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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로 민간인 대북방송 시작한 김성민 대표의 용기
이민복(대북풍선단장) | 2025-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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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네요.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가 떠나간 날이어서 그럴까요.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9년 지금으로부터 27년 전이다. 인재인 줄 알아보고 전 서울시장 김상철 변호사의 북한구원운동에 초대했다. 당시 탈북자 회장에 저를 금방 선정하려 할 때였는데 그에게 넘기자고 즉시 건의하여 그렇게 되었다. 나는 회장이 아니라도 당연히 참여하는 것이니 저런 인재를 한 명이라도 더 참여시키기 위해 넘기자고 한 것이다.
북한구원운동에서 당면 운동은 탈북자들을 유엔의 보호(UNHCR)를 받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모티브가 UNHCR 첫 증서를 받은 나의 경험을 살린 것이었다. 이 운동은 무려 1천만 명 서명 운동으로 이슈화되었다. 서명지만 중형 자동차에 실을 만큼이었다. 이걸 가지고 제네바 UNHCR 본부에 전달하려 갈 때 탈북자를 대표하여 김성민이 가는 것을 바래주었다. 이 당시 이 운동에 참여한 이웅평 탈북 비행사와 찍은 사진도 있다. 이웅평도 간 이식을 하고 살아나 함께 하였으나 일년 후 사망했다.
김성민은 예상했던 대로 능력과 매력이 있었다. 잘 생긴 외모에 지성도 갖추었고 술 담배도 잘하며 대중과 잘 어울렸다. 그가 만든 탈북자 모임이 <백두한라회>였다. 탈북자들이 화합하기 어려운데 여기서는 그의 리더로 흥성했다. 신의주에서 탈북한 교사 출신 아무개와 호흡이 잘 맞았다. 노원구에서 열린 백두한라회 회식 자리에서이다. 약간 취한 끼에 김성민이 대중 앞에 나서서 느닷없이 <내가 제일 존경하는 형님은 누구인 줄 알아! 이 형님이야!> 하며 나를 가리켜서 몸둘 바를 모르게 한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그렇게 보고 힘을 주어 감사했다.
그의 인기는 국정원도 인정하여 탈북자동지회 회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그가 관변 소속 단체장으로 가기에 <북한구원운동>에서는 헤어졌다. 하지만 몇 년 후 약속이나 한 듯한 동지적 행동을 하게 된다. 그가 2004년 민간인으로서 탈북자로서 최초 대북 방송을 개척한 것이다. 사실 나는 2003년 아이들 장난감인 고무풍선으로 대북전단을 날리기 시작했지만 맥이 빠진 상태였다. 저 넓은 북한 땅에 어린이 고무 풍선으로 전단을 다 보낼 수 없어 감감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성민이 대북 방송을 한다고 하니 용기가 북돋아났다. 그가 한 첫 방송은 인터넷 방송인데 인터넷이 없는 북한에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보다 그의 용기가 긍정적으로 나에게 강력히 작용한 것이다. 그래 연구하자! 과학자 출신인 내가 해야지 누가 하겠나- 해서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할 대형 비닐 풍선이 그로부터 2년 후인 2005년에 개발된 것이다. 김성민과 나는 서로가 힘을 주었던 결과물이다.
김성민은 왜 민간 대북 정보 유입 운동에 뛰어들었을까. 그는 국정원 관할 하에 있는 탈북단체장을 해보며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가 탈북자 동지회 회장으로 있을 때는 김대중 친북 정권시이다. 현 국정원장인 임종석은 그 당시 황장엽을 비판하여 젖비린내가 진동한 자라는 소리를 듣을 정도로 서로 싸울 때이다. 대북 운동에 협조는커녕 노골적으로 미국 방문도 못 가게 막는 실정이었다.
실제로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방송, 전단을 전면 중단한 것을 김성민 탈북자동지회 회장으로서 목격하였다. 관변 속에 있어보니 정권에 따라 대북정책이 얼마나 180도 달라지는가를 똑똑히 목격한 것이다.
그래서 그나 나나 정부를 못 믿는다. 자체로 해야 한다라는 의지가 생긴 것이다. 민간인이 대북방송과 대북전단을 한다는 자체가 커다란 도전이고 큰 의미이다. 아무튼 나와 김성민은 민간인으로서 탈북자로서 최초 대북방송과 대북풍선을 한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에 나와 그는 각자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달려왔다. 아니 북한이 언론을 개방할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김성민의 일편단심을 병마가 가로막는 소식을 2017년 들었다. 그때도 그랬다. 당신은 불사조야 - 나는 김성민 같은 불사조를 본받아 하루 하루를 보내려 애쓰고 있지 - 하면서. 얼마 전까지만도 서로가 메시지로 힘을 주고 있었는데…
오늘 하느님도 슬픈 날인지 비가 내리내요. 그가 없어도 그는 나의 가슴속에 그리고 그가 심어 놓은 가슴 속들에 여전히 살아 있지요. 두서 없이 그냥 적어보네요. 아무튼 슬프니까요. 그가 나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올립니다. <건강이 이렇게 중요한지 몰랐습니다.> 모두들 새겨 들읍시다. 그래야 일을 많이 하게 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