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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유골함' 전두환 4주기…내가 몸담아온 언론의 책임이 크다!
최보식(최보식의언론) 편집인 | 2025-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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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2일) YS의 아들 김현철 씨가 김영삼 전 대통령 10주기 추도식에 민주당 지도부가 얼굴도 안 내민 것에 대해 분개해 "민주당은 개미새끼 안 보여"라는 SNS 글을 올렸다.
추도하러 오지 않는다고 그 유족이 이러는 게 좀 볼썽사납지만, 민주당뿐만 아니라 요즘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통 큰 모습'이 사라졌다. 정치판이 쪼잔하고 극성스러운 인간들만 골라 놓은 집합소가 됐다.
김현철 씨의 발언이 있고 다음날인 오늘(23일)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4주기다. 전두환 4주기는 민주당만 아니라 국힘당도 외면했다. 아마 그 4주기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 유족이나 이제 다들 '상늙은이'가 된 과거 부하 몇몇 뿐일 것이다.
전두환 유골함은 여전히 연희동 집안에 놓여 있다. 그는 유언 없이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전두환은 '내가 죽으면 화장해 납골을 북한이 바라다 보이는 북방 고지에서 뿌려 달라'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그의 회고록에도 그런 문구가 있다. 남은 가족은 이를 '전두환의 유언'으로 여겼다.
하지만 북방 DMZ 고지에 들어가 납골을 뿌리려면 국방부 등의 허가가 필요했고, 거기에 기념 표지라도 세우려면 땅 주인과 합의가 돼야 했다. 그게 보수정권이라는 윤석열 정권에서도 이뤄지지 못했다. '전두환'은 결코 용서해서는 안 되는 악당이고, 그를 받아들이면 '공범자'로 몰리기 때문이었다.
연세대 81학번 운동권이었던 한기홍 전 시대정신 대표는 “그때는 전두환 노태우와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적이라고 여겼다”고 말했다. 그 시절 대학을 다녔던 우리의 보편적 생각이었을 것이다.
한기홍 씨는 대학생 시절 군사훈련 과정 중에 사격을 할 때면 과녁을 '전두환'이라고 생각하고 총을 쐈다고 했다. 대학 화장실에는 '살인마' '전두한(剪頭漢-목 자르는 악당)' 같은 낙서가 적혀 있었다.
그런 내가 기자를 하면서 '악당' 쪽인 전두환, 5공화국 비사와 관련해 그쪽 인사들을 많이 만나고 취재했다. 기자라는 직업은 세상이나 사건을 한쪽 방향으로만 볼 게 아니다.
전두환은 자기 친구이며 후계자인 노태우 대통령 시절 백담사로 유배됐다. 그때만 해도 백담사는 어디에 붙어 있는지 다들 모를 정도로 인적 없고 퇴락한 절이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가는 데만 4시간 이상 걸렸다.
사건기자 시절 백담사 분위기 취재 지시가 떨어져, 저녁 무렵 용대리 마을 구멍가게에서 안 맞는 운동화를 빌려 신고 눈이 꽁꽁 얼어 붙은 산길을 한 시간이나 올라갔다가 한밤중 달빛에 의존해 내려왔던 기억이 있다.
백담사 유배를 마치고 나온 전두환은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역사 바로 세우기’ 법정에 섰다. 사형 선고를 받았고, 감옥에서 2년 반을 살았다. 그 무렵 이순자 여사를 장시간 인터뷰했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었다.
나는 그걸로 전두환이 치러야 할 잘못이 있었다면 충분히 치렀다고 봤다. 아마 김대중 대통령도 그렇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적대관계’였던 김대중은 그를 전임 대통령 모임 멤버로 인정해 몇 차례 청와대에 초대했다. 동서화합과 과거와의 화해를 보여준 것이다. 전두환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 시절 그와 주위 사람들은 비자금 추징 환수와 관련해 강도 높은 조사와 압박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거의 숨통을 조여버린 것이다. 그의 둘째 아들(전재용)은 이와 관련해 두 번이나 감옥에 갔다. 문재인 정권에서도 그는 아직 손봐야 할 게 많이 남아 있는 표적이 됐다.
물론 5월 광주 당시 가족 친구 등 사랑하는 이들을 잃었거나, 그 뒤 5공 시절 붙들려가 곤욕을 치렀거나, 부당한 공권력에 고통을 겪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에게 그 시절은 '악몽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5공 시절 국민의 70~80%는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다. 여론조작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서울대 교수의 논문(2014년)에는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문화가 넘친 1980년대였고 계층적 자신감이 정치민주화도 이끌어냈다’라고 평가했다.
심지어 그렇게 바라던 문민정권이 들어서고도 “그래도 전두환 때는 살기 좋았어”라며 말하던 이들이 꽤 많았다. 이들이 모두 '속물'이어서 그랬을까.
전두환 시절에 많은 변화와 진전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컬러 TV, 프로야구, 1가구 1 전화, IT 산업과 행정전산화 기반이 된 광역전산망 설치, 반도체 산업 지원, 한국형 원전 개발, 연좌제 금지, 야간통행금지 해제, 수입자유화, 서울올림픽 유치 등이 소위 그 야만(野蠻)의 시절에 이뤄졌다.
무엇보다 전두환은 헌정 사상 처음으로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이뤄냈다. 임기 마지막 전 날까지 "그가 설마 물러날까" 했는데, 그는 제 발로 걸어나왔다. 정권 연장을 하고 비극적 종말을 맞았던 선배 권력자들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는 '정권 이양'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요즘 운동권들이 자신의 전리품이라고 주장하는 ‘대통령 직선제(6·29선언)’도 그의 결단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 당시 계엄령을 선포해 심각한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면 우리의 민주화는 지금과 같은 형태로 결코 전개되지 않았을 것이다. 전두환이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화의 문(門)'을 일부 열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를수록 전두환과 5공 시절을 객관적으로 봐야 한다는 언론매체나 언론인들은 사라졌다. 전두환에 대해서만 언론 보도들은 객관성과 균형 감각을 잃었다. 아예 그쪽 주장을 들어보거나 취재하려고 하지 않았다. 한쪽 얘기가 옳다고 확신해도 반드시 반대쪽 얘기도 들어보는 게 취재의 불문율이다. 설령 그쪽이 파렴치한 악당이고 살인자라도 그렇다.
이렇게 저널리즘의 원칙이 무너진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기자라면 마땅히 ‘악당’ 전두환을 매도해야 정의에 부합한다는 허위의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그렇게 본다고 거기에 숟가락을 얹고 편승하면 그 순간 기자의 역할은 없어진다는 점을 잊고 있다.
둘째는 언론사들이 사실관계를 가리는 쪽보다 '호남'을 염두에 두는 정무적·상업적 판단을 했기 때문이다. 저널리즘 원칙으로 전두환 사안을 접근하면 호남의 집단반발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사전 내부검열’을 해왔다. 정치판도 덩달아 이렇게 바뀌어갔다. 전두환의 객관적 공과(功過)를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하는 분위기가 됐다. 결국 내가 몸담아온 언론의 책임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