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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세 번 잡혀 모두 탈출, 네 번째 잡혀 사라진 탈북동료 이민복(대북 풍선단장)  |  2021-11-29
삼엄한 중국 감옥을 탈출한 탈북자가 종내 잡혔다는 안타까운 소식이다. 그는 한 번 탈출하였다가 잡혔지만 세 번 탈출했다 네 번 만에 잡힌 탈북동료 생각이 난다.
  
  한 번이든 세 번이든 잡힌 원인은 범죄이다. 탈북상태에서 범죄행위는 자살꼴임을 알 수 있다. 나도 그와 함께 끝까지 있었더라면 덤으로 잡혔을 것이다.
  
  세상은 넓지만 좁기도 했다. 그 탈북동료는 내가 살던 곳인 평남도 순천시 은산노동자구 바로 옆인 성산노동자구(현재 은산노동자구는 군으로 승격) 출신이었다. 그곳에 나의 근무지였던 농업과학원 강냉이연구소가 있다.
  
  30년 가까이 지난 일이고 그가 남한에 오지 못한 것은 분명하기에 실명을 올린다. 리진호, 현재 나이 64세, 제대 후 러시아 건설공으로 진출했다. 목수 재간이 있어 그에게서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재일교포로서 돈을 보내주어 풍족한 편이었다.
  
  그 돈으로 또는 목수 재간으로 여자를 따 먹은 것만도 178명이라고 자랑하였다. 기억도 좋아 그 한 명 한 명의 여성과 놀던 얘기를 하는데 포르노 영화가 따로 없었다. 성관계자들 한 명 한 명이 그렇게 다 다르다고 한다.
  
  신문, 방송 일체 없는 무주고혼 삭막한 곳인 모스크바 교외의 다챠(별장)에서 건설일을 4개월 함께하였다. 실은 남한대사관에서 소개한 허진 선생(50년대 탈북망명자)이 안배한 모스크바 시내 아파트에 있었다. 하지만 나의 적극적인 제의로 허진 선생의 미완공된 다챠 짓는 곳에 가게 되었다.
  
  아파트가 참 편하고 은폐하기 좋았는데 이 친구가 오면서 매우 불안해졌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술, 여자를 몹시 좋아하였다. 시장에서 유혹할 만한 여성을 귀신처럼 잘 골라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데려와 자기도 한다. 한번은 두 명의 러시아처녀를 데려왔는데 한꺼번에 할 수 없어 그 중 한 여성을 나에게 떠민다. 성에 몹시 굶주려있어 속은 본능적이었지만 낯선 외국 여성과 난생 처음이니 얼어붙어 여자를 내보내 버렸다. 일을 끝낸 리진호는 고자가 아닌가고 의심할 정도로 바보라고 흉본다. 그걸 어떻게 참는가이다. 사실 참았다기보다는 너무 경험이 없어 당혹스러워 내보낸 것이다. 아마 여자가 나가지 않고 안겨왔다면 넘어갔을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개를 잡아 먹지 않는다. 떠도는 개도 많다. 그런 개를 잡아먹자고 시도한다. 또 상점판매원 앞에서도 물건을 훔치는 것은 가히 신기할 정도였다. 그는 상용 로어를 나보다 훨씬 잘했다. 과일판매가계에 가서 <빠쫌>(저거 얼마야요) 하면 판매원이 머리를 돌리는 순간 사과를 주머니에 넣는다. <빠쫌>, <뺘쫌>할 때마다 한 알씩 주머니에 채운다.
  
  아무것도 안 사고 주머니 불룩해서 상점을 나서는 그에게 <너 그 사과 한 알과 목숨하고 바꾸겠냐고> 충고하니 <야! 야! 망명자가 이렇게 살지 어떻게 사냐> 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아빠트에서 술마시고 조용히 있어야 하는데 술기운으로 떠들어대니 옆 거주민이 누구냐고 물어오는 단 한번의 사건을 계기로 즉시 떠나야겠다고 허진 선생께 제의하였다.
  
