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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붕 올라갔다가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는 기분' 엄상익(변호사)  |  2021-03-07
<내리막길>
  
  대통령 직속 기관에서 몇 년간 일할 때 권력 내부의 적나라한 속살을 본 적이 있다. 외부에서는 뭔가 있는 듯 대단하게 보이지만 그들은 흙탕물 위의 백조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겉으로는 우아해도 짧은 물칼퀴가 있는 다리로 수없이 흙탕물을 헤집어야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권력자의 보좌관으로 있는 한 서기관을 보았다. 지방자치제가 실시되지 않았던 그 당시 정부의 서기관이라고 하면 지방의 군수나 작은 도시의 시장급이었다. 서울이라면 경찰서장이나 세무서장 등의 보직을 받기도 했다. 보좌관을 하는 그는 상당히 딱딱하고 거만해 보였다. 목소리도 권위가 가득 배어 있었다. 뒤에서 그에 대해 하는 말을 들었다. 인사권자의 냄새 나는 양말까지 빨아주면서 노예같이 행동한 대가로 승진을 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덕에 동료들보다 먼저 올라가 어깨를 으쓱댄다고 했다.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가 직장에서 대단한 일을 할 것이라고 상상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양말을 빨고 있는 광경을 본다면 그 부인은 어떤 생각을 할까.
  
  그 시절만 해도 아직 봉건성이 남아있는 우리 사회에서 인사권자에게 부하는 마음대로 유린해도 되는 머슴이었다.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대표가 아니라 봉건시대의 임금이었다. 비서실장을 지냈던 사람들은 내게 대통령을 ‘지존’이라고 불렀다. 임금이라는 소리였다.
  
  대통령이 골프를 치는 걸 멀리서 바라본 적이 있다. 공이 바닥에 떨어진 걸 비서실 여직원이 주워서 공손하게 대통령에게 주었다. 공을 줍기 위해 허리를 굽히는 것도 싫으면 차라리 비서관보고 대신 치라고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내가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리고 몇 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관의 냄새 나는 양말까지 빨아주었던 서기관이 나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정권이 바뀌고 그 기관에 숙정바람이 분 것 같다. 그가 목이 잘렸다. 그는 억울하다면서 내게 소송을 의뢰했다. 나는 그 기관이 그를 쫓아낸 이유를 알아보았다. 그 사유는 ‘안하무인’이라는 네 글자였다. 건방지다는 것이다. 그것도 해고 사유가 될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 기관에 있던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찾아와 호소했다. 그는 몸이 부서지도록 열심히 일하던 사람이었다. 기관장이 그를 총애해서 몇 단계 승진을 시켜 책임자 자리에 앉히고 싶어하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날 출근해 보니까 내 책상과 걸상이 없어져 있는 거야. 그날부터 총무국 대기명령이 나 있다는 거죠. 총무국에 가니까 내가 있을 자리가 없어요. 그러면서 대기하는 동안 사회봉사를 해야 한다면서 동물원에 가서 쓰레기를 줍고 축사에 가서 똥을 치우라고 하더라구. 수모를 참으면서 견딜까 하다가 나와버렸죠. 인내할 수가 없더라구.”
  
  공직에서 승승장구하던 그의 퇴직 사유도 ‘안하무인’이었다. 대통령이 바뀌면 어느 정도 직위 이상의 공직자들은 미리 사직서를 제출해 놓아야 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자리에 그냥 놔두고 적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조직에서 쫓아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점령군이 차지하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며칠 전 만나 점심을 함께 한 국회의원을 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나라 대통령을 보면 임금이야. 원래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대통령이 되면 옆에서 왕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야. 그렇게 대접을 받으니까 자신도 어느새 자연스럽게 왕이 되어 버리는 거지. 그런데 왕은 평생이지만 대통령은 몇 년 임기제의 왕인 거야. 그러니 왕에서 평민으로 떨어졌을 때 그 마음이 어떻겠어? 평민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 감옥으로 가서 죄수가 되는 게 우리나라잖아?”
  그가 잠시 쉬었다가 말을 계속했다.
  
  “친구들이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되면 장관님 의원님 하면서 동기들이 반말도 쓰지 못하고 막 올려주는 거야. 그러다 몇 달 하는 장관이 끝나면 ‘야 임마 박 장관 잘 있었냐?’라고 하기도 하고 ‘김 의원 저 새끼는 모임에도 이제 안 나오네’라고 하면서 막 대하는 거야. 붕 올라갔다가 땅바닥에 패대기 쳐지는 기분이지.”
  
  인생의 내리막길들은 올라갈 때보다 더 위험하고 공허한 것 같다. 그래서 예수는 섬김을 받는 자가 되기보다 남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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