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수」의 제보-金洛中수사-황인오 체포>
―지금까지의 말씀으로는 金洛中 사건은 「은하수」의 제보로 인해 밝혀진 것인데, 「은하수」가 李善實에 대해서도 제보한 것은 아니지요. 그렇다면 金洛中 간첩사건 수사가 李善實로 확대되는 매개 역할은 어떻게 된 겁니까.
『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92년 金洛中에 대한 수사가 공개적으로 이뤄졌습니다. 그런데 金洛中의 진술에는 북한으로부터 민중당에 들어가 핵심세력을 포섭하라는 난수지령을 90년 10월에 받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민중당 공동대표에 취임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91년 12월 초까지 북한으로부터 3회에 걸쳐 공작금 21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14대 총선시 강원 태백, 정선 지역 민중당 후보 정운환 등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래서 정운환에 대한 선거자금 지원자들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있나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黃仁五라는 자가 財力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운환에게 선거자금을 지원한 사실이 발견되었습니다. 결국 정운환은 黃仁五와 金洛中 양쪽으로부터 돈을 받은 겁니다. 북한이 정운환을 당선시키기 위해 무척 노력한 셈이지요. 우리는 정운환의 구좌를 내사했습니다. 해 보니까 黃仁五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黃仁五에게 별도의 감시망을 붙였습니다.
黃仁五를 감시하는 과정에서 黃仁五는 의정부쪽 도봉산을 자주 오르내린다는 「특이 동향」이 보고된 겁니다. 도봉산 골짜기의 독립가옥에 자주 들락거리는 黃仁五를 추적했습니다. 그러다가 黃仁五를 잡은 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그날은 미행조가 黃仁五를 놓쳐버린 겁니다. 제가 평소에 수사관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미행을 하다가 놓치는 경우가 있더라도 절대 들키지는 말라는 겁니다. 역인지(逆認知)를 조심해서입니다. 그날도 黃仁五를 의정부 도봉산 기슭에서 놓치고는 평소에 잘 간다는 북부경찰서 앞 식당에서 수사관이 매복을 한 겁니다. 그러다가 무전을 치고 돌아오다 식당에 들른 黃仁五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黃仁五를 잡은 수사관은 黃의 얼굴로 모르고 사진만 들고서 따라다녔습니다만 엄청난 개가를 올리게 된 겁니다. 개가를 올렸다는 건 무슨 얘기냐 하면 현장에서 잡은 黃의 호주머니에서 난수표가 나온 겁니다. 난수표뿐만 아니라 해독 책자까지 갖고 있었으니 대단한 개가였지요. 黃仁五를 심문하는데, 이 양반은 골수이면서도 상당히 솔직담백한 면이 있었습니다. 수사에 협조를 잘 해주었지요. 그러면서 黃仁五는 자신은 入北간첩이며, 북한에 간 사실을 털어놓았습니다. 북한에 가니까 자신을 대동 월북시킨 할머니 간첩이 엄청난 高官이란 사실 등을 알 수 있었고, 거기서 黃仁五는 우리가 찾아낸 사진에서 李善實을 가려내 주었던 겁니다. 어마어마한 간첩 사건이었지요』
<전설적인 여간첩 李善實의 본명은 李花仙>
―그러니까 「은하수」가 제보한 정보로 金洛中을 체포하게 됐고, 金洛中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黃仁五를 발견한 것이지요. 그리고 黃仁五를 통해서 李善實이란 이상한 여자를 발견하게 됐고, 李善實을 추적해보니 제주도 가파도 출신의 이화선(李花仙)이란 여자로서 지금 한국 나이로 80세 된 사람이 등장하는 것이고요. 李花仙이란 여자는 경력이 너무 화려해서 대강만 정리해 본다면 이렇습니다. 가파도는 현대사의 그늘진 부분에 속하는데, 4·3사건으로 얼룩진 곳입니다만, 거기서 李花仙은 金씨란 남자와 결혼을 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했지요.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 직후 부산 영도로 돌아와 살게 됩니다. 부산 영도에서 살 그 당시에 이미 북한에서 남파된 간첩에 포섭돼 공산주의자로 바뀌었지요. 그리고 자신을 공산주의자로 만들어 준 그 간첩은 훗날 남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을 당합니다.
