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닷컴

  1. 최신정보
역사가 또 다른 朴正熙를 불러낼 것인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런 배은망덕의 풍조가 是正(시정)되지 않는다면 국민과 역사가 또 다른 朴正熙를 불러낼지 모른다. 趙甲濟  |  2022-05-16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하여 최초의 민족통일국가가 탄생하였다. 李承晩(이승만)이 주도한 대한민국 建國(건국)으로 최초의 국민국가가 만들어졌다. 1961년의 5.16 군사혁명은 791년 만에 최초로 武人들이 정권을 잡은 사건이고, 이 나라가 ‘삶의 질’ 랭킹 세계 12위(2010년 UNDP)로 발전하는 길을 열었다. 오늘의 한국은 2000년 민족사에서 가장 잘 살고, 국제적 位相도 가장 높다.
   필자는 이 세 사건을 민족사의 최대사건, 그 주역인 金庾信(김유신), 金春秋(김춘추), 文武王(문무왕), 李承晩, 朴正熙(박정희)를 세종대왕, 李舜臣(이순신), 王建(왕건), 李成桂(이성계), 金方慶(김방경)과 함께 민족사의 10대 인물로 친다.
    한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1961년의 5.16 군사혁명을 설명하면서 ‘독재가 시작되었다’는 제목을 달았다.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쓰지 않았다. 좌편향이 특히 심한 두 교과서는 역대 한국 정부에 ‘독재’라는 표현을 22회 쓴 반면, 북한정권엔 다섯 번만 썼다. 이런 교과서엔 ‘역사’도 ‘교육’도 없다.
   역사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因果(인과)관계를 설명하는 일이다. 西歐(서구)에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어떤 기복과 進退(진퇴)가 있었고 한국은 그 과정을 어떻게 밟았느냐를 記述(기술)해야 역사를 알게 되고 겸손해진다. 1948년 8월15일부터 민주주의를 하기 시작한 나라에서 과연 수백 년이 걸린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었겠느냐를 학생들에게 설명한 다음 李承晩, 朴正熙를 비판하여야 한다. 교과서 筆陣(필진)은 그런 역사성을 생략한 채 李承晩, 朴正熙 정부에 대하여는 가장 엄격한 서구식 민주주의 기준을 적용하여 독재라고 비판하고 북한정권에 대하여는 북한식 기준을 적용, 비호함으로써 학생들의 正義感(정의감)과 분별력을 망가뜨리고 있다.
  
    서기 1215년 영국의 존 왕은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귀족회의의 동의 없이는 세금을 물리지 않고 구속영장 없이는 자유민을 구금하지 않는다는 취지의 약속을 했다. 마그나 카르타(大章典, 대장전)의 탄생이다. 그 후 국회와 王은 서로 힘겨루기를 하면서 內戰(내전), 암살, 처형 등으로 피를 흘리다가 1688년 명예혁명 이후 王의 권한이 결정적으로 약화되고 국회가 국민을 대표하여 主權(주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세계 민주주의 발달의 최선진국 영국에서도 1754년에 투표권을 가진 사람은 당시 인구 약 800만 명의 3.5%인 28만 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물론 귀족이었다. 차츰 선거권이 확대되어 갔다.  
    1884년에 가면 세금을 내는 영국의 모든 家口主(가구주)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1918년엔 세금을 내는가의 與否(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成人(성인) 남자들이 투표권을 가지게 되었고, 여자들에 대한 보통 선거권은 1928년에 주어졌다.  
    프랑스에서도 1790년 일정규모의 재산을 가진 납세자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1815년엔 30세 이상의 年300 프랑 이상 납세자가 투표권을 가졌다. 1820년엔 일정 재산 이상을 가진 有權者(유권자)는 1인 두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1830년엔 25세 이상의 年200프랑 이상 납세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 인구는 전체 成人의 170분의 1이었다. 1848년 모든 남자 成人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가 2년 뒤 3년 이상 거주 납세자로 제한되었다. 1851년에 다시 남자 보통 선거권으로 돌아갔다. 자유, 박애, 평등의 나라에서도 1945년에 가서야 여성 성인들에게 투표권을 주었다. 미국에서 흑인들이 안심하고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1964년 民權法(민권법), 1965년 투표권법이 통과된 이후였다. 흑인의 경우 한국보다 정치적 자유를 맛보는 것이 늦었다.
   
