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형을 집행하라!
‘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사형존치론
김태수 著
332페이지 | 152*225mm | 20,000원 | 2022년 6월 30일 | 979-11-85701-74-5-0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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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소개 |
사형, 선고는 있는데 집행은 없다
“제발 사형 집행 좀 하세요.”
잔인하고 참혹한 살인 범죄 관련 기사가 보도될 때면 어김없이 달리는 댓글로 많은 공감을 받는다.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 한국 정부는 국민의 동의를 받은 적도 없이 사형 집행을 거부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사형제도가 합헌임을 선언해도, 법원이 꾸준히 사형을 선고해도 집행은 없다. ‘사형 집행 명령은 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6개월 이내에 하여야 하며, 사형의 집행은 법무부장관의 명령이 있은 때로부터 5일 이내에 하여야 한다’(형사소송법 465, 466조)는 법조문이 국가에 의해 무시되고 있는 것이다.
201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86.1%가 사형제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반면 사형제가 필요 없다는 응답은 13.2%에 불과했다.대한민국 절대다수가 사형제 존치가 옳다고 믿는데도 확신을 뒷받침해줄 이론적 근거를 찾지 못해, 사형존폐론과 관련한 논쟁만 벌어지면 어김없이 사형폐지론자들이 완승을 거둔다. 그 ‘목소리 큰 소수’에 의해 이 제도가 운영되면서 역대 법무부장관들은 소수의 질타가 두려워 법을 어겨가며 사형수 보호에 급급했다. 대한민국의 모든 규범과 제도를 통틀어, 사형제만큼 절대다수의 여론과 반대로 굴러가는 제도는 없다.
국가에 의한 불법의 지속,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지식인·종교인·법률가들의 위선적 논리가 압도적 국민 여론을 누르고 있는 현실에 분노한 김태수(金兌洙) 변호사는 《사형을 집행하라!》(322쪽, 2만원, 조갑제닷컴)는 책을 냈다.
“사랑, 생명, 인권 같은 좋은 말을 입에 담으면 자신의 내면도 선량해보일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누군가 오물과 쓰레기를 치워줬기 때문에 자신들이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사회적 책임을 분담하는 데도 별 관심이 없다. 우리는 그들의 입에 발린 달콤한 말이, 사실은 ‘나와 내 가족만 피해를 입지 않으면’ 누가 죽어도 상관이 없는 비정한 룰렛 게임임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저자 서문中)
‘목소리 큰 소수’의 위선을 벗긴다!
35년 전 한국 사회에 ‘사형존폐론’이란 화두를 던지고 이후 기자, 검사, 판사, 기자 지망생과 법률학도들의 고전(古典)이 된 《사형수 오휘웅 이야기》의 저자 조갑제(趙甲濟) 기자는 독후기(讀後記)에서 이 책을 이렇게 평가한다.
“김태수 변호사는 사형페지론자들의 최대 약점인 위선성(僞善性)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사형 선고를 받고도 정부의 비겁함으로 연명해가는 살인범들의 범행을 적나라하게 소개하고, 이들을 감싸는 소설가, 종교인들의 순진함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특히 살인자의 인권도 중히 여긴다는 이들이 살인 피해자와 유족들의 고통에는 냉담한 점, 그 위선의 극치를 이렇게 통렬하게 드러낸 책은 일찍이 없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 식자층에서 사형존폐론을 이야기할 때 왜 피살자보다 더한 고통을 안고 가다가 목숨을 끊기도 하는 유족들에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지 탄식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 제기이다. 소설가나 종교인이 살인범의 팬클럽 회원 같은 말과 글을 남기려면 유족들을 한 번이라도 만나 보는 것이 좋을 것인데 그렇게 하면 글과 말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조갑제 기자 독후기中)
조갑제 기자는 이어 “아무리 악독한 방법으로 아무리 많은 사람을 죽여도 사형 집행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범죄자들의 자신감이, 더 많은 살인을 부추기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서 “사형 선고를 해도 사형이 집행되지 않는다는 점을 잘 아는 판사들이 애써 사형 선고를 피하려고 하는 그 마음에서 이미 법은 우습게 되고 있고 이런 심리가 다른 범죄에 대한 응징 의지도 덩달아 약화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조 기자는 독후기에서 《사형을 집행하라!》는 책 제목에 얽힌 비화도 소개하고 있다. 최초 유력했던 안은 ‘나는 사형 집행에 찬성한다!’였는데 의견을 주고 받는 과정에서 ‘사형을 집행하라!’로 바뀌었다고 한다. 책의 본질에 가장 근접한, 정직한 제목임과 동시에 사형존폐론 토론은 이미 의미 없을 정도로 결론이 나있다는 저자의 자신감이 반영됐다고 한다.
