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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車에 경전(經典)을 넣고 다니는 기업 회장 엄상익(변호사)  |  2022-07-03
<성경을 찢어 만든 화투>
  
  대기업의 씨이오인 친구가 있다. 그는 조 단위의 투자를 결정해야 할 때면 엄청난 스트레스라고 했다. 대개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고 밑에서 보고서가 올라오는데 비슷비슷하다고 했다. 최고경영자인 자신은 생명을 건 제비뽑기를 하는 것처럼 간담이 서늘할 때가 많다고 했다.
  
  기업 회장인 그 친구는 유명하다는 점쟁이를 자주 찾아가곤 했다. 그는 다양한 종교를 섭렵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가 무식하고 모자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총명했다.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집안의 금수저 출신이지만 겸손했다. 반장이었던 그는 순간순간의 결정이 반듯했다. 친구지만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그런 그가 점을 좋아하는 걸 보고 나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조금은 내려놓았다고 할까. 종교에 대한 관점도 조금은 넓어졌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항상 차에 경전을 비치하고 다녀. 성경이든 불경이든 어떤 경전이든 상관없어. 겉보기에는 인쇄한 종이지만 경전들에는 밧데리 같이 특수한 에너지가 있어서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어.”
  
  독특한 조언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람이 쓴 책이었다. 그 안에는 신비한 영적 기운이 흐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종교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신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반대로 철저하게 경전이 무시당하는 경우도 봤다. 몇 년 전인지 이제는 기억이 아물아물하다. 진주교도소를 간 적이 있었다. 보안과 사무실 구석에 재소자들로부터 압수한 물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 중에 성경으로 만든 화투가 있었다. 성경을 찢어 여러 겹 포개어 풀로 붙인 후에 그 위에 색연필로 화투패를 그리고 가위로 잘라낸 것이다. 성경이 저렇게 모독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스토엡스키는 시베리아의 수용소에 있을 때 성경 한 권만이 허락됐다. 그는 사 년간 그걸 끼고 다니면서 읽었다. 그리고 성경은 세계 최고의 고전이 된 작품들을 쓴 지혜의 원천이 됐다. 성경을 보면 돼지가 진주를 짓밟는 얘기가 나온다. 돼지가 진주의 빛과 모양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의미와 효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다는 것이다. 성경을 화투로 만든 죄수가 진주를 짓밟는 돼지 같았다.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 나도 그 비슷한 경험을 했다. 밤새 순찰을 돌고 희부윰한 새벽에 부대 막사로 돌아왔을 때였다. 아무런 종교나 믿음이 없을 때였다. 부하인 김 중사가 포켓북 같은 성경 두 권을 나의 철책상 위에 놓으면서 말했다.
  
  “종교단체에서 부대에 성경을 보냈더라구요. 종이가 얇으면서도 질이 좋아요.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시면 괜찮을 거에요.”
  
  담배가루를 신문지 같은 데 말아 피우던 시절이었다. 김 중사가 이미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성경을 만나는 순간이었다. 나는 호기심에 무심코 성경을 펼쳤다. 눈길이 어떤 부분의 활자로 갔다. 하나님이 인간을 여러 종류의 그릇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금그릇 은그릇도 있고 흙그릇도 있다고 했다. 만든 자의 마음이니까 그릇이 불평할 권리가 없다는 내용 같았다. 무심히 본 성경의 한 구절이 나를 자각하게 하고 운명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고시 낭인으로 방황하다가 군인으로 끌려갔을 때였다. 신세를 한탄하고 절망하고 있었다. 찢어서 담배를 말아 피울 책이 아니라 단 위에 모셔놓아야 할 성스런 책이었다.
  
  성경 속 진주를 짓밟은 돼지같이 성경을 짓밟으면 하나님이 혼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성경으로 담배를 말아핀 김 중사가 이상하게 죽어버렸다. 타고 가던 지프가 갑자기 길가의 콘크리트 구조물을 박아 그가 그 자리에서 즉사한 것이다. 성경을 찢어 화투로 만들어 놀던 그 죄수들의 운명은 어떤지 궁금하다.
  
  도스토엡스키의 작품을 보면 러시아 여인들은 아들이 전쟁에 끌려갈 때 옷 속에 몰래 복음서 한 장을 숨기고 꿰맨다고 했다. 동양의 부적 비슷한 효험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원로 탤런트 정영숙씨한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저는 무거우니까 성경을 한 장 한 장 찢어서 빽에 넣어 가지고 다녀요. 커피숍에서 누구를 기다리거나 차를 타고 갈 때 아니면 짜투리 시간이 날 때 그 성경을 계속 반복해서 읽어요. 그렇게 하면 성경의 에너지를 받고 깊은 영혼 속에서 힘이 솟아 나오는 것 같아요. 필라멘트에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녀는 자기가 체험한 걸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잔잔한 감동이 내 마음으로 물결같이 다가왔다. 나도 그렇게 따라서 해 보았다. 나는 성경은 신비한 책이라고 믿는다. 그 책을 여는 순간 그 분의 영(靈)이 내게로 흘러들어온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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