    이상의 사실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선거권 확대란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참여폭이 확대되는 과정이란 사실이다. 동시에 선거권은 신분 중심(봉건체제)-납세자 중심(부르주아 체제)-男女 모두(대중 민주주의 시대)로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투표권의 확대는 法 개정을 통하여 이뤄졌다. 法治(법치)를 쟁취한 과정이 민주주의 발달 과정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런 수백 년에 걸친 점진적인 과정을 생략하고 1948년 헌법 제정과 동시에 보통선거를 하게 되었다. 재벌 총수도 한 표, 직원도 한 표이다. 無職者(무식자)도 한 표, 교수도 한 표이다. 세금을 몇 조 원이나 내는 사람도 한 표, 안 내는 사람도 한 표이다.  
    유럽에서 선거권의 점진적 확대 과정은 투쟁의 과정이고 민주주의 학습과 실천의 과정이었다. 미국 독립 선언을 기초한 토마스 제퍼슨은 “자유라는 나무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를 마시면서 자라는 나무”라는 표현을 했다. 그런 과정을 생략하고 그 결과물인 男女 불문한 1인1표제를 도입한 것은 어떻게 보면 서양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을 쏟아 부어 만들어낸 민주주의 제도에 무임승차한 셈이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유럽 민주주의 국가 사람들의 苦鬪(고투)를 인정하고 감사하면서 민주주의의 본질을 공부하고 실천해야 할 의무를 진 셈이다.  
    1948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서양에서 수백 년 걸려[영국의 경우 마그나 카르타(대헌장) 제정부터 시작하면 보통선거 쟁취까지 약 800년이 걸렸다] 발전시킨 민주주의 제도를 척박한 조건에서 시행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압축적으로 겪은 과정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란 연극, 민주주의란 연습을 해온 셈이다. 연극과 연습을 많이 하면 實演(실연)이 되긴 하지만 외래 제도나 사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선 엄청난 代價(대가)를 치러야 한다.
    
    西歐의 민주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李承晩과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메이저 리그의 통계를 기준으로 삼아 동네 야구 선수들을 혹평하는 것과 같다. 세종대왕에게 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설을 퍼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구의 先進(선진) 민주주의를 판단기준으로 하여 李承晩, 朴正熙가 독재를 했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은 민주주의가 도입된 지 10~30년 만에 선진국 수준의 민주주의를 성취한 나라를 발견해야 한다. 세계사에는 물론 그런 예가 없다.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세기의 유럽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었다. 10~30년짜리 한국 민주주의가 유럽의 수백 년짜리 민주주의보다 더 발전되었다면 두 전직 대통령을 과연 자신 있게 독재자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 링컨이 1950~1970년대의 한국을 다스려도 李, 朴 대통령만큼 하진 못하였을 것이다.  
    일본에 비교하면 李, 朴 두 대통령 시절의 민주주의는 1910~1920년대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보다 못하지 않다. 북한과 중국은 아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면 무슨 기준으로 좌익들은 李承晩, 朴正熙를 독재자라고 매도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진 기준은 地上(지상)의 것이 아니라 天國(천국)의 기준이든지 자기 꿈속의 기준일 것이다. 그들의 잣대는 북한정권에 들이댈 때는 갑자기 눈금이 넓어지는 요술 자(尺)이기도 하다.
    李承晩은 쿠데타를 통하여 집권한 적이 없고, 憲政(헌정)을 중단시킨 적이 없다. 전쟁중에도 언론검열을 하지 않았고, 국회를 해산하지 않았으며, 선거를 중단하지 않았고, 통화개혁 때도 私有재산권을 보호하려 한 사람이다. 그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이가 다섯 달도 안 되는 아기였다. 그는 자진하여 물러났다. 한민족에게 자유를 선물한 그를 독재자라고 부르는 건 역사에 대한 모독이자 인간에 대한 무례이다.
   朴正熙는 물론 두 번(5·16과 유신) 쿠데타를 하였다. 그러나 1963, 1967, 1971년 세 차례 선거를 통하여 당선된 대통령이었다. 이 기간은 독재가 아니었다. 따라서 독재적 기간이 있었다고 하여 그의 통치기간 전체를 독재로 모는 방식의 표현(독재자 운운)은 잘못 된 것이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의 당위성을 부정한 적도 없다. 서구식 민주주의를 후진국에, 그것도 전쟁 중인 나라에 무조건 적용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욕을 먹더라도 민주주의의 조건을 먼저 만들겠다고 작심한 사람이다.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는 경제력과 제도를 만든 점에서 李承晩와 함께 그를 한국 민주주의의 진정한 건설자로 보는 게 정당한 역사적 평가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안보, 복지, 자유를 내용물로 한다. 안보와 복지엔 돈이 든다. 李承晩은 “나라를 자유라는 주춧돌 위에 세우면 사람과 사회가 활기를 얻어 富國强兵(부국강병)이 이뤄진다”고 확신하였다. 朴正熙는 더 구체적이었다. 안보와 복지를 뒷받침하는 國富(국부)를 쌓아야 민주주의가 가능한데, 이것은 수출主導(주도)의 경제개발 계획, 즉 국가가 주도하는 시장경제를 통하여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경제개발에 성공하면 국가기능과 국민수준이 향상되어 민주주의와 자유통일도 가능하다고 보았다.
   朴正熙는 혁명적 역사관의 소유자였다. 그의 조국 근대화 전략은 단순하면서 일관성이 있었다.
  