“사형존폐론을 공론(空論)의 영역에서 ‘집행할 것이냐 아니냐’의 실천 영역으로 끌어내린 《사형을 집행하라!》를 읽으면 창백한 지식인들이 즐기는 ‘논리 놀음’의 허망함을 실감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살인의 현장과 지긋지긋한 재판, 그리고 처연한 사형장엔 그런 말장난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조갑제 기자 독후기中)
사형 집행 재개론에 불붙일 책
대한민국의 사형제 위헌 여부는 다시 심판대에 올라있다. '악마가 범행을 시켰다'며 부모를 살해, 사형이 선고될 뻔 했던 존속살해범이 2019년 ‘사형은 위헌’이라면서 낸 헌법 소원을 두고 헌법재판소가 7월 공개변론을 열기로 결정한 것이다. 헌재는 앞서 1996년과 2010년 두 차례 사형제 합헌 결정을 냈었다. 1996년에는 7대2였지만 2010년에는 5대4로 의견이 비등해졌다.
이에 대해서도 저자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사형제 폐지는 국가가 범죄자에게 “당신이 아무리 사람을 죽여도 우리는 당신한테 절대로 목숨을 요구하진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국가가 정의의 포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에 다름없다는 것이다.
김태수 변호사의 《사형을 집행하라!》가 던지는 중요한 화두는 피해자의 유족 문제이다. 살아남은 가족의 고통은 길고 깊다. 20여 명을 죽이고도, 사형확정 판결을 받고도, 아직 살아 있는 유영철. “유영철에 의해 큰형이 피살되자 두 동생은 자살하고 형수 조카는 행방을 모른다”는 기사를 소개하면서 김 변호사는 묻는다.
<유영철 같은 살인마를 살려둠으로써 그 희생자들의 가족을 자살하게 만들어 희생자 목록을 계속 늘려가는 이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유족의 가장 큰 고통은 그들이 사랑한 사람은 비참하게 죽었는데 죽인 자들은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떨쳐버릴 수 없는 집착일 것이다. 저자는 “피해자 가족은 뿌듯한 만족을 얻기 위해 사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살인범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정신적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며,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고 자신들의 슬픔에도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점에서 사형 집행은 유족들에 대한 국가의 예의다. 분명한 것은, 교수형에 의한 사형은 대한민국 사형수가 저지른 그 어떤 살인보다도 온화한 방식이다. 이 책이 사형존폐론이 아니라 사형 집행 재개론에 불을 붙이기를 바란다.●
| 저자· 김태수(金兌洙)|
1967년생.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번듯한 감투를 써본 일이 없고, 특별한 수상 경력도 없어서 이력서에 적어 넣을 만한 내용이 거의 없는 평범한 시민으로 살아왔다.
양극단의 주장과 이해가 정면으로 충돌하는 분쟁의 한복판에서 ‘고용된 총잡이’가 아니라 ‘온건한 합리주의자’로서 의뢰인에게 유익하고 正義의 요구에도 어긋나지 않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해 내는 것을 직업적 소명으로 삼고 있다.
