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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현대사
미얀마 학살 사태를 보면서 박정희의 위대성을 다시 생각한다! 18년간 수많은 시위대를 만났지만 實彈을 한 발도 쏘지 않은 박정희! 趙甲濟  |  2021-03-06

문재인 대통령은 6일 “미얀마 군과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을 규탄하며,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을 비롯해 구금된 인사들의 즉각 석방을 강력히 촉구한다”고 했다. 페이스북에 “미얀마 국민들에 대한 폭력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더이상 인명의 희생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라며 “민주주의와 평화가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영어로도 같은 내용의 메시지를 함께 올린 데 이어, 해시태그 ‘저스티스 포 미얀마’(#JusticeForMyanmar), ‘스탠드 위드 미얀마’(#standwithmyanmar)도 같이 적었다.
   미얀마 군경(軍警)은 지난달 28일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대에 총격을 가한 이후 하루 수십 명씩 사살하고 있다. 쿠데타로 구금된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은 공포·불안을 야기하는 정보 발표를 금지하는 법을 위반한 혐의, 불법 수입된 무전기 소지(수출입법 위반)와 코로나 방역 조치 미준수(자연재해관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미얀마와 한국은 네윈과 박정희에 의하여 군부 쿠데타가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경우이다. 박정희를 비난하는 이들은 장기집권을 하면 그 정도의 경제성장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미얀마와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대 비슷했다. 미얀마는 군부독재를 60년이나 했는데 1인당 GDP가 1600달러 수준으로 한국의 20분의 1이다. 세계최빈국 그룹이다. 기름도 나고 3모작을 하는 나라가 이 모양이다.
   가장 큰 차이는 미얀마 군부는 민주화 시위대를 조준, 수시로 총을 쏘는데 박정희는 집권 18년간 수많은 시위대를 상대하였지만 단 한 번도 발포를 지시한 적이 없다. 총격으로 단 한 명의 시위대 사망도 없었다는 기록은 기네스에 항목을 新設하여 올려야 할 것이다.
   군인이었지만 교사이기도 하였던 박정희의 人命존중 사상과 당시 국군장교단의 수준을 보여준다. 동시에 시위대도 당시는 이념적 적대감을 갖지 않아 비교적 온건하였다. 박정희는 최악의 조건에서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단기간 내에 최대의 업적을 남긴 文明건설의 챔피언이었다는 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례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라는데 보편적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미얀마 군부에 대하여 비난을 한 기준을 김정은에게도 함께 적용해야 한다. 김정은에게 죽은 人命이 미얀마 군인들 총에 죽은 人命보다도 값이 싸다고 생각한다면 反인도범죄자이고 민족반역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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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8년 버마 군의 실력자(국방장관, 내무장관, 최고사령관 역임) 네윈은 부하들의 압박을 받아 無血쿠데타를 일으켜 우누 정권을 몰아내고 스스로 수상이 되었다. 우누가 스스로 네윈에게 정권을 넘긴 것처럼 되어 이를 쿠데타로 보지 않는 이들이 많지만 내용은 쿠데타였다. 당시 집권당이 분열하고 인종갈등이 사회적 혼란으로 치닫고 있어 우누도 상황통제가 불가능했다. 집권한 네윈은 철권통치로 질서를 회복하고 1960년 2월 공정한 선거를 주재하였고 우누가 재집권했다. 네윈은 그해 4월 정부를 이양하고 최고사령관으로 돌아갔다(2년 뒤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재집권의 길에 들어선다). 이 사태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박정희 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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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12월 박정희 소장은 요직인 육군작전참모부장에서 제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됐다. 박창록 방첩부대장은 2군 방첩대장 이희영 대령에게 “박정희를 엄중 감시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 동태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육사 5기 출신인 이희영 대령은 육사 시절 박정희 중대장에게서 배웠다. 박정희가 2군단 포병단장을 할 때에는 군단 파견 특무대장이었다. 이희영은 박창록 부대장의 지시를 받고 ‘또 사상 문제구나’라고 생각했다.
  
   방첩부대는 요원들을 군고구마 장수로 위장, 서울 신당동 박정희 장군 자택 부근에도 배치했다. 하지만 육영수 여사는 이들의 어설픈 행색을 보고, 남편을 감시하는 정보기관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육 여사는 이들의 사진을 찍어 편지와 함께 대구의 박정희 장군에게 보냈다.
  
   박 장군은 이 사진을 이희영 대령에게 건네주면서 “나를 빨갱이라고 의심해 감시를 붙여놓고 있는 모양인데, 이 대령이 방첩대에 이야기를 해서 이런 일 안 하도록 해주시오”라고 부탁했다. 이희영은 서울로 올라와서 박창록 방첩부대장에게 진언했다.
  
   “정 위험한 인물로 보이거든 옷을 벗기시죠. 그러지 않고 장성을 대놓고 감시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박창록 부대장은 “우리가 하고 싶어서 하는가.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거지”라고 답했다. 박정희 장군은 4·19 후 부정선거에 책임이 있거나 부패한 장성들의 예편 문제를 거론하는 등 淨軍운동에 앞장을 서서, 군 상층부의 미움을 받고 있었다.
  
   박정희 소장은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1961년 1월 하순 육군정보학교장 한웅진 준장을 만나러 경북 영천으로 가면서 이희영 대령에게 동행하자고 했다. 정보학교장 한웅진(한충렬) 준장은 박정희 장군의 혁명동지였다. 한 장군은 특무부대장을 지낸 적도 있다. 때문에 박정희 장군은 한웅진 준장이나 육군작전참모부 교육처장 장경순 준장을 방첩부대장으로 보내는 공작을 추진하기도 했다.
  
   영천으로 가는 차 안에서 박정희 장군은 이희영 대령에게 “우리도 버마식 쿠데타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대령이 “버마식 쿠데타가 뭐냐?”고 묻자 박 장군은 “버마식 쿠데타란 군부가 정권을 잡은 다음에 일정 기간 통치하다가 민간정부에 정권을 넘겨주었다, 민간정부가 군의 의향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에는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대령은 그제야 ‘박정희가 정말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방첩대장인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정도면 장도영 2군 사령관하고도 이야기가 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이 대령은 ‘쿠데타에 대해 장도영 사령관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 장도영은 육군참모총장으로 영전했다. 장도영이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데에는 5·16 주체 중 한 명인 김재춘 대령(6관구 참모장) 등의 역할이 있었다. 그는 친분이 있는 오위영·박순천 등 민주당 요인들에게 장도영이 총장이 되도록 운동을 하고, 인사를 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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