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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의 正體性과 그 歷史的 根據 박경범(작가)  |  2026-05-15
<한계에 다다른 左右 진영대결 논리>
  
  대한민국 건국 이후 수십년 지속된 대립은 흔히 말하는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대결 혹은 자유민주주의세력과 공산사회주의 세력의 진영대결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많은 無理가 있다. 특히 보수우파 진영에서 상대방을 좌파 혹은 공산주의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사자들이 否定하고 사상의 자유가 정당화된 오늘날 효과적인 대처방법도 되지 못한다. 思想은 보이는 것이 아니니 엄격하게 是非걸기가 곤란하고 특정사상에 따른 국가제도의 점진적 변화의 문제는 비록 意識계층은 感知한다 하더라도 일반대중에게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가 어렵다.
  
  <大韓民國 支持세력과 反大韓民國 세력의 對立>
  
  이제는 대한민국 내의 고질적인 세력대결을 대한민국세력 對 反대한민국 세력이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의 존재를 긍정하고 건국을 다행으로 보는 세력이 있는 반면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억울하고 후회스러운 일로 여기고 건국을 행한 대통령을 貶下(폄하)하는 세력이 있다. 의식적인 활동계층은 이 두 세력이 팽팽히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 다수는 이미 수십 년 간의 국가존속으로 대한민국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친일반민족’ 운운하며 건국세력을 폄하하며 국가전복을 꾀하는 부류도 막상 대한민국을 없애자고 일반대중에게 당당히 주장하지는 못한다. 색깔론 시비에서 저들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고 하는 것은 그대로 저들의 정체를 숨기며 때로는 법률의 庇護(비호)까지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저들이 ‘우리는 反대한민국 세력이 아니다.’ 라고 변명한다면 비록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한민국 존재의 정당성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 수호의 여부로 우리 사회의 대립구도를 설정하는 것은 애국세력에 유리한 구도를 설정하여 준다. 대한민국을 지키고자 하는 세력은 여타의 색깔 시비에 우선하여 대한민국 수호를 제일의 가치로 삼고 활동에 임해야 할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의 본래 가치가 훼손되어 形骸(형해)만이 남는 중에 이윽고 소멸되는 결과를 막기 위해서는 우선 대한민국의 본래의 가치를 숙지하고 그 가치의 훼손에도 대응해나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근대서양의 自由思想만으로는 부족하고 대한민국의 뿌리인 대한제국 그리고 이 땅의 문화를 이천년 이끌어온 한반도의 주류문화 세력에 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중국과는 민족이 아닌 國家對 國家로서의 관계>
  
  우선 大韓民國이란 국가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것이 국가수호의 명분을 강화시키고 국가의 정당성에 흠집을 내는 세력의 침투를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잘 알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관계를 理解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반도의 국가는 수천 년 중국왕조의 곁에 있으면서도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해 왔다. 특히 현대에 중국이 공산화로 인해 국가의 상징인 國旗를 국제 공산당 규격을 따라 정하는 등 국가정신이 전통가치와 異質化된 형편이 되었지만 대한민국은 동양문화의 精髓인 太極을 국가의 象徵으로 삼아 지키면서 嫡統의 동양문화를 세계 속에 자리 잡게 하고 있다. 중국인 또한 태극기를 보며 저네 전통문화의 鄕愁와 憧憬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반감을 가진 세력의 생각은 다르다. 지금은 대부분 의도를 숨기고 있지만 1970~80년대까지도 운동권 일각에서는 태극기를 두고 ‘사과하러 가는 중에 만든 국기이다’, ‘민중이 이해하기 어렵다’ 심지어는 ‘중국문화이다’하면서 폄하하곤 했다.
  
