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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야 할 법, 어겨야 할 법
엄상익(변호사) | 2025-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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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법도 지켜야 하나>
친구들이 모여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낯선 병원의 중환자실보다는 정든 자기 방에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왔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집에서 죽으려면 골치 아파. 경찰관이 올 때까지 가족이 꼼짝 못하고 기다려야 해. 경찰에 가서 조서를 꾸며야 하고. 그리고 의사가 왔었어. 출장료로 수십만 원을 달라고 하더라구.”
그런 절차가 집에서 죽고 싶은 소망을 꺾는 것 같다. 이상했다. 법의 취지가 그렇지는 않았다.
젊은 날 검사직무대리로 근무한 적이 있다. 집에서 죽은 사람이 있으면 경찰이 보고서를 올렸다. 현장을 가보고 가볍게 체크하는 행위였다. 가족들이 장례를 치르는 데 지장이 없도록 했다. 그런데 절차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의사의 수고비를 개인이 부담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법적인 매뉴얼이 사회생활에 지장을 가져오는 수가 있다. 일본에서는 매뉴얼이 없으면 위기시에도 사람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사소한 법규정이 인간의 정신과 행동을 묶어버리는 것이다.
변호사인 나도 법조문에 묶여 살았다. 변호사는 업무상 비밀을 누설하면 처벌받는 법규정이 있다. 의뢰인이 믿고 얘기했는데 불어버리면 곤란하다는 게 입법 취지다. 그런데 폭로하고 싶은 경우가 많았다. 변호사를 하면서 교활한 악질 살인범들을 많이 봤다. 여러 종류가 있었다. 조폭 두목들은 부하에게 사람을 죽이라 하고 자기는 빠지는 경우가 있었다. 부자들 중에도 청부살인을 하고 자기는 결백한 척 위장하는 악질이 있었다. 밀수범도 마약범도 그런 경우가 있었다. 수사관이 고문을 해서 사람을 죽이고 그 사실을 은폐하는 경우도 있었다. 변호사로 그런 은밀한 현장과 맞닥뜨릴 때가 있었다. 변호사는 업무상 비밀을 지킬 의무가 있다는 핑계로 입을 다물고 돈이나 벌 것인가 아니면 그런 불의를 폭로할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곤 했다.
법과 양심이 부딪치는 현장이었다. 법은 그런 경우 예외적으로 변호사의 입을 열게 해줘야 하는데 닫게 만들었다.
정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법의 모순 같았다. 그럴 때 나는 정면으로 법을 위반했다. 곤혹을 겪고 법적 책임을 졌지만 양심에 거리낌은 없었다. 양심은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나는 법보다 양심을 더 중요시한다. 법에 위반된 걸 물으면 ‘벌 받으면 되지’로 대답을 하곤 했다.
평생 법과 함께 살아왔지만 여러 종류의 법이 있었다. 좀 강하게 말하면 지켜야 할 법과 어겨야 할 법이 있다고 생각했다. 장식 같은 위선의 법도 있었다.
내가 자라난 조국은 어렸을 때부터 헌법에 ‘민주공화국’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나이 중년이 될 때까지 민주도 아니고 공화도 아니었다. 헌법 조문은 장식물이었다.
독재 정권 시절 대통령의 뜻을 살핀 다수당 국회의원 몇 명이 작당해서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법들을 만들었었다. 사법부는 정권의 시녀였고 비겁했다. 판사들은 실정법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민주화 투사들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악법도 법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판사들에게 검정 고무신이 날아갔다.
정권이 바뀌어도 법이 이념의 도구 같았던 적이 있다.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깃발이 휘날리고 친일파를 다시 색출하고 그 재산을 몰수하자는 법이 만들어졌다. 앞장설 위원회도 만들어졌다. 그 법은 소급입법으로 재산권 박탈을 금지하는 헌법 위반이었다. 그러나 이념과 선동된 여론이 그 위였다. 위원회가 죽은 사람들을 무덤에서 끌어내 친일의 딱지를 붙이고 자손들한테서 물려받은 재산을 몰수했다.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시대 조류를 따랐다. 나는 억울하게 친일파로 찍히고 재산을 빼앗긴 사람들을 보았다. 역사의 페이지에는 그들의 분노와 한이 배어드는 것 같았다. 법의 형식을 빌린 불법이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행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뇌물죄로 구속되고 감옥살이를 했다. 나는 윤석열 검사 같은 법 기술자와 담당 대법관의 합작으로 만든 혁명재판으로 보았다. 나는 그 사건의 변호사였다. 재판장에게 바르지 못한 재판을 하면 언젠가 응징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앞으로도 입법 행정 사법을 장악한 막강한 권력이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영혼까지 묶어버릴 수 있다. 헌법재판소도 정치적 오염이 될 수 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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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타임즈 2025-05-29 오전 7:39:00
- 독재자ㆍ범죄자ㆍ거짓말쟁이ㆍ쌍욕쟁이ㆍ막가파ㆍ무책임자ㆍ비호감 ㅡ 망국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