거기서 복수심을 품은 李花仙은 50년 4월 월북했고, 50년 6월 인민군 복장을 하고 다시 서울에 나타납니다. 그리고 66년과 73년에 남파됩니다. 그리고 74년에는 일본에 나타났는데 이때는 북송된 신순녀라는 실재한 여자로 위장하고, 78년 한국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80년 영구귀국을 해서 신순녀의 호적을 자신의 것으로 바꿔치기합니다. 그녀는 80년부터 신순녀 명의의 합법적인 여권을 가지고 일본을 왕래하면서 활동하다가 90년 10월17일 북한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이후 북한의 공식석상에 등장하고 있지만 아직 얼굴은 비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李善實은 세계 첩보사상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만….
『최고위급, 최고령의 여자 스파이입니다. 黃仁五의 증언을 빌리면, 잠수정을 타기 위해서 2~3㎞ 되는 서해안 갯벌을 걸어가야 할 때, 74세 된 李善實은 당당하게 혼자 힘으로 걸어갔다는 겁니다. 무척 건강한 여자였습니다. 처음에는 李善實의 실체를 안기부에서도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심지어 부장도 「정말 그런 여자가 있을까」했을 정도니까요. 암호해독국에서 과거에 기록된 난수들을 모두 해독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李善實의 실체가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李善實의 나이는 제가 알고 있는 나이보다 세 살이 많은 76세로 밝혀졌습니다(1992년 당시). 해독국 요원들은 기가 막혔지요. 왜냐면 십수년 전부터 李善實의 생일이 되면 김일성의 축하 메시지가 난수로 날아온 겁니다. 거기서 李善實의 나이가 76세인 것을 발견했습니다』
<간첩들의 희한한 兩非論>
―李善實-金洛中 간첩사건이 벌써 2년 전입니다. 지금 와서 이 사건을 들여다 보면 시대의 흐름이랄까 역사의 변절을 느낄 수 있어 감회가 상당히 깊은데요, 金洛中은 민중당의 선거자금 명목으로 북한으로부터 110만 달러를 받았습니다. 당시 화폐가치로는 약 7억원이 넘는 액수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선거판에서 그가 사용한 돈은 약 7천만 원 정도입니다. 10분의 1 정도 쓴 것인데 왜 이렇게 적게 썼을까요?
『한때 저는 金洛中이 돈에 욕심이 있어 별도로 챙겨두려 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우선 북한은 공작금을 줄 때 철저한 검증을 합니다. 별도의 검열 간첩이 와서 반드시 확인합니다. 직파간첩이 내려와 돈을 건네주고 간 사실부터 시작해서 그 돈의 용도 등을 나중에 내려 온 검열 간첩이 확인하는 겁니다. 만약 거기에 하자나 오류가 생기면 총살당하거나 축출당합니다. 그런데 그때 민중당의 현실을 金洛中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즉, 그러한 돈을 모두 퍼부어도 당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는 판단 하에 돈을 별도로 모아 놓았던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데 북한의 공작금 중 사용한 7900만 원을 보면 18명의 후보에게 최고 1인당 2000만 원을 주었습니다. 장기표, 이우재(구로을구), 송기평씨 등이 받았습니다. 그리고 활동비 명목으로 4300만 원을 지출했는데 정태윤(鄭泰允), 金文洙 등이 안기부 수사에서 수령자로 밝혀졌습니다. 북한으로부터 돈을 받아 정치활동을 했던 세 사람 이우재(李佑宰), 鄭泰允, 金文洙씨가 현재는 민자당 지구장 위원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여당에 갈 때는 鄭 차장께서 기획판단국장을 하고 계셔서 세 분에 대한 이념적 검토도 있었을 것이라고 봅니다만….