명예훼손 소송에서 언론의 자유와 한계에 관한 중요 판례들을 여럿 이끌어 냈으며, 한때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던 ‘이승복 사건’의 진실을 둘러싸고 전개됐던 7년간의 법정 경험에 터잡아 2014년 2월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조갑제닷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사형수와 상대한 몇 차례의 소송, 지구상에서 가장 살인사건 발생률이 높다는 남미의 어느 도시를 방문한 것 등을 계기로 이 책을 쓰게 됐다. 검소한 생활을 통해 저탄소 녹색성장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으며, 나무의 희생이 덧없지 않은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 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 차례 |
서 문 | 절대 다수의 여론과 반대로 굴러가는 사형제도! »» 6
讀後記 | 비겁자와 위선자에게 던진 金兌洙 변호사의 결정적 질문! »» 12
趙甲濟(조갑제닷컴/조갑제TV 대표)
제1장 ● 사형수로부터 날아든 소장(訴狀) »» 22
조선일보 기사
‘예슬·혜진 양 살해사건’의 전모
동아일보의 보도
인권의 위대한 승리, 그리고 후유증
우리에게 남은 일
제2장 ●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 54
사형수 김용제의 수기
공지영의 소설
피해자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사람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인권만 찾는 사람들
진영논리의 늪에 빠진 사람들
제3장 ● 누가 사형 선고를 받는가 »» 114
우리 형법상의 사형 규정
사형수 현황
살인사건 양형기준
울산 자매 피살사건
대법원의 사형 선고 기준
최근의 사형 판결 세 건
제4장 ● 사형장의 풍경 »» 162
신체형에서 생명형으로의 진화
교수형의 연구
실제 사형 집행의 모습
제5장 ● 사형존치론의 장애물 »» 194
철학의 공허함
‘자유의지’라는 허구
환경 결정론이라는 미신
인권의 무책임성
기독교적 관점의 문제점 1
기독교적 관점의 문제점 2
대안(代案) 없는 반대
제6장 ● 사형폐지론의 허구성 »» 242
논의의 전제
사형폐지론의 맹아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에 대한 저항
관점의 전환
고상한 야만인은 없다
형법적 관점에서의 사형폐지론
생명권과 사형제
위험한 선택, 사형폐지론
마치는 글 »» 306
부록 ● 탈리오 법칙을 위한 변명 »» 312
탈리오 법칙에 대한 오해
정의의 패러다임
죄수의 딜레마
당한 만큼 돌려줘라. 모두를 위해서
| 책 속으로 |
민주주의의 원리에 비추어 볼 때, 과거 여러 차례의 여론조사를 통해 우리 국민의 80% 이상이 사형제를 지지하고 있음이 밝혀진 마당에는 이 주제가 더 이상 논쟁의 여지도 없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늘 새롭게 부각되는 이유는 ‘목소리 큰 소수’에 의해 이 제도가 운영되고 있는 현실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감투에 ‘법’이란 글자를 올려놓고 있는 관청의 책임자까지도 소수의 질타가 두려워 대놓고 법을 어겨가며 사형수 보호에 급급하기 때문이다. ─서문 p8
우리는, 도대체 우리가 왜 이런 자와 공존해야 하는지, 도대체 언제까지 동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답변을 미뤄서는 안 된다. ─1장 사형수로부터 날아든 소장(訴狀) p52
사람은 누구나 부조리한 존재지만, 처형 직전까지 하느님을 자신의 방패막이 내지는 공범으로 내세웠던 김용제가 “이 죄인의 영혼이 하느님을 섬기고 대죄를 용서받아 천국에서 영원토록 행복하게 살아갈 것을 믿고 있습니다”라고 뿌듯해하며, 마치 자신이 천국행 직행열차나 예약해 놓은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은 이율배반의 끝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67
하지만 가난한 집에서 혹은 결손가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다 김용제처럼 범죄를 저지르고 살지는 않는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세상을 향해 마구잡이로 폭력을 휘두르지도 않는다. 더 어렵고 힘든 처지에서도, 또한 더 큰 장애를 가지고 있음에도 세상 사람들 대부분 정직하게 살아간다. 가난과 장애를 앞에 내세워 흉악범죄를 변호하려는 이런 시각이야말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차별이며 편견일 가능성이 높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67
참으로 못 말리는 오지랖이다. 처음엔 알암이의 구원을 미끼로 용서를 간곡히 부탁하더니, ‘이미 주님의 사함을 받고 있는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며 알암이 엄마를 나무라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종당에는 알암이 엄마가 오히려 자신의 원망이나 증오에 대해 ‘같은 형제’인 사형수 김도섭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몰고 간다. 김 집사는 알암이 엄마의 아집을 꺾는 데만 정신이 팔려, 질식해 죽어가는 불쌍한 인간을 외면한 채 하느님의 엄숙한 계율만을 강제하고 있다. 용서라는 위대한 명분으로 상처받은 사람을 더욱 깊게 할퀴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해한 원수를 용서해야 마땅할 테지만,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될 수 있는 일은 결코 아니다. …용서를 하는 일은 쉽지도 않고, 주제넘게 제안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용서할 의사가 없거나 용서가 불가능한 사람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아물지 않은 상처에 굵은 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난폭한 행동이 될 수 있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90
