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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핏줄의 정(情) 엄상익(변호사)  |  2020-11-15
<손녀 팔 꺾지 말아요>
  
  일간 신문사 주필을 하다가 정년퇴직한 후배가 사무실로 놀러 왔다.
  
  “딸이 시집을 가서 손녀를 낳았는데 요즈음 우리 부부가 하는 일이 손녀를 보는 일이에요. 처음에는 아내가 혼자 가서 애를 봐 줬는데 만만한 일이 아니더라구. 그래서 요즈음은 내가 따라가서 보조를 해.”
  
  “어떤 보조를 하는데?”
  “기저귀와 우유를 든 가방을 들고 집사람을 따라다니는 거지. 더러 안아주기도 하고. 형은 어땠어?”
  
  그가 나를 보면서 물었다. 손녀가 지금 중학교 입학원서를 낼 때가 됐으니까 벌써 십삼 년 쯤 전이 되는 것 같다. 기억의 안개 저쪽에서 그 시절의 한 장면이 피어오른다. 시집에서 딸이 낳은 지 세 달이 되지 못한 손녀를 돌보느라고 고생하고 있었다. 애 때문에 잠을 못자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었다. 아내는 딸과 손녀를 우리 아파트로 데려왔다. 친정엄마인 아내는 딸을 자라고 침실로 보내고 손녀는 우리 차지였다. 안방의 상 위에 아가요를 펴고 그 위에 타올을 겹으로 깔고 손녀를 눕혔다. 손녀는 자고 있었다. 자면서도 그 짧은 팔을 위로 올려 귀 뒤를 긁으려고 애를 썼다.
  
  새벽 네 시경이었다. 손녀가 “에”하고 소리를 내면서 깼다. 아내가 우유를 젖병에 담을 동안 손녀를 가슴에 안았다. 제법 묵직하다. 무거운 머리가 뒤로 젖혀지지 않도록 나는 손바닥으로 손녀의 목과 뒷통수를 받쳐 주었다. 조용히 손녀의 뺨을 내 뺨에 대어본다. 물컹거리는 존재의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손녀와의 사이에 부드러운 전류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게 핏줄의 정(情)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몸을 조금씩 움직이면서 손녀를 흔들어 주었다. 손녀가 기분이 좋은지 조용했다. 손녀를 안고 서서 방 한쪽에 있는 거울에 비추어 본다. 잠이 다 깼는지 손녀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에미의 말로는 손녀는 맑은 새벽에 기분이 좋다고 했다. 할머니가 된 아내가 우유병을 가져와 손녀의 입에 물렸다. 손녀가 젖꼭지를 소리가 날 정도로 왕성하게 빨아들인다. 잠시 후 얼마나 힘을 썼는지 아기의 이마가 땀으로 촉촉해졌다. 젖먹던 힘까지 내라는 게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다. 손녀가 젖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행복감이 속에 피어오른다. 녀석이 실컷 먹었는지 젖꼭지를 뱉어낸다. 기분이 좋은 표정이다. 내가 손녀를 가슴에 안고 등을 툭툭 두드려 줬다. 녀석이 크윽하고 트림을 한다. 기분 좋게 먹고 이제 잠이 완전히 깬 것 같다.
  
  탁자 위의 전자시계가 아침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다. 그 순간 녀석이 머리통으로 내 얼굴을 콱 박았다. 내가 입을 열고 있었으면 내 이빨에 녀석이 다칠 뻔했다. 아기는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되나 보다. 녀석의 표정이 또 순간 변했다. 힘을 주는 것 같은 얼굴이다. 갑자기 아래쪽에서 쿰쿰한 냄새가 올라왔다. 내가 아내가 있는 쪽을 향해 “응가 했나 봐” 하고 소리쳤다. 아기를 요 위에 내려놓고 옷을 벗겼다. 갓 태어난 새새끼같이 빨간 몸이다. 바둥거리는 다리 사이에 있는 기저귀를 벗겼다. 파르스름한 빛깔의 똥이 묻어 있었다. 아내가 물휴지로 녀석의 궁둥이를 닦았다. 볼기에 파란 몽고 반점이 세 개나 보였다.
  
  “에취”
  녀석이 갑자기 재채기를 한다.
  
  “어이구 추운가보다. 감기걸리겠다.”
  아내가 그렇게 말하면서 아기의 한쪽 팔에 옷소매를 끼우면서 나에게 지시했다.
  
  “당신은 애 반대쪽 팔에 옷을 집어 넣어요. 괜히 애 팔을 꺾지 말고.”
  “알았어.”
  
  나는 조심조심하면 아이의 통통한 팔을 옷소매의 구멍 사이에 밀어넣었다. 이윽고 아내가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의 단추를 하나하나 채웠다. 녀석은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옹알이를 하고 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손녀와 눈을 보면서 말했다.
  
  “이제 기분이 좋으냐?”
  녀석이 마치 말을 알아듣기나 한 것처럼 갑자기 미소를 지으며 내게 눈웃음을 쳤다. 손녀의 미소로 지난밤의 수고가 싹 씻겨져 나간 것 같았다.
  
  그 손녀가 자라나 이제는 나의 스마트폰 앱을 정리해 주기도 하고 컴퓨터 작동을 도와주기도 한다. 나는 어떤 시의 한 구절을 손녀와 만날 때 암구호로 만들었다. 손녀가 왔을 때 나는 먼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내민다.
  
  “손녀와 맞잡은 손”
  그러면 손녀가 나의 손을 잡으면서 말한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그 다음은 같이 결론을 말한다.
  “사랑의 고리”
  
  손녀를 기다리는 할아버지의 마음은 따뜻함의 상징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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