   1. 민주주의는 하느님이 아니다. 實事求是(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서구식 민주주의를 한국의 실정에 맞게 바꾸어서 써야 한다. 現實(현실)과 事實(사실)에 맞는 노선과 정책을 선택한다.
   2. 민주주의를 외치는 정치인, 언론인, 학자, 학생들의 正體는 위선적 명분론에서 헤어나지 못한 ‘봉건적 잔재’이고 무능한 守舊(수구)세력이다. 군인, 기업인, 과학기술자들이 이들을 누르고 새 시대를 주도하도록 해야 한다. 士農工商(사농공상)은 商工農士로 뒤집어야 한다.
   3. 自助(자조)정신-自立(자립)경제-自主(자주)국방의 3단계를 국가 대전략의 기본으로 삼는다. 열심히 하려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밀어준다.
   4. 시간이 없다. 先進國으로 가는 막차를 놓쳐선 안 된다. 國力(국력)의 조직화로 능률을 극대화하면 시간 단축이 가능하다. 국제수준에 맞는 제도와 국제경쟁력이 있는 공장을 만들어야 한다.
  
   5.16 군사혁명 50주년을 맞아 ‘朴正熙 少將으로 대표되는 장교단이 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는가’를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였다. 10여 년 전 조선일보와 월간조선에 연재하여 13권짜리 ‘朴正熙 傳記’로 출판한 책 중에서 5.16 전후 부분을 뽑아 보완하고, 事後(사후) 평가 부분을 덧붙였다.
   정리하면서 새삼 감탄한 것은 박정희의 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도록 도운 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었다. 張都暎(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은 쿠데타 모의를 알면서도 막지 않았다. 張勉(장면) 총리가 정보를 듣고 그에게 수사를 지시하여도 “사실무근이다”고 허위보고를 하였다. 張勉은 새벽에 총성을 듣고 수도원으로 피신, 軍 통수권을 포기하였다. 그를 대신하여 진압군을 동원해야 할 자리에 있던 尹潽善(윤보선) 대통령은 “올 것이 왔다”고 쿠데타를 반기면서,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의 진압 건의를 거절하는 한편 한동안 대통령직에 머물면서 軍政(군정)이 안정되도록 도왔다.
   미국의 케네디 정부는 매그루더의 강경론에 브레이크를 걸고, 곧 군사혁명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인 뒤 군사정권이 경제개발에 매진하도록 유도한다. 서울시민들의 60%가 쿠데타를 지지하였다. 지식인층의 여론을 주도하던 ‘思想界’의 張俊河도 혁명을 지지하였다. 중학교 3학년생이던 나도, 50대 초반의 아버지도 군사혁명 환영이었다. 1년 전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렸던 학생들은 아무도 군사혁명을 반대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결정적인 것은 軍心(군심)이었다. 상당수 軍 장교들은 쿠데타 모의가 진행중인 것을 알고도 고발은커녕 응원하는 입장이었다. 民心과 軍心의 거대한 흐름이 혁명을 성공시킨 근원적인 힘이었다. 이를 역사의 흐름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듯하다. 民心과 軍心의 내용은 무엇인가? 2011년 초 中東(중동)을 흔든 이집트 시민혁명의 主力軍이었던 젊은층의 願望(원망)과 비슷할 것이다. “우리도 인간답게 살아 보자.”
  
