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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던 힘을 다 하여 머슴처럼 일했다” 이동복(前 국회의원) 페이스북  |  2025-11-22
11월 20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서울 종로구 연건동 기독교청년회관에서 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 4주기 추도식 겸 기념 학술세미나가 거행되었습니다. 다음은 추도식에서 필자가 읽은 추도사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들께서 일독하시고 음미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동복 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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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전두환 대통령 4주기 추도사
  2025년 11월 20일
  추도자 : 이동복 (15대 국회의원)
  
  오늘 우리는 고 전두환 대통령님의 4주기를 맞아 고인을 흠모하고 추모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제가 처음 고인을 뵌 것은 1979년 10월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시해되는 참변 이후 혼돈의 시기에 나라가 큰 위기에 빠져 있던 때였습니다. 저는 그때 고인의 당부에 따라 남북대화사무국장 직을 맡아 근무하면서 1981년 말 우리 정부 최초의 종합적 통일방안인 ‘민족화합 민주통일 방안’을 작성해 보고드렸고, 그 뒤 고인의 허락을 얻어 잠시 공직을 떠났었습니다.
  
  이후 다시 정부에 복귀하여 일했지만 그것은 고인께서 이미 퇴임하신 뒤였습니다. 오늘 추도사를 맡아 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저는 이 일은 저보다 가까운 곳에서 생전의 고인을 모셨던 분들 가운데서 맡으시는 것이 더 옳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잠시 했었습니다.
  
  주저하던 저는 집 서가에 꽂혀있던 “혼돈의 시대”, “청와대 시절”, “황야에 서다”의 세 권으로 되어 있는 고인의 회고록을 꺼내 이틀에 걸쳐 다시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외람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올리는 추도의 말씀을 준비하기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생애는 고인 스스로 표현하신 대로 참으로 “파란만장”했습니다. 국군보안사령관으로 1979년 10월의 국가적 혼란을 수습하셨고, 이어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으로 표류하던 대한민국의 항로를 바로잡으셨습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제11·12대 대통령으로 재임하시면서 나라의 위기 극복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1948년 건국 이래 77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대한민국이 걸어온 길은 영욕이 교차하는 격동의 시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고인 이전의 네 분 전임 대통령들은 모두 임기를 온전히 마치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여덟 분 가운데 대부분도 재임 이후가 평탄치 못했습니다. 예외적으로 평안하게 임기를 마쳤던 한두 분의 경우에 대해서도 냉혹한 역사의 부검(剖檢)의 칼끝은 아직도 칼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정서에는 오랜 세월 왜곡된 위정척사적 사고의 잔재로 인해 사물을 긍정보다는 부정적으로 보고, 공보다 과에 치중하여 판단하는 경향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현직 권력에는 아부하거나 맹종하면서, 전직 지도자에게는 지나치게 가혹한 태도를 보이는 모습 또한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불행하게도 고인께서는 그 같은 왜곡된 정서의 가장 큰 희생자이셨습니다. 이 나라 대통령직에 8년간 재임하면서 나라의 위기 극복과 발전을 위해 고인께서 남기신 업적은 실로 찬연합니다.
  
  고인께서는 대통령 단임제, 연좌제 금지, 중소기업 지원, 민족문화 창달 등을 헌법에 명문화하셨고 무엇보다도 1987년의 “6·29 선언”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헌정의 위대한 전통의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는 만일 그때 단임제 약속을 저버리고 장기 집권을 시도하셨다면 이 나라의 민주주의는 과연 어떤 길로 갔을 것이냐 하는 공포감을 지금도 떨어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위대했던 그 때의 결단의 의미가 오늘에 와서 너무 저평가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고인께서는 서울올림픽을 유치하셨고,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셨으며, 자동 전화교환기를 개발하셨고 자동차·반도체 산업 육성과 수입자유화를 실현하셨습니다. 해안선의 철조망을 철거하셨고, 공정거래법을 제정하셨으며 학생들의 두발 및 교복 자율화를 시행하셨습니다.
  
  또한 “일본의 안보 무임승차론”이라는 정곡을 찌른 발상으로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설득하여, 그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일본의 나까소네 내각으로부터 40억 달러의 ‘안보 차관’을 획득하는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내기도 하셨습니다. 고인은 이 같은 과업의 수행을 위하여 “젖먹던 힘을 다 하여 머슴처럼 일했다”고 회상하셨습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웅비와 번영이 고인이 없었어도 과연 가능했겠느냐는 문제는 당연히 학계의 주요 연구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책임한 정치인들과 언론의 장난이 거든 결과이기도 했지만 이 나라의 병든 국민정서는 고인에게 너무나도 가혹했습니다.
  
  5.18 사태는 사태 자체에 대한 진실 규명이 역사적 과제로 방치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이 사태에 대한 고인의 책임 문제에 관한 진실 규명도 여전히 숙제로 남겨져 있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지키는 일이 보다 중요한 가치라고 하더라도, 체제 붕괴를 막는 일이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인의 어록은 그때의 시국 담당자들이 공유했던 절박한 위기감을 증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의 이 나라는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말의 장난 아래 공소 시효까지 정지시키는 특별법 제정과 “사전에 조작된 유죄 판단을 확정하는 사이비 재판”의 방법으로 현대판 “소크라테스의 재판”을 연출해 냈습니다.
  
  이리하여, 이 나라에서는, 고인께서 겪은 불행은 “5공화국의 성공이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라는 역설적인 모순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시저의 가슴에 칼을 꼽은 브루터스"가 된 것입니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서거하신 지 4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고인의 유해가 안식처를 찾지 못한 채 생전의 사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생전의 고인께서는 “내가 지휘하던 사단 전방의 북향 산록에 묻혀 눈을 부릅뜨고 북쪽의 적을 지켜보겠다”는 유언을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고인의 그 유지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우리 사회의 정서와 도리에 비추어 보더라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역사적 평가와는 별개로, 혼돈의 시대를 넘어 광명의 길로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지도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지켜져야 마땅합니다. 지금의 엄혹한 정치문화 속에서도 우리는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는 새로운 각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이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할 때 전두환 시대에 대한 정의의 재평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재임 중에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머슴처럼 일했던” 대통령님, 불편하시더라도 특유의 인내로 이 혼돈의 시간을 견디어 주십시오. 삼가 대통령님의 명복을 빌면서 저의 추도의 말씀을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대통령님, 안녕히 계십시오.
  • rhois99 2025-11-22 오후 12:58:00
    무식한 언론, 정체성 없는 협착꾼 정치늠들의 만든 결과입니다. 김대중은 전라도에서 어떤 대접을 받나요, 먼저 고인 고향 합천과 경상도에서 힘을 내야 합니다, 상도 멍청이 놈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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