정의의 경험은, 공동체가 정한 규범과 절차에 따라 가해자가 저지른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그 잘못에 대해 톱니바퀴처럼 정확하게 책임이 부과될 때 비로소 이루어진다. 불의를 놓아두고 고개를 돌린다고 해서, 쉬쉬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91
허탈하든 말든 그것은 외부의 구경꾼이 참견할 일이 아니다. 피해자 가족은 무슨 뿌듯한 만족을 얻기 위해 사형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살인범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정신적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것이며, 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고 자신들의 슬픔에도 마침표를 찍고 싶은 것이다. 이것이 의미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은 서구의 사형폐지론자들도 인정하고 있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91
우리는 왜 시간의 흐름에 맡겨두지 못할까? 왜 타인의 삶에 끼어들어 작위적인 무언가를 연출하려는 것일까? 아직도 흉악범을 용서하지 못하고 사는 대다수 유족들을 왜 패배자로 만들려고 하는 것일까?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94
사형수는 교도소의 왕이다. 교도소 내에서 발생한 소요나 폭력사태, 기강문란 등의 배후에는 거의 대부분 사형수가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사형수는 다른 재소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는 공포스러운 존재이며, 교도관들에게는 평범한 재소자 100명을 돌보는 것보다 더 어려운 말썽꾸러기다. 예전에 감시카메라가 없던 시절, 감방문에 조그맣게 설치된 감시창으로 사형수의 동정을 살피던 교도관이 사형수가 힘껏 찌른 손가락에 한쪽 눈을 실명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일반 재소자들의 생명과 인권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은 교정공무원이 아니라 사형수나 무기수 같은 통제불능의 중범죄자인 것이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102
유영철 같은 살인마를 살려둠으로써 그 희생자들의 가족을 절망에 빠뜨리거나 자살하게 만들어, 희생자의 목록을 계속해서 늘려 나가는 이 모순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112
어쨌든 사형제는 우리 국민의 절대 다수가 지지하는 제도이다. 민주국가에서는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국민투표는 어려운 수학문제를 푸는 데 필요한 도구가 아니라, 사형제 존폐론 같은 정책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꼭 알맞은 도구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잘났든 못났든, 많이 배웠든 적게 배웠든 다 같이 한 표인 셈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쫄지 말고 당당하게 얘기하라.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다. ─2장 사형폐지론자들의 민낯 p112
현재 집행대기 중인 사형수 58명 가운데 정치범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전원이 다 남자이고, 전부 다 살인범이다. 이들 중 어린아이를 납치·살해하고 금품을 요구해 사형을 선고받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2명 이상을 무참하게 살해한 혐의로 사형이 선고됐다. ─3장 누가 사형 선고를 받는가 p122
사형제도는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발생한 가장 오래된 형벌이나, 형벌의 본질 내지 목적을 범죄인에 대한 교화에 있다고 보는 문명국가의 형벌제도와 어울리지 아니한다는 측면에서 오늘날 법이론상 많은 비판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사형제도를 점차 폐지하는 추세에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나 형벌의 본질 내지 목적은 범죄자에 대한 교화 못지않게 범죄에 대한 응보 내지 죄형의 균형에 있다고 할 것이고, 또한 대다수 국민들의 법의식이 여전히 사형을 자명하고 필연적인 형벌로 받아들이고 있는 이상, 범죄인에 대한 개인의 사적인 복수를 금지함으로써 국가가 형벌권을 독점하는 현대의 문명국가에서도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아주 이기적인 동기에서 잔인하고 참혹하게 빼앗아간 연쇄살인범 등 극악무도한 흉악범에게는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를 수 있도록 사형을 선고하는 것이 피해자 및 그 유족들, 나아가 잠재적 피해자인 국민에 대한 국가의 책무라 할 것이고, 이러한 정의의 실현에 의하여 사회의 질서가 궁극적으로 유지되는 것이다(울산지방법원 2013. 1.25. 선고 2012고합404 판결). ─3장 누가 사형 선고를 받는가 p129
