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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칼럼
아, 경상도여, 경상도여! 무학산(회원)  |  2023-05-31

  
  
  
  어젯밤에 있었던 일이다 그 전의 이야기부터 하겠다 60년대에 일본에 사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한국에 왔다 그때만 해도 귀하던 카메라를 나에게 선물했다 그때는 3C가 마구 횡행하던 시절이었으니 동네 처녀들이 나와 같이 놀러 가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곤 했다
  
  
  3C란 곧 세 가지 중에 하나라도 있으면 처녀를 손쉽게 꼬실 수 있다는 은어였다 곧 cash. car. camera다 이 때에 카메라를 가졌으니, 안 그래도 우리 동네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새끼는 나밖에 없었는데 카메라까지 있으니 그 인기를 알만하지 않은가.
  
  
  그 흔적을 어제밤에도 만났다 조선일보에도 났지만 요사이 아사히 생맥주를 예약하고서도 언제 살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 동네 편의점 아저씨가 자기도 못 마셔봤다고 투덜대면서 예약도 하지 않은 나에게 네 캔을 가져다 주었다 그것을 단숨에 마시고 더 먹고 싶어서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데 사촌 형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림(도련님의 경상도 사투리). 형님이 대림 안 온다고 짜증을 내쌓는데 와 안 오요?” 내가 답했다 “형수. 내가 가진 것은 시간뿐이니 만날 술에 쩔어 사요. 술에 취해서 어떻게 형님을 뵈러 가것오?” “그래도 오소. 형님이 저래 쌓는데. 담가 논 포도주도 있고” 옳다구나 하고 형님집에 갔다 포도주를 마시다가 성에 안 차서 형님과 형수를 모시고 근처의 횟집에 갔다
  들어가자마자 늙수구레한 주인인 성 싶은 여자가 성을 내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이보소. 할망구. 나는 이 가게에 처음 왔고 우리 형님과 형수는 술도 못 마시니 올 일도 없는 사람이요 근데 와 우리한테 성을 내요?” 그러자 그 여자의 두 눈에 눈물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를 모르겠오?” “내가 할마시를 우째 아요?” “그 성깔은 여전하오” “할마시가 나를 언제 봤다고 그라요?” 그가 말했다 “교방동 살았죠?” “마산 상고를 다녔죠?” 내가 “ 어” 하고 있는데 그가 또 말했다 “나는 ‘기름 장사 아지매’ 딸이요” 그 말을 들으니 하늘이 노래지는데 그 하늘이 나를 고등학교 시절로 되돌려 앉혔다
  
  근동(近洞)에서 소문난 ‘욕쟁이 기름장사 아지매’ 그의 딸이 나와 동갑이었는데 공장에 다녔다 그녀는 작업복을 입고 나는 교복을 입은 이 어쭙잖은 계급 차이로 그 처녀와 한 동네에 살면서도 나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었다 6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서로 늙어서야 처음으로 말을 섞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그녀는 경상도 특유의 까닭없이 성을 내면서였고, 나 역시 그 특유의 고성(高聲)으로 말하는 채로. 아...경상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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