  민족이란 작위적 개념을 강조하는 좌파의 영향을 받아 근래 북한과의 단일민족 관념이 심어져 있어 중국과의 관계를 민족적인 개념으로 구분하고자 하는 시도가 간혹 있는데 중국은 스스로도 다민족국가를 자처하고 있을뿐더러 역사적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한민국과 중국을 민족적 분류로 구분하고자 하면 많은 無理가 따른다. 특히 역사적으로 ‘우리민족’을 중국의 ‘변방오랑캐’의 하나로 보는 視角을 상당수 자칭 보수 세력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좌파의 대한민국 소멸 포석에 말려들어가는 잘못된 생각이다.
  
  중국과 우리의 관계는 국가대 국가의 관계로 보아야 한다. 보수를 자처하는 세력의 일부는 중국의 현 정치체제를 이유로 중국에 거리를 두고 저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反대한민국 세력과의 대결에서 보탬이 되지 못하는 태도이다. 우방인 미국이 중국을 적대시하거나 경시하지 않듯이 한국은 긴밀한 역사적 문화적 관계를 가진 중국을 잘 理解해야 하며 민족적인 구분으로 이질화하려는 노력보다는 유사문명을 공유한 이웃으로서 국가의 규모와 성격에 따른 세계 속의 역할분담을 하며 공존할 지혜를 가져야 한다.
  
  사드갈등으로 한중교류가 중단될 것 같은 상황에 있었지만 여하튼간 복원되고자 하고 있다. 보수세력 일부에서는 중국과의 교류를 절제하고 정 큰 시장을 원한다면 인도에 진출하는 것을 권하기도 한다.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일본 등 다양한 우방과의 교류확대가 더 바람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당수 한국인은 태생적으로 중국을 향한 향수와 미련이 있기 때문에 단지 경제논리와 정치논리 만으로 중국과의 교류를 절제하자는 주장은 현실성이 적다.
  
  한국이 외국과의 교류가 중요한 형편에 있는 나라인 반면에 중국은 자체 규모로 자급자족이 가능하여 외국과의 교류가 한국처럼 절박하지는 않기 때문에 사드보복 등 문제가 있으면 한국은 일방적으로 당하는 듯싶지만 이윽고 중국의 입장에서도 한국을 무시하고 지내는 것이 부자연스럽게 되어 관계복원의 필요성을 갖게 된다. 이것은 반도체 등 한국의 특정산업이 중국에 꼭 필요해서 그렇다기보다는 근본적으로 중국 또한 한국과의 緣이 있는 것에 起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역사상 한반도 국가유지의 배경>
  
  그러면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정권이 어떻게 해서 수천년 중국왕조의 곁에 머물면서 나름대로의 정체성을 유지해왔는가를 냉정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부족국가시대 이후에 형성된 고대국가는 부족간의 전쟁과 정복에 의하여 병합되고 같은 나라에서 부족별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신분제도가 형성되었다. 근세에 거의 동일한 민족이 영국, 미국, 남아공, 호주를 통치했듯이 고대 동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륙에서 韓半島로의 移住의 利點은 대륙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일차 소외됐던 자들이 비교적 쉽게 상류계급을 형성할 수 있었고 대륙의 ‘지방정부’보다는 자율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한반도는 대륙중심과 비슷한 수준의 문화를 가졌기에 북방유목민들과는 달리 안정적인 독립국가의 유지가 가능했다. 비록 토지의 상대적 척박함과 양반귀족의 착취로 생활이 빈궁하다 할지라도 피지배계층인 일반백성은 쉽사리 바다건너와 교류하기는 어려웠기에 한반도의 국체는 안정될 수 있었다. (교통이 편리해진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방식의 국가유지에 미련을 두는 것이 근래 좌우파정권의 영어교육강화 및 한자교육 억제정책이다. 한국이 일본과 중국의 한자문화권內의 별개의 영어권 국가로 자리 잡으면 일반국민은 가까운 일본과 중국과는 문자소통이 안되어 의도적으로 준비하지 않고는 교류하지 못한다. 영어문화권의 중심인 미국으로는 일반서민은 여비를 충당하지 못해 기관단체의 지원을 얻지 않고는 교류하기 어렵다. 미국을 통한 각종 정보와 사회적 利權은 상류층과 그들에 附合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되고 일반국민은 일본 중국 미국 등의 외국과 교류하기 어려워져 나라는 ‘안정’된다.)
  
