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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죽어도 좋다는 마음 엄상익(변호사)  |  2020-09-14
스물 일곱 살 무렵 전방부대에서 장교로 지내면서 한밤중이면 철책선 안으로 들어가 눈 덮인 전선을 혼자 순찰을 돌았었다. 사단장은 군인정신이 철저한 사람이었다. 법무장교가 되어 병사나 장교들을 심판하려면 먼저 자신이 전장의 한 가운데를 몸으로 체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명령을 따랐다.
  
  면도날 같이 날카로운 매서운 바람 속에 산도 들도 눈이 깊게 덮여 있었다. 적의 초소와의 거리가 육백미터도 안되는 곳도 있었다. 우리 초소는 일점 육키로미터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겁이 났다. 무장한 부대를 데리고 단체로 이동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혼자 걷는 것이다. 주위에는 지뢰들이 매설 되어 있었다. 나는 만약 적과 마주쳐 포로가 되기 직전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라고 생각을 했었다. 죽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혼자 순찰을 돌기 직전이면 권총의 탄창에 실탄을 채웠다. 노란 탄피의 머리 부분에 붉은색을 띤 둥근 탄알이 죽음의 신비로운 빛을 띤 것 같았다. 비상상황이 오면 총구를 입속에 넣거나 귀 옆에 대고 방아쇠를 당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다음 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겁이 없어지고 점점 대담해졌다. 적이 보거나 말거나 커다란 랜턴을 들고 휘적거리며 걸어다녔다. 새벽녘 동이 틀 무렵 적의 초소에서 밥짓는 듯한 연기가 오르는 걸 보기도 했다. 인민군 몇 명이 한 명을 그 앞에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기합을 주려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손나팔을 해서 “어이”하고 부르면 그들은 멋쩍은 듯 다시 초소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죽어도 좋다는 결심을 하면 상당히 편해지는 것 같았다.
  
  제대를 하고 뒷골목의 개인 변호사가 됐다. 수시로 상대하는 게 살인범이나 조직폭력배들이었다. 살기가 뿜어나오는 그들이 전방의 북한군 보다 훨씬 직접적이고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 더러 조폭 두목들과 음식점에서 마주 할 때도 있었다. 뱀이 앞의 다람쥐를 얼어붙게 하듯이 그들은 특유의 독기를 내뿜어 사람들을 제압했다. 그런 독기를 한번 쐬면 내면에 고드름이 가득 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런 때 조용히 하나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저 겁먹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지지 않으려고 하니까 걱정이지 맞아 죽을 각오를 하면 무슨 문제가 되겠느냐?’
  
  참 묘한 하나님의 답변이었다. 하기야 외아들이 그렇게 살려달라고 기도하는데도 사형대인 십자가에 올린 하나님이었다. 아마 아들 예수에게 찔려죽을 각오를 주셨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부터는 조폭들을 만나도 하나도 겁이 나지 않았다. 조폭 두목들이 내게 잘할 때면 “당신 이렇게 대해주다가 나중에 마음에 안 들면 나를 때릴 거 아니야?”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오히려 위세를 부리는 그들 내면의 허약한 어떤 게 보이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변호사를 하다보니까 세상의 이 면에 가득 쌓여있는 악취 나는 쓰레기 더미가 보였다. 피해갈 게 아니라 오물이 묻더라도 누군가는 치워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부정들을 폭로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사회적 부정을 보고 그걸 고발하는 게 작가의 임무이기도 하다고 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쓴 건 아니었다. 양심상 진실을 외면하고 그냥 넘어가기가 힘들 때 글을 써서 발표했다. 여러 건의 고소를 당했다.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더라도 십자가를 져야 하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현실의 십자가는 감옥에 들어가거나 가지고 있는 유일한 재산인 아파트를 배상금으로 날리는 것이다. 대법관의 잘못을 글로 써 시사잡지에 발표하고 판사들의 야무진 보복성 판결도 받아 보았다. 양심의 명령에 따라 그때그때 무심히 행동을 했다. 그때마다 시험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사람의 삶은 시험이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줄 곧 병과 고난의 시험일 것 같았다.
  
  나는 인생의 구도 여행이 의외로 특별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파도같이 일상적으로 다가오는 고난과 시험들을 양팔 벌리고 담담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닐까. 죽어도 좋다는 결심은 그 모든 걸 해결해 주는 게 아닐까. 다석 류영모 선생의 글을 보면 톨스토이는 나이 오십에 죽음의 유혹을 극복하고 진리의 나를 깨달았다고 했다. 석가나 예수의 구도를 위한 고행도 죽어도 좋다는 결심 없이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삼성전자 뉴스룸
  • 북한산 2020-09-16 오전 8:01:00
    과장이 심하십니다. 철책선 순찰하면서 그렇게 죽음의 공포까지 심하게 가졌다는 자체가 이해가 안되는 군요. '철책선 안으로 들어가...'라는 표현이 있는데 철책선 안은 DMZ이므로 철책선 바로 앞의 경계초소를 따라 순찰한 것이 맞다고 봅니다. 철책선 바로 앞에는 일정 간격(약 20m~30m정도간격이었던 듯)으로 아군 초소가 있어서 두명씩 밤새워 근무하고 있었고 그 초소 바로 뒤의 순찰로를 따라 걸어가면 경계호를 지날 때마다 근무병들이 '누구냐? 암구호?' 하고 수하를 했을 텐데 아군이 없는 허허 벌판을 순찰한 듯이 말씀하시는 것은 과장입니다. 물론 같은 상황이라도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느껴지는 면도 있겠지요. 저도 변호사님과 동갑이고 전방 수색대에서 76년 11월부터 79년 7월까지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낮에는 DMZ수색정찰, 밤에는 매복하고 gp 3개월 근무를 교대로 했습니다만 그렇게 죽음의 공포를 느낀 적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제가 근무할 당시에는 수시로 전투가 벌어진다든지하는 상황은 아니었고 비교적 평온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지뢰사고나 수류탄폭발로 사망이나 부상당하는 전우가 있었습니다. 비오는 날밤에 판초우의입고 매복지점에 앉아있을 때 음산한 분위기 때문인지 죽음의 공포가 느껴진 적이 있습니다. 그 외에는 전방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일상이 되다 보니까 GP에서 인민군에게 욕을 하기도 하고(그들은 전혀 대꾸를 안하더군요) 하면서 그냥 누군가 할 일을 내가 하고 있다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그리고 변호사님께서는 뒷골목 변호사, 낡고 허름한 변호사 사무실등과 같은 표현을 쓰시는데 가급적 자제하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겸손하다고 느껴지기 보다는 겸손으로 포장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변호사님 글에서 많은 것을 얻기도 하지만 뭔가 과장된 작위적 냄새가 나서 말씀드립니다. 제 의견일 뿐이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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