『그 분들이 정치자금조로 받았을 때는 전혀 모르고 받았다는 것이 판명되었습니다. 단지 이 분들의 이념이 진보적이라는 것 이외는 사상성의 검증이 충분히 되었을 것입니다』
―金洛中씨가 우리나라에서는 통일 운동가로서 저명해졌고 본인의 통일 열정을 못 이겨 임진강을 넘나 들면서 분단의 모순을 깨보려는 영웅적인 노력을 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북한에서도 옥살이했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제대로 정신 박힌 사람도 일단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북한에 포섭된 간첩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언론매체를 통해 金洛中이 발표한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아주 희한한 측면이 발견됩니다. 金洛中은 북한을 비판했습니다. 물론 남한도 비판했지요. 그래서 兩非論 적인 자세를 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대한 비판은 아주 형식적인 수준에서의 비판에 불과했고, 본질적으로는 남한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金洛中과 같이 묘한 兩非論을 펴는 사람들은 감별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만….
『그런 사례를 하나 들어드리지요. 예를 들어 반정부 투쟁에 앞장서고 체제를 비판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완전히 침묵 속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부에 대해 그토록 신랄하게 욕을 하던 사람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저 사람이 왜 저런가. 의식이 바뀌었나 하고 다시 보게 될 정도입니다. 그런 경우는 99%가 북한 공작 조직에 포섭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우리는 판단합니다. 예외도 있지만 노골적으로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사람이 오히려 순수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갑자기 조용해졌다면 그의 주위에 선이 닿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학자나 교수를 포섭하는 경우에는 그들에게 재량권을 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사람들이 남한만 비판하게 되면 공안당국이 가만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북한을 비판할 여지를 주는 겁니다. 때로는 스스로 「나는 의식이 바뀌었다. 새로 태어났다」고 공언하며 나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고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간첩이 주도했던 國保法 철폐운동>
―金洛中은 간첩으로 포섭된 이후 소위 진보적인 승려들과 함께 1992년 4월 국보법(國保法) 철폐를 위한 공동대표로 나섰습니다. 간첩이 주도한 國保法 철폐운동인 셈인데, 북한이 현재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이 안기부법 철폐와 국보법 철폐입니다. 실제로 남한 사회에도 국가보안법을 없애고 형법으로 대치하면 되고 안기부를 폐지하고 수사기능을 검찰에 넘겨주면 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알다시피 북한은 국보법과 안기부를 가장 큰 對南전략의 걸림돌이라고 봅니다. 간첩을 잡아 수사하다가 가장 무서웠던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백이면 백이 전부 안기부를 가장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옛날에는 한 간첩이 남파되어 남산을 올라갔는데 여기저기 안기부 요원들이 깔려서 포위망을 좁히려는 걸 보고 질겁을 해서 자수한 적도 있습니다. 그가 본 안기부 요원이란 선글라스를 쓴 유람객을 두고 착각한 겁니다. 그리고 안기부의 철폐 문제는 제가 안기부에 몸을 담았기 때문에 강변한다고도 여길지 모르겠습니다만, 말씀드린 대로 과거 안기부의 불행한 역사만 생각하고 안기부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 이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차제에 한 가지 더 말씀드릴 것은 현재 안기부의 수사권은 종이호랑이보다 훨씬 못한 상태가 돼 있습니다. 특히 국가보안법의 핵심조문인 제7조를 안기부로부터 박탈해버렸습니다. 이런 상태로 국가의 안전을 기획하라는 것은 무기도 안주고 전쟁터로 내모는 것과 같습니다』
<『안기부의 對共수사능력 저하는 與野의 합작품』>
―국가보안법 제7조는 「反국가단체의 고무 찬양, 이적단체 구성 및 이적단체 표현물을 작성」이 명기돼 있습니다만, 이것은 워낙 차원이 낮은 부분이어서 간첩사건과도 거리가 멀기 때문에 차라리 검찰과 경찰에 넘긴 것이라고 보는데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간첩수사에서는 처음부터 간첩으로 규명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간첩들은 처음에는 모호한 단체를 구성하고 선전 선동을 합니다. 그들이 처음부터 反국가단체를 구성하지는 않는 겁니다. 이것을 실마리로 그들을 연행하거나 구속하고 나서야 비로소 간첩으로 밝혀집니다. 간첩으로 밝혀지면 비로소 反국가단체가 어떻게 구성되어졌는지 밝혀지게 되고, 그들의 이적표현이 어떤 의미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환하게 알 수 있는 겁니다. 순서가 다르지요.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알 수 있고, 법을 약간만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순서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지적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무책임하게 폐지한 것은 현재 안기부의 대공수사력을 침체시킨 주된 요인입니다』
―폐지는 아니지요. 안기부가 수사를 하지 않고 대신 검찰과 경찰에서 한다는 것이지요.