  <三國志魏志東夷傳에 머문 시대착오에서 벗어나야>
  
  한국과 중국을 민족적으로 구분하면서 동이족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이족이라는 이름은 춘추전국시대 以前부터 있었던 말이고 漢族이라는 것은 훨씬 후에 漢나라의 구성원이었던 ‘여러 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三國志魏志東夷傳에 묘사된 시대의 한반도는 동쪽 변방이었다. 그러나 중세이후 동양문화의 중심은 東進해왔다. 지금 동양문화의 중심은 대륙내부의 西安과 洛陽이 아니다. 黃海를 접한 北京과 上海 그리고 서울(漢城)이다.
  
  <한국인 북방민족설은 대한민국 정체성과 맞지 않아>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에 관하여 교통정리를 해야 할 것은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국인 북방민족설이다. 한국은 일본과 같은 북방유목민이고 중국 한족은 남방농경민이라는 설인데 이러한 단순한 이분법은 현재의 실정과 역사를 알수록 모순이 드러난다. 인터넷의 주요 글의 일부를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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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절강성 항주에서 느낀 의문
  
  항주에 여행을 가봤다. 관광지 말고 시내만 줄창 돌아댕겼다. 조그만 동네 골목 식당, 시내버스 안, 도심의 번화가를 쏘다니며 항주시민을 구경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 "한국인과 놀라울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우리가 흔히 중국인하면 떠올리는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 없고 그냥 한국의 거리 모습 그 자체였다.
  
  상대적으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극단적인 북방계 타입이 다소 적을 뿐. 분명 '중국인은 혈통과 뿌리가 한국인과 전혀 다른 민족'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동질적인 인간들이었다. 흔히 몽골이나 시베리아사람을 보구 한국인이랑 똑같이 생겼네~ 역시 우리와 뿌리가 같은 민족입네~ 하면서 호들갑떠는데 항주에 가본 내 입장에선 꼴깝으로 느껴진다. 아무 편견없이 보면, 몽골인보다 중국 항주사람이 한국인과의 일치율이 더 높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족의 원류는 절강성과 거리가 먼 황하강 중류다. 절강성 주민이 처음부터 한족이었던 게 아니다. 황하강 유역의 한족에게 흡수당고 오랜 기간 통일국가의 테두리 안에서 살면서 문화적 동질화가 이루어져 한족이란 정체성을 얻은 것일 뿐이다.
  
  중국인과 한국인이라는 민족정체성이 생기기 전에, 절강성과 한반도 사이에 어떤 교류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러고보니 한반도의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이 중국 내에서 제일 많이 발견되는 지역이 중국 절강성이다. … (연보매니아 yanbianews.com 네티즌)
  
  서울에서 ‘강남’ 하면 한강 남쪽에 위치한 11개 구 전체 보다는 강남구 혹은 인접 8학군 지역을 말한다. 중국의 ‘강남’도 장강(長江) 남쪽 11개 성 전체 보다 흔히 상해시와 江浙(강소, 절강 兩省), 혹은 조금 넓혀 인접한 안휘·강서·호북성 중의 일부 지역까지 일컫는다.
  
