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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평생 공동묘지에 사는 영감 “미신이라고 무시하실지 모르겠지만 딱 한 번 죽은 분들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 엄상익(변호사)  |  2020-10-26
금곡 부근의 공동묘지 속에서 사는 그 칠십대 말쯤 되는 영감을 거의 오십 년 전에 알았다. 할아버지의 묘를 그가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한평생을 이사 한번 하지 않고 무덤들 사이에서 살면서 시신(屍身)을 거두는 일만 하고 있었다. 십이 년 전 봄비가 촉촉이 내리던 한식날이었다. 할아버지 묘를 돌보고 내려오다가 그 영감을 만나 인사했다.
  
  “삼십육년 전 엄 변호사를 만났을 때는 고등학생이었는데.”
  그 영감이 허허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는 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됐죠.”
  그때는 그 영감도 삼십 대의 싱싱한 청년이었다.
  
  “평생을 공동묘지에 살면서 죽은 사람들과 이웃으로 살았는데 무섭지 않으세요?”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난 그런 거 없어요. 죽으면 들어갈 자리도 바로 앞에 마련해 뒀는데 뭘.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저쪽 구덩이 안으로 들어갈 거요.”
  
  “귀신을 본 적은 없어요?”
  내가 물었다.
  
  “사실 별로 그런 적이 없어요. 제가 워낙 담력이 강하다는 소리를 듣긴 들었어요. 귀신도 사이클이 맞아야 보인다는데 나하고는 주파수가 맞지 않나 봐요. 믿으실지 몰라도 그런데도 몇 번의 이상한 경험은 있지.”
  
  “그게 뭔데요?”
  “작년 늦가을 새벽 두 시쯤이었어요. 갑자기 전화벨이 울리는 거에요. 아무리 묘지에서 살아왔지만 그 시간에 전화벨이 울린다는 건 기분이 좋지는 않지. 전화를 받아봤더니 뒷산 중간쯤에 있는 묘지에 묻힌 분의 손자인 거에요. 아버지가 거기에 가서 자살한 것 같으니까 가 봐 달라는 거였어요. 보름달이 훤하게 떠 있는 한밤중에 묘지에 가서 시체가 있는지 확인해 달라는데 기분 좋을 리가 없죠. 그래도 사람이 죽어가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안 가 볼 수도 없고. 한밤중에 묘지까지 올라갔죠. 아무도 없더라구. 그 사람은 그날 밤 한강 다리에서 투신해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그의 따뜻한 인간미가 투박한 말 속에서 느껴졌다. 그가 마음이 열렸는지 약간 주저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미신이라고 무시하실지 모르겠지만 딱 한 번 죽은 분들을 마주친 적이 있어요. 저기 저쪽 큰 나무아래 오래된 봉분 보이죠?”
  그는 팔을 뻗어 왼쪽의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오래된 소나무가 보였다. 옆으로 길게 늘어뜨린 가지 아래 묘가 보이는 것 같았다. 영감이 말을 계속했다.
  
  “비 오는 날 그 옆을 지나서 그 뒤편에 있는 마을로 갈 일이 있었어요. 그 묘지는 아랫마을 살던 부부가 묻혀있는 자리였어요. 봉분 옆을 지나가는데 오래 전에 죽은 노친네 부부가 봉분 위에 나란히 걸터앉아 발장난을 치면서 웃는 거에요. 입고 있는 옷을 보니까 예전에 가난할 때 누덕누덕 기워입던 베잠뱅이를 그대로 걸치고 있었어요. 그 댁은 농사를 지면서 아주 가난하게 살았죠. 그 차림 그대로였어요. 그 노친네 부부를 보고 무심하게 땅 속을 가리키면서 말했죠. 아니 저 아래 계셔야지 이렇게 올라와서 계시면 어떻게 하냐고 말이죠. 그랬더니 그 노친네 부부가 웃으면서 ‘우리 아들이 오늘 온다고 해서 나와 기다리는 거여’라고 말하는 거에요. 저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죠. 그냥 그분들을 지나 아랫마을로 내려갔어요. 때마침 그 노친네 아들이 비가 오는데 오토바이를 타고 나오더라구요. 구리시내를 간대요. 제가 아버지 어머니를 만났다고 얘기해 주고 싶었는데 미친놈이라고 할까 봐 입을 닫았어요. 바로 그날 아들이 모는 오토바이가 버스와 충돌해서 아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죠. 그 말을 전해 듣고야 그 노친네들이 아들을 기다린다고 하던 게 떠오르더라구요.”
  
  신기한 얘기였다. 인간은 죽어도 그 본체인 영혼은 낡은 옷같은 몸을 빠져 나와 이 세상에서 공존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성경은 인간이 죽으면 영(靈)이 빠져 나와 한 단계 진화된 천사 같은 새로운 몸을 받아 새로운 세계인 천국에서 산다고 했다. 단테의 신곡을 보면 몸이 죽은 영이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여정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 영감의 말이 믿어졌다.
  
  “평생 공동묘지 안에서 혼자 집을 짓고 사셨는데 가난해서 그렇게 사셨습니까?”
  내가 물었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무슨 말씀을? 내가 가진 남은 이 산자락 땅을 얼마 전에 사람들이 백억 원에 사자고 왔습디다. 바로 아래까지 아파트들이 들어설 거라고 하면서 말이요. 그래도 안 팔았어요.”
  
  그가 받은 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많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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