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신문부터 정직했으면 좋겠다. ‘신문은 사회의 목탁’이란 말처럼 신문이 목탁인 제자리로 돌아간다면 마침내 정직이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질 것이다.
경남신문은 한국 최초의 지방지이다. 이 경남신문이 이름값을 할 요량도 없는지 툭하면 거짓말을 해댄다. 어제는 또 이렇게 보도했다.《117년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성매매 집결지 내 4평(13.2㎡) 남짓한 방에서 인권 유린을 당했던 여성들. 폐쇄를 앞둔 집결지는 공원으로 재조성될 계획이지만 계획안에는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할 공간은 단 1평(3.3㎡)도 없었다》이 긴 문장에서 요지는 인권 유린이다. 이 문장은 거짓말이다. 그래서 강개하여 이 글을 쓴다.
마산에서 유명했던 마산 신포동(서성동) 사창가가, 사창가 단위로서 사라진 것은 노무현 대통령 때다. 저 사창가가 있던 곳이 마산에서 지리적 위치가 가장 낮은 곳이어서 산비탈이나 고지대에서 살던 사람들은 그 위치를 부러워하던 지역이었다. 사창가와 딱 붙어서 MBC 마산방송국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시외버스 주차장이 있었다. 그리고 길만 건너면 마산 3·15의거 기념탑과 동상이 서 있다. 아파트가 사창가와 골목 하나를 사이로 해서 서 있기도 한다. 여기를 깃점으로 마산은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뉜다. 신마산은 구한말 일본인의 거주지이고 구마산은 조선인의 거주지였다.
신포동(서성동) 사창가에서 살던 여성들이 신문의 주장대로 100년 전에는 인권 유린을 당했는가는 내 모르지만 우리 세대에서는 전혀 그런 일이 없었다. 이상하게 우리네는 사창가라고 말하면 인권 유린과 엮어버리는 버릇이 있다. 위안부라고 하면 일본군에 강제로 붙잡혀 간 것으로 연상하듯이 말이다. 어디서 연유된 기억인가는 모르지만 정직한 기억이 아니다. 사람의 기억은 왜곡되고 자기 편리대로 변형된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들은 자신의 기억을 다 믿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하물며 사회적 기억이겠는가? 특정 정당이 만들어 주입한 정책적 기억이겠는가?
신포동 사창가 바로 앞에 파출소가 있었는데 인권 유린이 신고된 적은 없었다. 사창가 바로 옆이 문화방송국이었고 나중에는 경남신문사가 되었지만 언론이 인권 유린을 보도한 적도 없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인권 유린을 당했던 여성들”이라고 거짓말하여 그들을 더욱 비참한 인간으로 묘사해놓고서 자기는 박애주의자로 높아지려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포동 사창가를 폐쇄하자는 주장은 노무현의 윤락방지법(?)과 함께 나왔고, 정권의 개들이 폐쇄 운동에 앞장섰다. 그 일에 종사하던 여성들이 사창가 폐지 반대에 정말로 맹렬히 싸웠다. 평소에는 맨얼굴로 밖에 나오지도 못하던 그들이 마스크도 쓰지 않은 채 시가 행진까지도 했다. “우리를 나가라고 하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며 울부짖던 그녀들의 얼굴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인권 유린을 당하는 사람이 저렇게 하겠나? 가진 자의 이념놀이에 밑바닥 인생들이 돌을 맞은 것이다. 물론 어쩌다가 인권 유린을 당한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권 유린은 학교에서도. 법원에서도. 절집에서도 생긴다. 이쯤에서 정직해지자. 인권 유린을 막으려 사창가를 폐쇄한 것이 아니라 노무현의 어설픈 이념을 위해 폐쇄한 것이다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이 한창 번성할 때, 낮에는 수출자유지역에서 여공으로 일하고, 밤에는 서성동 사창가에서 근무하는 이가 많았던 것을 알 만한 마산 토박이들은 다 안다. 이런 자발적 노동에 무슨 인권 유린이 있겠는가?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위세를 떨침에 따라 독버섯도 따라서 생겼다. 수출자유지역에서 근무하는 일본인이 한국 여성을 상대로 한 성적 문란이 보도된 적이 있었다. 어떤 한국 여성이 그들을 상대했겠나? 바로 저분들이다. 일본은 패전 후에 있었던 그녀들의 이바지를 가만히 덮어두고 속으로 감사해 한다. 우리는 그녀들에게 인권 유린 막기란 미명으로 찬바람 부는 길거리에 빈손으로 내쫓아 버렸다. 이야말로 인권 유린이다.
지나간 것은 슬픈 일은 더욱 슬퍼지고 고운 일은 더욱 고와진다. 세월이 덧칠을 하기도 하고 윤색하기도 하는 것이다. 신포동 사창가가 겨우 명맥만 남았을 뿐이지 제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지는 십년도 더 넘었다. 그리고 이젠 빈터로만 덩그라니 남았다. 인권 유린이 있었다면 그때는 뭐하다가 이미 전설이 된 지금에 와서 인권 유린 운운하는가. 30대 기자라면 서성동 사창가가 불야성을 이루던 시절엔 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40대 기자라면 여남은 살이 될락말락 했을 것인데 그 나이에 거기에 가서 인권 유린을 보기라도 했나?
신문은 “(인권 유린을 당한)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할 공간은 단 한 평도 없었다”고 썼다 무슨 말을 하고자 함인지 이해는 하지만 그들을 기록할 공간이 왜 있어야 하나? 그들을 영원한 창녀로 기록해 놓자는 말인가? 그들을 왜 기억해야 하나? 그들을 보듬어 줄 기억이 아니라 천대할 기록이 될까 두렵다. 설혹 동족이 동족을 유린했더라도 그것을 기록해 둔다면 우리 인권을 유린했던 일본을 비난할 수 있겠나. 신문이 실존했던 世事에 대해서도 거짓말을 하는데 개인의 아픔에는 오죽 거짓말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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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사진에 이런 캡션이 달려 있다. '8일 오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서성동 성매매 집결지 내 철거공사가 끝난 부지에 울타리가 쳐져 있다. 이곳은 임시공영주차장으로 이용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