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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일은 노동절이자 공산당원인 부친의 생일
이민복(대북풍선단장) | 2025-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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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공산당원이 되듯이 공산권의 핵심 명절인 5·1절이 남로당원이었던 부친의 생일이다. 아들인 나는 신통히도 현재 선산 작업을 위해 부친 고향에 와 있다.
그렇게 목숨을 바쳐 공산화하려던 부친 고향은 공산당과 상극인 기독교화되듯이 마을마다 예배당이 있다. 쌀은 공산주의라고 했는데(김일성) 부친 고향에서 쌀이 너무 넘쳐 그만 심으라고 하는 정도이니 공산주의는 이미 여기서 이루어진 것이다.
1949년 부친은 리리(이리) 군산 감옥에 갇혀 죽을 뻔했다. 당시는 재판이고 뭐고 감정나는 대로 총살하던 때이다. 여수 순천 반란 사태 후과이기도 했다. 몇날 며칠을 굶기다가 무슨 일인지 총살 전에 국수를 먹으라고 차린다. 이제 죽음을 앞둔 터에 모두 먹을 턱이 없다. 하지만 부친만은 맛있게 먹었다 한다. 평안도 말씨를 쓰는 총살 집행 책임자가 "저 간나새끼만은 낼 죽이라"고 한다. 그 통에 유일하게 살아남아 대화하게 된다.
ㅡ넌 어케 공산주의가 좋냐?
"골고루 잘 살게 한다기에 따랐다."
ㅡ다 국수를 안 먹는데 넌 어케 맛있게 먹었냐?
"한번은 누구나 죽는데 이왕 먹고 죽자고 천연스럽게 생각했다."
ㅡ너 죄목이 무기 소지로 고발 당해 총살인데 그 무기는 어디 있나?
"증거도 없이 마구 죽인다. 무기라는 것은 나무 권총이었다. 그러니 사람 죽인 일도 없다."
ㅡ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국수 먹는 배짱을 보아 살려주겠다.
"고맙다. 빠른 시일 증거를 제시하겠다."
부친의 남한 부인의 증언에 의하면 남로당 조직이 얼마나 센지 남편이 눈치 하나 주면 온 마을이 움직일 정도였다고 한다. 이처럼 지하당원을 시켜 나무로 깎은 권총을 돌에 달아 호숫가에 던져 놓게 하고 취조 때 그 장소를 불었고 확인되어 살아났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팔로군 출신 북한 중앙당 공작원이 제공한 무기가 세 정 있었다고 한다. 소련제 떼떼 권총과 육혈포 권총이었다고 한다. 골고루 잘 살게 하자는 사상이 너무 좋아 석방 후에도 활동은 계속된다. 산이 없는 호남평야라 공동묘지에 아지트 파고 활동했다.
6·25전쟁으로 인민군 치하로 되자 양지로 나온 부친은 군(郡) 선전비서가 된다. 지방 빨갱이가 가장 나쁘다고 한다. 하지만 부친은 죽다 살아난 덕 때문인지 자신 관할 구역에서 학살을 막았다고 한다. 가난뱅이들이 부자들을 죽이자고 하면 오히려 당 간부로서 막은 것이다.
"죽이지 말라! 동네사람(부자)을 죽이는 것은 네 가족을 죽이는 것과 같다. 땅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니 농사나 지으라!"
내가 탈북하여 와서 부친 고향에 마음대로 다니는 것은 이런 학살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친 덕에 살아난 한 부자는 그 아들이 탈북하여 왔다니 돕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유엔군이 들어오자 부친은 인민군 6사(師)를 따라 월북했다. 마을 부자들은 보증하겠으니 월북하지 말라고 했다 한다. 하지만 공산주의가 너무 좋아 월북하였다. 그 길로 다시는 고향땅을 밟지 못한다. 목숨과 인생을 바친 공산주의 북한을 살아보신 부친의 결론은 <최대의 협잡>이라 하셨다.
평등 찾아 월북한 부친의 교훈인지 그 아들은 자유 찾아 탈북하여 부친 고향에 오게 된다.
이 스토리가 기가 막히다며 중앙일보 장세정 기자에 의하여 한 면에 게재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