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이 부른 '상록수'와 '새마을 노래'
질풍노동의 역사를 써가는 한반도에서 대중가요는 역사를 담고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전우여 잘자라' '그때 그사람' '아침이슬' '상록수' '맹호들은 간다' '새마을 노래' '그리운 금강산'은 노래의 탄생과 유행에 역사의 숨결이 묻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기타를 치면서 양희은의 '상록수'를 부르는 광고를 내보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는 자막과 함께. 그는 현직일 때 알제리 대통령 면전에서 박정희의 '새마을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일보 최보식(崔普植) 기자가 노무현 자살 두 달 뒤에 쓴 칼럼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날 청와대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국빈 방문한 알제리의 부테플리카 대통령과 막 정상회담을 끝냈다. 만찬을 앞두고 대기실에 있는데 알제리 대통령이 먼저 "북한에 가보니 김일성 지도자는…"하고 말문을 열었다고 한다.
"북한 주민을 위해 정말 열성적으로 일했다. 그 아들 김정일도 못지않게 헌신적이고…"
개인적으로 김일성 부자와 오랜 친분이 있는지 칭찬을 한참 이어나갔다. 통역사는 난감했다. 통역을 안 할 수도, 자의적으로 그 내용을 줄일 수도 없는 것이다. 결국 알제리 대통령의 말을 그대로 통역했다. 순간 노 대통령의 표정이 굳어졌다. 통역사는 분위기를 읽고 조마조마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은 "하나도 빼지 말고 통역해주세요"하며 그를 쳐다봤다.
"김일성 김정일을 말하지만 북한 주민 상당수가 굶고 있습니다. 우리 남쪽에는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때까지 못살던 농촌과 지방을 바꾸어서 잘살게 만들었습니다. 새마을 운동이라는 걸 했습니다. 우리가 북한보다 잘살게 된 것이 바로 박 대통령 때부터입니다. 그분이 지은 '새마을 노래'라는 게 있습니다.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힘차게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우리 모두 일어나…" 노래를 불렀다. 꽉 쥔 주먹을 흔들며 박자를 맞췄다. 노 대통령 임기 첫해인 2003년 12월 9일 저녁이었다.
최 기자는 <통역사가 이 일화(逸話)를 내게 들려준 것은, 노 전 대통령의 자살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감상적인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면서 <그는 "정치적으로 오해받을까 봐 어디서도 얘기할 수 없었다"고 했다>고 한다. '상록수'와 '새마을 노래'의 공존, 여기에 인간 노무현의 참모습이 숨어 있을지 모르겠다. 노래는 때때로 인간과 역사의 본질을 드러낸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합창
역대 대통령 가운데서 노래를 작사, 작곡한 이는 두 사람, 박정희(朴正熙)와 노태우(盧泰愚)이다. 박정희 작사 작곡은 '새마을 노래' '나의 조국'이고 작사는 '금오산아 잘 있거라'이다. 박정희가 5.16 거사를 앞두고 쓴 글에다가 박시춘이 곡을 붙였다. 노래는 박재홍. 1960년대에 음반까지 나왔지만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권위 손상을 이유로 판매금지를 시켰다.
황파에 시달리는 삼천만 우리동포
언제나 구름 개이고 태양이 빛나리
천추에 한이 되는 조국질서 못잡으면
선혈바쳐 넋이 되어 통곡하리라
영남에 솟은 영봉 금오산아 잘있거라
세번째 못이룬 성공 이룰 날 있으리
대장부 일편단심 흥국일념 소원성취
못하오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공수 9여단가를 작곡했고 베사메 무초 등을 불러 녹음한 CD를 퇴임 선물로 나눠준 사람이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노래를 아주 격조 높게 부른다고 한다.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합창하는 모습은 영상이 아니라 기록에 남아 있다. 당시 대통령 홍보 비서관으로서 사료(史料) 담당이었던 金聲翊(김성익)씨의 현장 묘사이다.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1987년 6월17일 전(全) 대통령은 저녁 7시20분부터 9시30분까지 청와대 안가(安家)에서 노태우(盧泰愚) 민정당 대표위원 등과 만찬을 함께 했다. 이 모임에는 안무혁(安武赫) 안기부장, 이춘구(李春九) 민정당 사무총장, 이치호(李致浩)·현경대(玄敬大) 의원, 박영수(朴英秀) 비서실장, 안현태(安賢泰)경호실장, 김윤환(金潤煥) 정무1, 이종율(李鍾律) 공보 수석비서관 등이 자리를 함께 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통치사료에 이렇게 적혀 있다.