이들 사건에서 대법원이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깨면서 내세운 “형의 양정(量定)이 심히 부당하다고 인정할 현저한 사유”라는 것들을 보면, 마치 고장난 레코드처럼 되풀이되는 틀에 박힌 얘기들뿐이다. 즉 궁핍한 집안에서 태어나 크면서 죽어라고 고생만 했다거나, 아직 나이가 창창하다거나, 동종 전과가 없다거나(솔직히 동종 전과가 주렁주렁 있다면 그게 과연 사람인가?), 범행을 깊게 반성하고 있어서 교화·개선의 가능성이 엿보인다거나 하는 얘기들이다. 변호사들이 형사법정에서 할 말이 궁할 때 꺼내 쓰는 신파조의 얘기들인데, 고맙게도 대법원에서 호응해 주고 있다. ─3장 누가 사형 선고를 받는가 p142
헌법재판소의 위헌제청 심리 때문에 오종근 사건의 재판이 지연돼서 그렇지, 정상적으로 절차가 진행됐다면 이향열 사건이 현재까지 가장 마지막 사형확정 판결이 됐을 것이다. 이향열 사건을 포함해 앞에서 인용한 세 건의 최근 판결은 지난 20년 동안 사형이 확정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보여주는 예가 될 것이다. 범죄자를 많이 만나 본 내 경험에 비추어 볼 때, 또한 최근의 판결에 비추어 볼 때, 작가나 일부 종교계 인사들이 입을 모아 예찬하는 ‘아침 이슬처럼 영롱한’ 영혼을 가진 사형수란 도대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3장 누가 사형 선고를 받는가 p161
분명한 것은 현행 교수형 방식은 지금 대한민국의 사형수가 저지른 그 어떠한 살인보다도 온화한 방식이라는 점이다. 길어야 15분이고, 극히 짧은 시간 내에 정신을 잃는 경우도 많이 있다. 육체의 손상도 거의 없다. 인도주의적 태도는 이해가 되지만 사형수의 입장만 생각해서는 한도 끝도 없다. 적어도 대한민국 사람들의 평균적인 관념에 비추어 볼 때, 교수형은 결코 잔혹한 처형 방법은 아니다. ─4장 사형장의 풍경 p180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인간이 맘껏 놀고먹을 수 있는 에덴동산을 스스로 포기하고 얻은 대가이니,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자유의지는 형법으로 스며들어 ‘책임론’의 중추적 개념이 되었는데, 이를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너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음에도 네 자신의 자유의지로 범죄를 저질렀으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5장 사형존치론의 장애물 p199~200
개인의 일탈을 환경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형폐지론자들의 주장이 겉으로는 인간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폭력과 광기의 역사까지 아울러 고려한다면 결코 경계의 고삐를 풀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생물학적 결정론이든 환경 결정론이든 범죄와 형벌을 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할 순 있어도, 그 어느 것도 범죄와 형벌의 비례를 해결할 수 있는 만능키는 될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5장 사형존치론의 장애물 p204
자식도 없고 친지들과도 연을 끊은 스님이나 신부, 수녀들의 경우에는 별로 와닿지 않는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관계의 씨줄과 날줄로 촘촘하게 얽혀 있는 보통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 피해자가 내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내 형제가 될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보통사람들의 관점으로는, 인권만을 앞세운 대안 없는 비판에는 결코 공감할 수가 없다. 흉악범의 알량한 인권 때문에 개선 가능한 대다수의 선량한 재소자, 교도관, 의사나 간호사 등을 위험에 방치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영구히 가두어둘 수도, 그렇다고 쉽게 풀어줄 수도 없는 이 모순적 상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딱 하나다. 당초 법이 명한 대로 집행하는 방법뿐이다. ─5장 사형존치론의 장애물 p241
사형제 역시 자동차나 TV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만든 발명품이다.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물질적인 것이 됐든, 정신적인 것이 됐든 완벽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쉬운 예로 자동차 때문에 매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음에 이르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예기치 않은 불행 때문에 고통받고 있지만, 누구도 그런 이유로 자동차를 없애자고 하지는 않는다. 자동차의 시내 주행속도를 50km/h 정도로 낮추고 고속도로의 주행속도도 60km/h 정도로 제한한다면, 그리고 속도위반에 대해서 100만 원 정도의 과태료를 매긴다면, 교통사고 사망자를 지금의 10분의 1 이하로 줄일 수 있다. ‘우주보다 더 무거운’ 생명의 가치를 인정한다면 10km/h 정도의 감속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야 맞다. 하지만 그런가? 