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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虛榮)이 섞인 대학 졸업장
엄상익(변호사) | 2025-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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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장>
내 기억의 서랍 속에는 정월 초하루 아빠 엄마와 세배를 온 여섯 살 손녀의 모습이 아직 생생하게 남아있다. 아빠 엄마 사이에서 넙죽 절을 한 손녀에게 내가 자그마한 잔에 따른 차를 건네주면서 말했다.
“차 한잔 드실까요 손녀님.”
“네.”
손녀가 대답하면서 양손으로 찻잔을 받쳐 들고 한 모금 마신 후에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말한다.
“차 맛이 좋군요.”
“사랑해요 손녀. 아주 많이”
“저도 할아버지 사랑해요 아주 많이.”
“요즈음 할아버지 집에 왜 자주 안 오죠?”
내가 웃으면서 물었다. 손녀가 순간 쑥 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좀 바빠서요.”
세월이 흐르고 손녀가 고등학교 2학년이다. 입시의 태풍권에 들었는지 학교가 끝나면 학원과 독서실 사이를 시계추 같이 오가는 삶이다. 내가 손녀에게 ‘포클레인 노동자의 운수 좋은 날’이란 글을 카톡으로 보냈었다. 이따금씩 글로 할아버지가 보아왔던 세상과 생각을 전하곤 한다. 손녀에게서 답글이 왔다.
‘다양한 일이 많이 일어나네요. 대학입시와 강남에 갇혀 사는 저는 세상을 전혀 접해볼 수 없는 상황이예요.’
나는 손녀가 ‘대학’이라는 간판 때문에 맑은 이슬이 맺힌 여름꽃 같은 싱싱한 소녀 시절의 낭만과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이 안타까웠다. 할아버지가 살던 세상도 그랬다.
오늘 아침 신문과 방송에서는 영향력이 강한 사회 명사의 대학에 관련된 발언 때문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대학을 못 간 여공 출신 여성이 서울대 출신 남편과 결혼하고 대통령 후보의 부인까지 된 것을 신분의 상승같이 말한 것이다. 직접 그 말을 들었다. 전후 맥락을 보면 다른 걸 얘기하는 취지였지만 고졸 출신 노동자와 서울대 출신 대통령 후보를 비교한 것이 이 사회의 급소를 건드린 것 같았다.
우리 사회에서 대학이라는 건 뭘까. 대학을 나와야만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박노해 시인은 대학은 지식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학연을 이루어 서로 끌어주고 밀어주는 출세의 사다리라고 표현했다. 학연은 이념보다 강하더라고 했다. 대학의 일면을 무섭게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부모들이 자식만은 대학 졸업장을 가지기를 염원했다. 그걸 간파한 군사정권은 무수한 대학을 설립했다. 대학 졸업장의 인플레이션이 밀물같이 다가왔다.
파출부를 하는 칠십대 여성이 내게 아들의 취직을 부탁한 적이 있다. 대학을 나온 아들이 나이 사십이 넘도록 놀면서 늙은 엄마에게 기대어 산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선배가 하는 소나무농장에서 일을 하도록 소개했다. 그는 당장 불쾌해 했다. 대학을 졸업한 자신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대학 졸업장은 그를 룸펜으로 만드는 독이었다. 어느새 우후죽순격으로 돋아났던 대학들은 인구감소로 입학할 학생들이 없는 상태가 됐다. 졸업장 장사만 하던 대학들을 과감하게 정리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정말 학문을 할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에게 대학이라는 게 필요한 것일까. 허영이 섞인 대학 졸업장보다 사회를 이롭게 하는 다양한 능력의 자격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텔레비젼 화면에서 자주 보던 인기 코미디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내 아이한테 아버지가 고등학교 2학년까지밖에 다니지 않은 걸 솔직히 말했어요. 아이한테 거짓말하기 싫었어요. 무식하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저는 젊은 날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내가 하는 코미디를 할 거예요.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요.”
당당하고 정직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한 원로 법조인이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서울법대와 미국 최고 명문대 졸업장을 가진 분이었다.
“피자와 스테이크로 성공한 음식점 두 군데를 봤어요. 가보면 항상 손님들이 사오십 명씩 줄을 서 있어. 음식을 잘 만드는 것도 하늘이 내려준 축복인 것 같아. 우리 시대 개천에서 용이 나려면 일류대 졸업장이 있어야 했는데 요즈음의 용은 간장게장을 만들어 월 몇천만원을 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성경을 보면 사람들은 “예수가 어디서 그런 지혜를 배웠지?”라고 하며 그때도 따졌다. 학벌은 세상이 사람들 마음의 땅바닥에 그어놓은 경계선이다. 사람들은 그 경계선을 넘지 못하고 주저한다. 그냥 넘어가면 되는 게 아닐까. 열등감만 없앤다면 사실은 중간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