  이 곳은 원래 南蠻이라 불리던 楚, 吳, 越의 영지로서 당시 중국 인구의 10%만 거주하던 척박한 변두리였다. 漢代에 철기농구와 토목기술이 발전되며 종전에 엄두를 못 내던 습지의 개간이 시작 되었다. AD 309년 영가(永嘉)의 난 이래 북방 유목 기마병단의 약탈을 피해 강북의 중산층이 淮河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행렬을 이루었고, 마침내 司馬睿가 建康(지금의 남경)에 東晉을 도읍하여 남북조시대 370년의 역사를 열게 되었다. 풍부한 수량과 온화한 날씨에 힘입어 唐代에는 이 지역만으로 전 중국 인구를 먹일 수 있는 곡창으로 탈바꿈 되었다.
  
  중국의 정치 중심이 고대의 서안에서 낙양, 개봉, 북경으로 東北進 하는 동안, 경제중심은 양주, 소주, 항주로 東南進 해오다가 20세기에 이르러 상해로 정착되었다. 2006년 江浙의 1인당 소득이 중국 평균의 2배(상해시는 3.7배)인데, 1000여 년 전에는 이 차이가 더 컸다고 한다. 문화예술에서도 송대 이후에는 강남이 주도를 해왔다. 한 예로 明·淸 500년간의 科擧 장원급제자의 70%가 江浙 출신이라고 한다. … (尙美會 이사 李基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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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목민과의 대립 속에 세워진 문명국가>
  
  漢시대 이후 북방의 민족들이 남하했고 남북조 시대에 절정에 달했다. 군사력이 발달한 北朝는 경제력이 발달했을 뿐인 南朝를 누르고 천하를 통일했다. 唐의 통합이후 宋은 더욱 풍요한 사회를 이룩하였지만 몽고의 元나라에 이르러 대륙은 완전히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들었다.
  
  고구려 백제에서도 漢文을 쓰는 민족이 한반도를 지배했다. 발해가 망한 후 다소 이질적인 문화의 요나라와 금나라가 만주를 지배하게 되었다. 高麗에서도 여진족의 침입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高麗를 이어 明의 출발과 함께 건국한 조선은 고려시대에는 영토에 속하지 않았던 함경도 일대를 지배했던 이성계에 의해 건국되었다. 王朝는 북방에 기초했으나 나라를 운영한 주류세력은 남방의 士大夫였던 것은 중국의 국가형태와 유사하다. 정도전이 조선을 사대부 중심의 국가로 만들려던 계획이 후에 이루어져 건국이후의 조선은 계속 사대부편향으로 흘러 북방보다는 中華親和的으로 나아갔다.
  
  明과 淸의 교체기에 淸의 편에 서려했던 광해군은 쫓겨나고 淸이 통일한 뒤에도 조선은 외교상으로는 청에게 맞추면서도 스스로는 中華의 전통을 잇고자 數百年間 明의 年號를 유지하였다. 근세에 청이 쇠약해지자 조선은 청으로부터 독립하여 中華의 영광을 부활하고자 중국의 전통적인 국명 작명방식을 따라 大韓帝國을 세웠다. 한국 중국 일본의 모든 地名 중에 한 글자로 표기되는 地名은 없다. 춘추전국시대 이후에는 오직 天子의 나라만이 외字 국명을 쓸 수 있었다. 淸의 쇠약 이후 설립된 大韓帝國은 외字 이름의 國名으로서 正統 天子의 나라임을 선언한 것이다. 다시 이를 계승한 大韓民國은 ‘하늘로부터 통치권이 내려온’ 정통 天子國家의 脈을 잇는다. 반면 중국은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 이전에 이미 중화민국이 건국되어 수천 년 이어온 외字 국명의 전통은 사라졌다.
  