『안기부가 수사를 안하면 누가 합니까? 지금 한 건이라도 간첩사건이 제대로 수사가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어려운 시련을 겪거나, 결정적으로 북한이 우리를 위협하고 포위하는 중요사태가 발생되면 그때 비로소 국민이나 역사 앞에 책임을 느끼게 되겠지요. 그러나 그때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국가보안법 제7조는 안기부에 의해 남용되어 피해를 본 국민들이 많기 때문에 안기부 업무에서 박탈된 것이라고 보는데요.
『그렇게들 주장하지만 구체적 케이스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 정치인들이 不告知罪라든지 고무찬양이라든지 이적단체구성 등과 같은 사건에 스스로 얽혀든 것이지 일반인들에게까지 적용되어 수사한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히 정치권에서 일어난 반발로 보는 것이 옳은 시각입니다. 文益煥 사건부터 金洛中 사건에 이르기까지 현역 정치인들이 연루되지 않은 적이 없지요. 그러나 그 과정에서 무고한 시민이 연루된 적이 있습니까? 정치인들이 지역구의 표를 의식해서 이 조항을 삭제토록 한 겁니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안기부가 죄도 없는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가 없습니다. 5共이나 3共 시절에도 법원의 판결에 승복했습니다. 게다가 三審을 거치는 데 조작수사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 안기부법 개정 협상은 1993년 말에 이뤄졌는데, 그렇다면 그 비난은 야당이 아니라 여당에게 돌려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그 협상에 대해서는 여야가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金大中대표 입법보조원에 대한 수사는 정치적 고려로 소홀해졌다>
―李善實 사건을 수사하면서 金大中씨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앞에도 설명하셨던 세 번에 걸친 암호지령문에서 金大中씨가 언급되었고, 또 하나는 金大中씨의 입법보조원 이근희(李根熙)가 국방관계 자료를 간첩 黃仁五에게 넘겨주고 黃仁五가 재일교포 조직망에게 주어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李善實에게 내려온 지령문 속에서 「잘 받았다」는 말이 있어 수사에 착수해 밝혀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大中씨의 측근에서는 이 사건은 조작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민주당의 부대변인이 李善實로부터 자금을 받았다고 해서 구속되었습니다. 이 세 건이 모두 金大中씨에게 연결되는 사건이었는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金大中씨와 또 만났구나」하는 난감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까.
『李善實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만, 제가 대공수사국장으로 4년 10개월을 근무했습니다. 안기부 대공수사국장으로는 최장기입니다. 자랑이 아니라 오래 했기 때문에 그만큼 전문가라고 봐 주십시오. 게다가 대공수사만 10년입니다. 저는 언젠가는 대공수사를 그만 둘 것을 알고 있었고, 언제나 하느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하느님 제가 대공수사국장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모든 국민이 북한의 대남공작이 얼마나 집요하고 무서운 것을 알게 하시도록 경천동지(驚天動地)할 간첩사건 하나를 제게 맡게 하시고 이 수사국장 자리를 물러나게 해 주십시오」 그 기도를 하느님이 들어주신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을 수사해 나가자 현찰로 100만 달러가 나오고, 무성권총, 난수표, 수류탄 등 모든 간첩장비와 메모리 송수신기 등이 속속 발굴되어 해방 이후 최대 간첩사건을 캐게 된 겁니다. 저는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어떠한 職에 있건 간에 성역을 두지 않고 조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어느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지휘부의 회의에도 일부러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사건과 함께 죽겠다는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金大中씨의 대통령 선거에 미칠 영향 같은 정치적 고려는 일체 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직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 대공수사국장으로서 역사에 남는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생각하며 수사에 임했던 겁니다. 다만 부딪혀가는 과정에서 정치적인 고뇌와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이 생기고 시작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로 정통적인 수사 과정이었다면 金大中씨의 비서인 李根熙에 대해서는 모든 수색을 시의적절하게 빨리 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상대는 모든 관련 문건들을 다 숨겨버려 완벽한 수사에 대한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그런 정치적 고려가 불가피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