   4.19 학생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은 혁명에 담긴 국민들의 熱望(열망)을 채워주지 못하였다. 新舊派(신구파)로 분열, 정권이 불안해지니, 자유의 방종 속에서 무너지는 법과 질서를 바로잡지 못하였다. 정권의 무능과 부패는 李承晩 시절보다 더하였다. 국민들은 경제력의 뒷받침이 없는 자유의 허망함을 實感(실감)하였다. 6.25 참전 경험을 가진 군인들은 좌익들의 등장으로 등 뒤가 서늘해졌다. 언론은 民弊(민폐)를 끼치고 무책임한 정부 비방에 전념하였다. 시민들이 군인들을 보면 “나서지 않고 뭣 하느냐”고 나무랄 정도였다. 70만 국군만이 조직으로서 健在(건재)하였다. 朴正熙와 장교단은 이런 역사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5ㆍ16 군사혁명 이후 처음으로 군인, 기업인, 과학기술자가 새 역사 창조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의 힘으로, 역사적 문화적 조건에선 도저히 대기업을 만들 수 없는 한국에서 세계적 대기업이 생겨났다. 石工(석공) 출신 노동자가 大企業群의 창업자가 되고, 전문경영자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 사이 북한에선 일종의 王權(왕권) 세습체제가 정착하였다. 계급혁명은 한국에서 성공하였다.
    대기업은 좋은 상품과 많은 일자리를 만들고, 外貨(외화)를 많이 벌어들이며, 세금을 많이 내고,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며 지역사회에 공헌한다. 일종의 복지기관이기도 하다. 대기업을 만들 수 있는 나라인가, 아닌가가 先進國(선진국)과 後進國(후진국)을 가른다.
    경제와 과학에 대한 感受性(감수성)과 문제의식이 뛰어난 박정희는 기업인과 과학기술자들을 후원, 대기업을 많이 만들어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인 사람이지만 돈 그 자체에 대하여는 淸貧(청빈)한 마음을 유지하였다. 그는 淸濁(청탁)을 가리지 않고 들이키대 늘 맑은 정신을 잃지 않았다. 비빔밥과 막걸리를 좋아하고, 물을 절약한다고 아무도 보지 않는 침실 변기통에 벽돌을 넣은, 부끄럼 타는 권력자, 부패하지 않은 권력자였다. 그가 더러운 강물 같은 舊시대를 들이마셔 바다와 같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었던 비결은 죽을 때까지 지켜낸 순수함이었다. 그리하여 銃口에서 나온 권력이 人口를 살렸다.
  
    5ㆍ16 군사혁명은 국가주의적 열정으로 무장한 장교단이 폐쇄노선을 거부하고 개방노선을 선택, 경제개발에 성공함으로써 민주복지국가의 토대를 쌓은 희귀한 예이다. 朴正熙가 군사혁명 성공 이후 200일간 취한 조치가 한국의 進路를 ‘자주적 개방 노선’으로 설정하였다. 2011년의 한국은 아직 그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5ㆍ16이, 신라의 삼국통일, 대한민국 建國과 함께 민족사 최대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보수층의 지지로 탄생한 李明博(이명박) 정부는, 좌경 교과서를 국가검정으로 公認(공인)해줌으로써 학생들에게 ‘5.16은 독재가 시작된 해’라고 가르치도록 하였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이런 배은망덕의 풍조가 是正(시정)되지 않는다면 국민들이 또 다른 朴正熙를 역사의 무대로 불러낼지 모른다.
   4.19 이후 전개된 자유의 방종이 5.16을 불렀듯이 한국의 민주화는 자유를 파괴하는 자유를 공산세력에 선물함으로써 조국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있다. 자유통일의 關門(관문)을 지나 一流국가로 나아가야 할 시점에서 민주화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국가가 막다른 골목으로 내 몰리면 생존차원의 몸부림이 일어나고, 영웅이 나오든지 피를 흘리게 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아직 어리다. 선동꾼의 밥이 되지 않으려면 5.16을 긍정하고, 위대한 세대에 경의를 표하여야 할 것이다. 고마움을 모르는 나라는 쇠퇴한다.

 

 

삼성전자 뉴스룸
  • 白丁 2022-05-18 오후 6:56:00
    2017년 5월 10일 이래 鶴首苦待 하고 있는 중. 검은 색 별이어서 보이지 않는 진짜 별이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 글쓴이
  • 비밀번호
  • 비밀번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