우리는 인간이 만든 문물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또 일상적으로 그것을 감수하면서도 왜 사형에 대해서만 유독 완벽을 요구하는 것일까? ‘완벽한 재판’이 존재하던 시절, 즉 중세 유럽에서와 같이 신에게 모든 판단을 맡겼던 시절에 사형과 고문이 훨씬 더 빈발했던 사실을 왜 외면하는 것일까? ─6장 사형폐지론의 허구성 p282~283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나라의 사형확정수 중 오판의 가능성이 거론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고, 현재의 기조를 유지하는 한 앞으로도 오판이 문제가 될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는 점이다. ‘오판의 가능성’이라는 관념적 가설에 발목을 잡혀 ‘당신이 무슨 죄를 지었든, 심지어 멕시코의 갱단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수십 명의 젊은 대학생들을 납치해 그들의 목을 베고 암매장을 했더라도, 우리는 당신이 안전하게 천수를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겠소’라고 국가가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다. ─6장 사형폐지론의 허구성 p283~284
사형제는 사회공동체의 붕괴를 막고 개개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제도이다. 사형제를 반문명적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한 것이고, 인류사와 인간의 문화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사형제는 결코 야만적이 아니며,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사회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음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이제 정치범이나 사상범에 대한 사형 선고는 없다. 단순한 살인범에 대해서도 사형은 선고되지 않는다. 그러나 끔찍하고 잔혹한 수법으로 인간을 살해한 자, 특히 자신의 성적 쾌락을 위해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한 극단의 사이코패스에게 사형제가 유일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형제는 타인의 생명을 부정하고 인류사회의 구성원이길 거부한 자에 대한 사회공동체의 형벌이다. 우리가 파리나 모기에게 ‘왜 그렇게 했니?’라고 질책하지 않는 것은 그들 존재가 따라야 할 것은 자연의 법이지 인간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간이길 거부한 자, 공동체의 룰을 존중할 의사가 전혀 없는 자에게 “그들도 인간입니다!”라고 신파조의 넋두리를 펴는 일은 이제 제발 좀 그만하자. 그들에게 법과 절차에 따라 사형을 부과하는 것은 ‘야수로 살았으되 인간으로 죽을 수 있는’ 기회를 베푸는 마지막 은전일 수 있다. ─6장 사형폐지론의 허구성 p297~298
사형의 범위를 축소할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 법에서 사형제도 그 자체를 도려내는 것은 온당치 않을 뿐 아니라,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우리는 어설픈 감성과 추상적인 가설에 사로잡혀 사회 전체를 파멸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몽상주의자들의 교활한 선동·선전을 늘 경계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또한 우리의 현실을 조금이라도 직시한 사람이라면 사형제 폐지를 결코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6장 사형폐지론의 허구성 p304
우리가 사형수의 자살 시도를 방치하지 않고 그들을 구해 정성껏 돌보고 치료하는 것은 그들이 예뻐서가 아니라 온전한 상태로 사형대 위에 올리고자 함이다. 정의의 실현을 그 심판의 대상이 된 자의 자의적 처분에 맡기는 것은 정의의 포기이자 정의에 대한 심각한 기망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칸트가 “비록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하여도 나는 오늘 한 명의 사형수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사형에 처하겠다”는 말을 남겼는지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마치는 글 p308
원칙에 얼마간의 예외를 두는 것과 원칙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특히 그 원칙이라는 것이 정의와 같이 인류 공동체를 지탱해 온 가장 핵심적인 가치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 우리가 사형제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원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법의 다른 이름인 국가가, 스스로 만든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잔혹한 살인자를 보호하는 것도 부족해, 자신의 권력의 원천인 절대다수의 국민 여론을 무시한 채 한 줌도 안 되는 범죄자들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는 사태를 결코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는 글 p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