?”
  “모르겠는데요”
  재판장이 비웃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여덟 글자로 핵심을 압축할 수 있습니다. 더 짧게 줄인다면 네 자로까지 줄일 수 있습니다. 현명한 재판장님이 그게 안 보이신단 말입니까?”
  내가 되받아쳤다.
  
  “여덟 자로 줄이면 뭡니까?”
  재판장이 이놈 한번 해보자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정.상.참.작.바.랍.니.다.라는 여덟 글자입니다. 뒤에 존대말을 빼버리고 싶은데 그렇게 하면 네 글자로 되죠. 법적인 항소이유에 정상참작이 있지 않습니까?”
  
  순간 재판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면서 말했다.
  “그냥 넘어갑시다.”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바위에 새겨진 글같이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상처이기도 했다. 법정에서 질타당한 그 두 번의 일은 나의 자존심이 피를 흘린 고통이기도 했고 또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인간이 성장하고 성숙하는데는 고통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고통을 통해서만 더 많은 것을 자각하기 때문에 인간은 고통을 당하는지도 모른다. 자각이 열쇠다. 관례를 따라 살면 편안하고 안락하고 행복하다. 그럴 때 자각을 잃는다. 일종의 잠 속에 있거나 두뇌가 전족을 차고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삼성전자 뉴스룸
  • 글쓴이
  • 비밀번호
  •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