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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주세요" 엄상익(변호사)  |  2024-04-27
살인을 저지른 영화감독을 변호한 적이 있다. 그를 보면서 인간이 이렇게까지 파멸할 수가 있나 하고 경악했다.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이었던 그는 연극영화과를 졸업힌 속칭 끼 있는 감독이었다. 그가 만들어 준 광고카피가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 그의 꿈은 천만 관객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다.
  
  잘나가던 그에게 갑자기 먹구름이 끼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망상증세가 생기고 그는 조현병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척추협착증이 겹쳐왔다. 그는 아내에 의해 격리된 채 어두운 방에서 하루 종일 꼼짝 못하고 갇혀 살았다. 아내는 그의 정신병을 용납하지 않았다. 남편은 레드 카펫을 밟을 최고의 영화감독이 되어야 할 사람이었다. 어느 날 새벽 그의 아내가 목 졸려 죽은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 누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썰물같이 그에게서 모든 게 빠져나가고 그는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들판에 발가벗고 홀로 서 있는 나무 신세가 됐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런 그의 옆에 딱 한 사람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우정이 궁금해서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되었느냐고 물었었다.
  
  “고등학교 시절 저는 그 친구의 집을 오가면서 그 집에서 많은 날을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의 어머니는 친구들이 그 집에 가면 ‘우리 자식들’이라고 하면서 사랑해 주셨죠. 그 친구의 집에서 잠을 잔 친구들이 학교에 갈 때도 친구의 어머니는 정성들여 도시락을 싸주시곤 하셨어요. 특히 저에게는 나중에 외로운 우리 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간절히 부탁을 하시곤 했죠. 친구가 병들고 실패하고 저렇게 살인범이 되어 감옥에 있으니까 돌아가신 친구의 어머니가 내게 간절히 부탁하시던 말씀이 떠오르네요.”
  
  그 어머니의 영혼이 하늘에서 감옥에 있는 병든 아들을 보면서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어머니의 영혼은 내게도 부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변호했었다. 피해자의 아버지와 그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몰매를 맞을 뻔하기도 했다. 어머니란 존재는 아들을 위해서는 죽어도 죽지 못하는 것 같다. 아들을 지키는 수호신이 된다고 할까.
  
  고등학교 동기의 변호를 한 적이 있다. 대학교수인 그는 지하철에서 무심히 출입문의 유리창에 비친 젊은 여성의 사진을 찍다가 불법 촬영을 한 파렴치범으로 기소까지 됐었다. 그와 함께 재판을 받으러 갈 때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어머니가 어려서부터 나를 위해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는지 몰라. 어머니의 기도로 내가 이만큼이나 됐는데 말이야. 어머니의 쌓인 기도가 땅에 그냥 떨어지지 않으리라고 믿어.”
  
  어머니의 기도는 그의 영혼을 떠받치는 기둥이었다. 부자가 된 친구가 있다. 그는 어머니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어려서 우리 집도 물 지게를 지고 올라가는 가난을 겪은 적이 있어. 생선 한 마리를 간장에 졸여서 가족들이 반찬으로 먹곤 했지. 아버지와 우리들이 생선토막을 먹고 어머니는 항상 맨 밑의 무만 먹었어. 그런 게 우리 시절 엄마 고생하고 희생하는 엄마 아니었나? 그런 우리 엄마가 이제 아흔 살이 되고 몸이 아파. 나는 정원이 있는 넓은 집에 엄마를 모셨어. 가정부를 두고 운전기사를 붙였지. 그리고 간병인을 고용했어. 병원에도 최고의 특실로 모셔. 돈을 많이 번 보람이 뭐겠어. 나를 이렇게 부자가 되게 한 게 엄마 아니야?”
  
  그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시절 내게 잘해주면서 우리 아들의 좋은 친구가 되어 달라고 부탁을 하곤 했다.
  
  나의 어머니는 어땠나? 중학교 시절부터 친구들이 찾아오고 집에서 많이 자고 갔다. 가난한 어머니는 김치국을 끓이고 밥을 해 주면서 친구들에게 잘해 주었다. 때로는 친구들이 찾아와 몰래 담배를 펴도 모른 척했다. 어머니는 둔하고 사회성이 부족한 나를 대신해서 내 친구들에게 아들을 부탁했다. 어머니의 임종 무렵이었다. 어머니는 곧 자신이 무의식의 암흑 속으로 깊이 들어갈 걸 알고 아들인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옆에서 죽 지켜보니까 너에게 진국으로 대하는 친구가 두 명 있는 것 같더라. 그 애들은 품성도 착하고 정(情)도 있는 것 같았어. 내가 죽어도 그 친구들과는 끝까지 형제같이 지내라.”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도 내가 걱정이 되어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그 친구들은 나이 칠십 고개를 넘은 지금까지 내게 정이 넘친다. 오늘이 어머니의 기일이다. 제사 대신 이 글 향기를 어머니께 올린다. 어머니 고마웠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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