  어떤 경우든 그의 행동은 신고당할 위험이 높았고 누가 경찰을 부르면 끝이기 때문이다. 한적한 다챠에 가서도 그의 행보는 멈춰지지 않았다. 그와 내내 있는 기간 그를 제지하느라 전전긍긍하였다. 그가 걸리면 함께 있는 나도 걸리기 때문이다. 당장 굶어죽는다 해도 빌어먹는 것이 낫지 사소한 범죄에도 걸려들면 그렇지 않아도 탈북자인 주제에 형벌이 아니라 죽을 수 있는 북송 길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욕을 참기 어려워 했다. 성욕은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참는 수밖에 없다. 그는 정말 참기 어려운지 먼 곳의 우즈베키스탄 동거녀를 불러왔다. 여자가 있으니 좀 나아졌다.
  
  겨울이 다가오자 건축일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는 돈벌기 위해 함께 보다 따뜻한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자고 한다. 나처럼 성실하면 거기 가서 여자도 얻고 돈도 번다는 것이다. 나는 거절하였다. 무엇보다 남한에 가는 것이 최종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가 떠난 후에 모스크바에 남아 남한으로 가기 위해 모색하였다. 한인교회를 통해 숨어있던 탈북자들을 찾아내여 러시아 탈북난민협회를 결성하고 투쟁하였다. 마침내 유엔 즉 UNHCR에 북한사람으로서 처음 등록하고 동료들과 함께 남한에 오게 되었다. 남한 가는 길이 열렸을 때 리진호 탈북동료가 생각나서 우즈베키스탄에 전화하였다. 전화받는 것은 동거녀였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공항에 내리자마자 리진호는 경찰에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때 같이 갔더라면 나도 덤으로 잡혔을 것이다. 체포 이유는 첫 동거녀의 신고였다. 오갈 데 없는 리진호를 처음 은인처럼 돌봐준 것이 첫 동거녀 가족이었다. 목수 재간이 있어 사위로 삼는다는 이해관계도 있었는데 안정되자 다른 여자를 본 것이다. 심통이 난 첫 동거녀 가족이 신고를 해서 체포되어 비행기 노선인 모스크바로 이송시켰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것이 세 번째 체포라고 한다. 그때마다 탈출한 역사를 말하는데 그 중 한 실례를 든다.
  
  시베리아 북한대표부 감옥 3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탈출하여 다리가 접질러지기도 하였다. 탈출 후 찾아간 곳이 동족들이 많이 산다는 우즈베키스탄으로 갔고 무작정 찾아들어간 곳이 첫 동거녀 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딴 여자를 보니 첫 동거녀가 신고하여 꼼짝 못하고 모스크바 북한대사관에 이송, 낮 2시경에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에 실리게 되었는데 점심시간 잠간 감시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도망을 쳤다.
  
  맨발에 정신없이 걸음아 날 살려라 뛰었다. 나름대로 추격을 못하게 거리 골목을 요리저리 돌고 돌아 이젠 멀리 와서 살았구나 하고 앞을 보니 북한대사관 앞에 다시 왔더란다. 캭! 기절초풍! 이번에는 무조건 돈도 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남조선 대사관으로 향했다. 택시비는 대사관에서 문다고 큰소리쳤다. 또 공관원을 만났을 때도 큰 소리쳤다. 나한데 돈을 좀 주면 김부자 죽여버릴 자신있다고. 그래서인지 명망 반김일성 인사인 허진 선생에게 보내지게 된 것이다.
  
  사실 대사관에서는 벌목공이나 건설공 탈북자에겐 냉랭하였다. 대사관에서 안 나가면 경찰을 부르겠어! 하면서 내쫒은 것을 리진호는 벌써 알고 펑을 친 것이 먹혀든 것이다. 세 번 잡혔다가 세 번을 탈출할 만큼 비범한 인간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죽을 4자인 네 번 만에는 탈출을 못한 것 같다.
  
  추후 소식에 의하면 귀신처럼 탈출한 경력 때문인지 아니면 비행기 값이 아깝다고 조용한 곳에 끌고가 처형했다고 한다. 아무튼 30년 가까이 되도 그가 남조선에 왔다는 소식은 여직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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