<죽장에 삿갓 쓰고 떠나가는 전(全)삿갓(두 번 노 대표와 합창)/열두 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로 /떠나가는 전 삿갓 전 삿갓 / 전 삿갓은 떠나고 노 삿갓이 들어오는 거다.
운다고 옛사랑이 오리오마는 /눈물로 달래보는 /구슬픈 이 밤 /고요히 창문 열고 별빛을 보니 /그 누가 불러주나 휘파람 소리(박수)
대통령: 노 후보가 퉁소 잘 불고 휘파람 잘 불고 다재다능한 분이야. 운동을 못 하나, 음악을 못 하나. 내가 운이 좋아 먼저 대통령을 했고 이 양반이 후보가 됐지만 이 사람이 나보다 몇 십 번 앞선 사람이다. 이 사람을 무조건 존경하고 잘 모셔야 해. 목숨 걸고 나한테보다 백 배 더 잘 모시라는 거야.
노래: 사나이 가는 길 앞에 웃음만이 있을소냐 /결심하고 가는 길 가로막는/폭풍이 어이 없으랴 /푸르른 희망을 가슴에 움켜 안고 /떠나온 정든 고향을 내 다시 돌아갈 때엔/열굽이 도는 길마다 꽃잎을 날려보리라.
내 십팔번이야. 노 후보 휘파람 한 번 불어주시오.
노 대표: 순풍에 돛달고 /몇 십 리를 돌려서 /외로이 걸어가니 /외로이 이 밤 처량해(노래).
안기부장: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한 곡 부르겠습니다.
대통령: 돌아가셨는가.
안기부장: 모르겠습니다.(이북에서) 어떻게 되셨는지. 어머님 묘소가 없습니다.(‘불러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노래).
대통령: 그래 미안해. 이게 우리 비극이야.
이치호 의원: 일송정 푸른 솔
대통령: (함께 부르고 나서) 제목은 '선구자'라는 거지(누군가 홈 스위트 홈을 부르고 대통령도 따라 불렀다)>
인간 전두환의 모습이 드러나다
기록자 김성익 비서관은 이런 해설을 붙였다.
<대통령이 전국적인 시위 사태가 수그러들지 않은 가운데 일주일 전 민정당의 전당대회에서 선출된 대통령후보 노 대표와 함께 축하주를 하는 자리였다. 적지 않은 대통령의 저녁 모임에 참석했지만 이때만큼 대통령이 자신의 감정과 속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본 적은 없었다. 全 대통령은 이 모임의 서두에서 노 대표를 중심으로 한 시국의 정치적 수습 방향을 마련할 것을 지시하고 술잔을 권한 다음부터 술기운이 돌기 시작해서 차츰 주취(酒醉)에 빠져들어 갔다. 대통령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본 것도 이 모임에서 처음이었다. 대통령의 노래는 굵은 목소리와 기교를 부리지 않는 스타일이 인상적이었다. ‘사나이 결심'은 그의 애창곡으로 나중에 청와대에서 있었던 이임(離任)행사 때 유명 가수가 불러 공개된 일이 있었다.
“노 대표는 나보다 훌륭한 분”이라고 얘기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 깊은 감회에 젖는 듯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전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대체적으로는 기복이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얘기했지만 때때로 감정에 북받치는 자세를 보였다. 술기운 때문이라고는 해도 어떤 자리에서든 항상 힘 있고 소신에 찬 자세를 보이던 것과는 다른 면모였다. 이 시점은 6·10사태에서 나타난 민의(民意)를 며칠 후에 발표되는 6·29선언을 통해 직선제 수용으로 풀어나가기로, 전 대통령과 노 대표 사이에서 깊은 논의를 통해 그 방향을 잡아가던 결단의 전야(前夜)전야)이기도 했다.
당시 민의의 표출에 대한 집권층의 결론으로서 6·29라는 우리 정치사의 새로운 방향과 내용이 준비되고 있었던 순간이고 이 자리의 두 주인공은, 얼마 안 가 한 사람은 전직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새로운 공화정을 책임지는 대통령으로 각기 운명이 바뀌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순간이었다.>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내 18번'이라 했던 '사나이 결심'은 원제(原題)가 '해 같은 내 마음'(김초향 작사/이봉룡 작곡/남인수 노래)으로 1949년에 나왔다. 비장한 분위기의 노래이다. 인터넷 세상에선 김재규의 애창곡이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이 나돈다. 해방직후엔 좌익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이 만찬에서 전 대통령이 '선구자'를 부를 때 바깥에선 시위대도 '선구자'를 불렀다. 요사이는 작곡가 조두남을 친일파로 모는 자들이 있다. 이래저래 한국의 노래는 정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