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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포화에 휩싸인 고국을 위해 자원입대했던 재일동포 청년들 642명 중 52명 전쟁 중 사망, 83명 행방불명…2019년 현재 8명 생존 조갑제닷컴  |  2020-09-18

1945년 8월15일 해방 이후 5년간 104만 명의 일본 거주 조선인들이 귀국했다. 그러나 일본에 남기를 택한 조선인들도 60만 명(1950년 기준)에 이른다. 당시의 재일동포 사회도 좌우로 나뉘어 반목을 거듭했는데,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고국이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다는 소식을 접한 反조총련계 재일동포 청년들은 일본 전역에서 자발적 참전(參戰) 의사를 밝힌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초대 유엔군 연락단장을 맡았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의 자서전 ‘나라를 사랑한 벽창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우리 군에 들어오려는 보충병과 미군 보충병(카투사, KATUSA) 모집에 한국 청년,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보고 감동했다. 또 다수의 주일 한국 교포 학생들이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돕기 위해 카투사로서 미군 부대에 입대하여 한국 전선에 투입되었다.”(‘나라를 사랑한 벽창우’, p157)
  
  642명에 달하는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6·25전쟁에 참여했지만 한꺼번에 투입된 것이 아니라 미군에 의해 몇 차례로, 지역별로 나뉘어 한반도에 진입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단일 부대로 투입된 것이 아니라 수십명 단위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싸웠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국 수호를 위해 참전하겠다는 청년들의 열망에 화답해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이 1950년 8월5일 민단 중앙본부에 ‘자원병 지도본부’를 설치, 간토(関東) 지역을 중심으로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의 지원서를 접수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1950년 9월8일 도쿄 인근의 사이타마(埼玉)현 아사카(朝霞)에 위치한 제1기병사단의 미8군 보충훈련소(US 8th Army Replacement Training Center·일명 캠프 Drake)에 입소해 2주간 훈련을 받은 뒤 인천으로 향한다. 이들 재일학도의용군 제1~2진 280명은 유엔군과 함께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가해 북한군과 전투를 치른다. 1~2진은 군번도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외신에서는 ‘유령부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니시 닛폰(西日本)’ 지역에서도 재일학도병 선발이 이뤄졌다. 1950면 9월18일 오이타(大分)현 벳부(別府)에 있는 미제8068 보충대대(일명 캠프 모리)에 오카야마(岡山)현 이서(以西)지역에서 자원한 재일동포 청년학생들이 입소해 군사훈련을 받았다. 45일 동안 기본적인 군사훈련을 마친 이들에게는 다른 재일학도병과는 달리 카투사 고유 군번인 K군번이 주어졌고 대부분 미제3사단에 카투사로 배속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 끝나고 미군은 재일학도병들을 부평 소재 미군 제3병참기지 사령부에 배치하였다. 재일학도병 카투사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외곽 경비하는 순찰업무나, 수송, 차량 수리 등과 같은 후방지원 업무가 대부분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공산주의 세력과 싸우기를 원했던 재일학도병 사이에서는 시간이 흐를수록 불만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지켜보던 일본계 2세 지미 고자와(Jimmy S. Gozawa) 중위는 조지 스튜어트(George C. Stewart) 제3병참기지 사령관에게 건의해 1950년 10월30일 이미 전투부대에 배속돼 다른 곳으로 이동한 카투사들을 제외한 323명을 중심으로 재일학도병 카투사들로 구성된 ‘3·1독립보병대대’(31st Korean Volunteer Battalion)를 창설한다.
  
  3·1독립대대는 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에서 2개 중대로 구성되었고 각 소대를 관리할 미군 하사관을 1명씩 배치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군 부대들이 서둘러 철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3·1독립대대에 해산명령이 떨어졌다. 현재까지도 미군이 왜 갑자기 3·1독립대대를 해산하도록 결정했는지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다.
  
  재일학도의용군들은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1950년 10월 원산·이원상륙작전, 1950년 11월 풍산·갑산·혜산진 탈환작전, 1950년 12월 임진강·고랑포 작전, 1950년 12월 흥남철수작전, 1951년 10월 중동부 지구작전(김일성고지 탈환작전), 1952년 10월 백마고지전투, 1953년 3월 저격능선전투, 금화지구 전투에 참여했다.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중 52명은 전쟁 중 사망했고, 83명은 행방불명 상태다. 행방불명자들은 대부분 북한 지역 전투에서 목숨을 잃어 유골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재일학도의용군은 1951년 초 미군 및 국군에서 제대해 온 회원의 일본 귀환대기 및 권익보호를 위하여 부산시 동구 초량동 소림사에 재일한교학도의용대를 조직하였다. 유엔군사령부는 4월15일이 지나고 나서 재일학도의용군에게 전역병령을 하달했고, 같은해 10월 국립 정양원에서 전원 수용보호를 받게 된다. 1952년 5월 샌프란시스코 미·일강화조약체결로 일본으로 입국이 금지되었다.
  
  정부가 서울로 돌아온 1953년 이들도 서울 종로구 인사동 34 탑골공원 뒤편으로 사무실을 옮겼다. 1958년 9월에는 치안국 특정과의 요청으로 재일교포 북송 저지 공작원에 41명이 응모, 일본에 밀파 도중 선박전복으로 7명이 희생되고 나머지는 목적지에 도착하여 간접적으로 활동했다.
  
  1958년 12월10일 동경 시나가와(品川)역에서 제1차 북송자 저지실력행사를 비롯하여 니가타현(新瀉縣) 근교의 오기가와역과 니가타역에서 선로상 연좌저지 실력행사로 일본경찰과 충돌하여 5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그 뒤에도 계속 저지운동을 전개했다.
  
  1960년 4·19혁명으로 본국에 송환 도중 24명이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미결 3개월, 실형 6개월 등 모두 15개월간의 감옥생활을 마치고 1961년 6월 귀국했다. 1963년에는 일본에 안치돼 있던 전사자 53명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했다.
  
  1966년 10월, 1980년 10월 2회에 걸쳐 민단(民團)장이 전회원에게 공로표창장을, 1967년 1월에는 무공포장을 수여했다. 1973년 6월 민단의 성금으로 국립묘지 제11묘역에 재일학도의용군 전몰용사위령비가 건립되었다.
  
  민단에 따르면 재일학도의용군은 2019년 현재 일본에 5인, 한국에 3인의 8명이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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