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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 '국민 눈높이'에 매달리면 무학산(회원)  |  2024-07-25
우리나라 정치인치고 '국민의 눈높이'란 말을 애용하지 않는 이가 없다. 게다가 저 말을 한동훈이 자주 썼고, 또 그가 당대표가 되어선지 요사이 부쩍 국민의 눈높이란 말이 회자되고 있다. ‘국민의 눈높이’란 말은 좌파가 국민을 혹하게 하려 만든 말이라 들었다. 그들은 '사람이 먼저다'는 말도 애용하며 국민을 속였다. 이 말도 본래 북한의 주체사상에서 따온 말이라고 들었다. 정치인이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정치를 하면 나라가 나라로 존재하겠나?
  
  국민의 눈높이가 무엇이며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것은 여론이고, 여론은 주로 언론이 만들거나 여론조사 업체가 생산한 것이다. 옳은 생산도 있고 허위 생산도 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더구나 국민의 눈높이라는 것은 변화무쌍해서 장마 때의 물 같이 갈래 없이 흐른다. 또 국민의 눈높이가 어느 수준인지 계량하기 어렵다. 혹 정확하게 계량했다 하더라도 국민의 눈높이에 따른 정치를 하는 것은 위험하기가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국민의 눈높이란 것은 뿌리 없이 파도에 이리저리 떠다니는 나뭇잎과 같다. 대통령이나 정치인이 중심을 딱 잡고 정치를 해야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하면 어떻게 국태민안(國泰民安)과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룰 것인가?
  
  전쟁이 필요할 때 전쟁을 결심하는 사람은 대통령이다. 그러나 전쟁을 원하는 국민이 몇이나 되겠나. 이때도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전쟁도 하지 말아야 하게 된다. 정치를 하되 국민의 뜻을 헤아려서 하면 되지 국민의 눈높이에까지 맞추어 정치를 할 게 뭐 있나? 그렇게 했던 나라도 없고 그래서야 남아날 나라도 없다. 이런데도 우리는 국민의 눈높이를 말하는 정치인일수록 박수를 더 많이 쳐준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하향 평준화를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하향 평준화하는 것이 진리인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학생들의 문해력이 문제가 되니 신문사와 문필가는 쉬운 말을 찾아 쓰려 안 해도 되는 수고를 한다. 조선일보에《'금일'을 '금요일'로 착각한 서울대생》이란 기사도 있었고,《‘심심한’ 사과를 ‘지루한’ 사과로 이해하는 아이들 어쩌나》라는 기사도 있었다. 그래서 저런 말을 피해서 쓴다고 했다. 모자라는 사람은 보태주고, 낮은 사람은 올려주고, 뒤처진 사람은 끌어주어야 그들도 발전한다. 그래서 나라도 발전한다. 그러나 우리는 도리어 그런 사람들과 수준을 맞추기 위해 ‘앎’을 버리고 ‘모름’을 택한 지경이다. ‘국민의 눈높이’를 핑계로 ‘하향 평준화’가 돼 버린 것이다 이러고도 극심한 세계 경쟁에서 낙오하지 않겠나.
  
  국민의 눈높이만 찾는다면 대통령⸱국회의원⸱판,검사⸱관리 등 남의 위에 있는 사람은 업무에 대한 연구 노력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여론대로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오늘의 문명을 누리고 사는 것은 사람끼리 경쟁을 한 덕분이고 ‘적자생존’의 논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꾸로 높은 곳을 쳐다보지 않고 낮은 곳을 바라보는 하향 평준화를 해왔다. 하향 평준화에 대한 일부의 비판이 있자 ‘하향 평준화’란 말을 ‘국민의 눈높이’로 바꿔치기 했다. 그래서 멈춤 없이 아래로만 내려간다. 불필요한 가정이겠지만 굳이 가정을 해본다면 우리가 하향 평준화를 하지 않고, 국민 눈높이도 찾지 않았다면 우리의 발전이 이 정도로만 되었겠는가.
  
  이를 모르지 않을 정치인들이 국민의 눈높이란 말로써 국민의 혼을 빼놓고 박수를 끌어낸다. 국민의 눈높이라 말하여 국민을 더욱 사랑하는 것처럼 얼림수를 쓰는 것이다. 유사 이래 동서고금을 막론, 몇몇 엘리트가 국가를 이끌어왔지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끈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성실히 하면 되지 국민의 눈높이 운운할 것은 못 된다. 국민의 눈높이란 말에서 전체주의 냄새가 나기에 더욱 그러하다. 국민의 눈높이를 강조하는 자들은 한갓 포퓰리스트일 뿐 충국애민(忠國愛民)하는 정치인이 아니다
  
  
  • 白丁 2024-07-25 오후 9:39:00
    개돼지가붕개 세상을 만들겠다는 원대한 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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