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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괜찮은 시골 판사 “시골 법원에 있다가 처음으로 서울로 발령을 받았는데 사건들이 도대체 남사스러워요. 재산 가지고 어머니와 자식이, 형제들이 물고 뜯질 않나…" 엄상익(변호사)  |  2022-07-02
오전의 민사법정에서 내가 할 재판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본 광경이다. 어딘가 촌티가 나는 듯한 판사가 재판을 하고 있었다. 여드름 자국이 있는 얼굴 위로 철사발 같은 머리가 치솟아 있었다. 판사가 앞의 양쪽에 앉은 사람들을 내려다 보며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원고석에 앉은 선량해 보이는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웃에 살던 아주머니인 저 분이 경치 좋은 실미도에 있는 자기 땅을 사라고 했어요. 갑자기 사정이 생겨 싸게 판다구요. 아름다운 바닷가에 나도 집을 지어 살 수 있겠구나 하고 그동안 모았던 돈을 털어서 샀죠. 그런데 저 아주머니가 등기를 하면 양도소득세가 많이 나온다면서 서로 믿는 사이인데 명의가 어디 있건 무슨 상관이냐는 거에요. 그러면서 나중에 자기 땅 중 좋은 부분을 마음대로 골라 가지라는 거였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판사가 물었다.
  
  “저 분을 믿었죠. 그 땅이 내 거려니 생각하고 등기를 해달라고 하지 않고 있었는데 훌쩍 십 년이 지난 거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어느 날부터 저 아주머니가 얼음같이 차가워지는 거에요. 땅값이 확 올라서 그런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러면 나한테 받은 돈이라도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가 저 분 양심을 믿었지 게을러서 그런 건 아니었어요. 이렇게 법을 악용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대충 핵심을 파악했다는 표정으로 판사가 피고석에 앉은 변호사와 여자를 향해 말했다.
  
  “이 사건은 법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순박하게 처리해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습니까? 땅을 팔았으면 등기 명의를 넘겨 주시죠.”
  여성과 함께 앉아있던 변호사가 대답했다.
  
  “등기 청구권의 소멸시효 십년이 지나갔습니다. 법대로 판결해 주시죠.”
  “그건 알지만 이 문제를 좋게 처리할 수 없을까요?”
  법대로 하면 교활한 사람이 이기는 불공정한 결과가 됐다.
  
  “안 됩니다. 법대로 판결을 주세요.”
  변호사가 다시 거절했다.
  
  “아니 받은 돈은 돈대로 활용하고 등기는 안해주고 땅값은 더 오르고 아무리 법이라도 이럴 수가 있나? 내가 당사자에게 직접 묻겠습니다.”
  
  판사가 변호사 옆에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단단하게 코치를 받은 듯 경계하는 표정이었다. 한 번만 양심을 외면하면 몇억의 거액이 들어올 수 있는 순간이었다. 판사가 미소를 지으면서 그 여자를 달랬다.
  
  “이 일은 소박한 생각으로 처리하시는 게 어때요? 땅을 파셨으니까 등기를 해주시죠. 땅값이 올랐다면 돈을 조금 더 받거나 땅의 평수를 줄이거나 해서라두요.”
  “저는 등기를 절대 해줄 수 없어요. 왜냐하면 돈을 꾸었지 땅을 판 게 아니니까요.”
  
  그 여자는 땅값이 오르니까 욕심이 일어났던 것 같았다. 나름대로 잔재주를 피고 있었다. 인내하던 젊은 판사의 얼굴에 불쾌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땅을 판게 아니라 돈을 꿨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이자는 얼마고 변제기는 언제였습니까?”
  “이자나 기간을 어떻게 하자는 말은 없었습니다.”
  
  여자는 당황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그냥 한 동네 사는 사이일 뿐인데 거액을 이자도 없이 십년간 사용했단 말이죠? 법정이자만 해도 억대가 넘는데 꾼 돈이라니까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하겠네요. 그 사실은 이 자리에서 자백하시는 거죠?”
  “저는 지금 돈이 없어요. 땅을 팔아야 해요.”
  
  “하여튼 빌린 돈이니까 갚아야 한다는 걸 이 자리에서 인정하신 겁니다. 그렇다면 원금과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판사는 이번에는 원고 측에 앉아 있던 남자를 보고 말했다.
  “원금과 이자를 돌려받으세요. 그 돈을 받지 못하면 경매신청해서 그 땅으로 받도록 하세요.”
  
  판사는 입맛이 쓴 듯 방청석을 향해 이렇게 내뱉었다.
  
  “저는 시골 법원에 있다가 처음으로 서울로 발령을 받았는데 사건들이 도대체가 남사스러워요. 재산을 가지고 어머니와 자식이 그리고 형제들이 물고 뜯질 않나 또 땅을 팔았으면 등기해 줘야지 땅값이 올랐다고 거시기 하고 말이죠.”
  
  법정의 시계가 어느새 점심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판사가 법대 아래의 주임에게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구내식당에 연락해서 된장찌개 삼인분 판사실로 가져다 달라고 해, 우리 같이 먹게.”
  그런대로 공정해 보려는 괜찮은 판사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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