  
  高宗이 비록 나라를 구한 영웅은 아니었지만 일제의 영향과 대한민국 가치절하의 목적으로 당시의 사정을 살피지 않고 격하하는 것은 여진족세력이 자신들을 병합한 世宗을 과대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을 지키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선의 양반문화 全般에 대한 否定도 보수애국세력의 나라 지키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양의 자유민주사상과 경제개발을 강조하면서 상대적으로 조선시대 주류문화를 폄하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과거문화의 否定은 그 자체 보수세력임을 포기하는 결과가 되어 과거비주류문화세력에 서양평등투쟁사상을 접목시킨 反대한민국 좌파세력에 밀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흔히 박정희대통령시절에 새마을운동 등을 하면서 과거의 양반사회문화를 否定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역사문화 저술자들이 그랬을 뿐이다. 우리의 과거역사를 지나치게 비판적으로 記述하는 것을 우려한 당시정부에서는 <시련과 극복>이라는 별도의 역사교과서를 보급하여 우리민족이 약하거나 무능한 민족이 아니며 조선시대의 당파싸움도 그 시대의 여건상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고 변명해주었다.
  
  大韓帝國은 북방에 근거하여 건국되었던 조선이 비로소 중원문화의 정통국가를 자처한 것이었다. 그러나 韓이란 반도의 남쪽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니 당시에도 대한제국의 개국을 달갑게 보지 않는 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해방 후 남쪽이 대한제국을 이어 대한민국의 세운 반면에 북한이 애초에 북방세력 국가였던 조선을 국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대륙과 한반도의 역사에서 남북의 갈등의 깊이는 국가들 간의 관계보다 심한 것이었다. 지도를 가로로 나눈 다툼이 지도를 세로로 나눈 다툼보다 심각했던 것이다. 북쪽은 물자를 얻고자 남쪽은 지키고자 대립해왔던 것이 역사상의 남북관계였다. 평화를 위한 타협 후에는 물자를 얻어야할 입장의 북의 세력이 우위를 가졌다. 지금도 북한은 武力을 바탕으로 역사상의 北朝와 南朝의 관계와 같이 한반도의 관계를 만들고자 한다.
  
  <수천 년 동양문화 역사의 結晶體로서의 大韓民國>
  
  8월 15일 광복절 겸 大韓民國 건국일은 일본으로부터의 35년만의 독립을 넘어 700년만의 대륙세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신라 고려 등 한반도의 정통국가는 중국에 對해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몽고의 침입 이후 고려는 대륙세력에 종속되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고 대륙의 왕조도 교체되었으나 (왕의 호칭을 고려末에 격하된 그대로 殿下로 하는 등) 서로의 관계를 몽고 침입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했다. 이후 大韓帝国의 개국으로 독립을 시도하였으나 일제침략으로 좌절되고 이윽고 1948년 大韓民國의 건국으로 700년 만의 대륙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루었다.
  
  오늘날 大韓民國의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은 세계열강과 패권경쟁을 벌이는 국가도 아닐 것이며 세계사의 주류에 맞서는 세력도 아니다. 세계의 강대국과 약소국 그리고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 우리에게 적합한 역할을 인식해야 한다.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와 평등 이념전쟁의 決定地인 大韓民國>
  
  일찍이 1950~60년대의 작가 張龍鶴은 소설 <圓形의 傳說>의 序頭에서, 유럽에서 일어난 자유와 평등의 사상이 자유는 서쪽으로 평등은 동쪽으로 흘러나가서 한반도에서 부딪쳤다고 하였다. 한반도는 세계사에서의 이념실험을 가장 철저하게 겪어야 할 소명을 안은 지역이다. 미래 인류의 향방에는 마지막 남은 냉전지역인 한국이 나아가는 방향이 중요 지표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이념좌표 설정은 주변 주요국에 영향을 주어 결국 인류 전체의 향방을 정할 것이다.
  
  <한반도 통일에서 大韓民國의 승리는 인류역사에서 文化세력이 好戰세력에 승리하는 것>
  
  한반도에서 남북간의 대립은 한낱 강대국의 利權다툼에 따른 것이 아니다. 한반도의 대립상황에서 大韓民國의 승리는 수천 년간 인류 역사에서 이어온 文化세력과 好戰세력의 갈등에서 문화세력이 마침내 호전세력을 극복하고 인류공영의 길을 열게 되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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