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뒤의 사과(謝過)
엄상익(변호사) | 2026-06-07
-
<미지근한 변호사>
나는 정말 나쁜 놈이다. 변호사가 된 지 십 년쯤 됐을 무렵 그 짓을 저질렀다. 선배 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긴 사람이 나의 사무실을 찾았다. 다른 변호사는 어떤지 알고 싶은 것이다.
사건을 뺏고 싶은 욕심이 일었다.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다. 적극적으로 그를 유혹했다. 교활하게. 순간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사건을 여기다 맡기면 안 될까요?”
그가 낚시를 물었다.
나 역시 그렇게 사건을 빼앗긴 적이 있었다. 정말 힘들게 사건 하나를 맡았다. 그 사건을 낚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여러 번 드나들었다. 입품 발품을 팔면서 공을 들였다. 마침내 계약이 체결됐다. 큰 돈이 들어올 기회였다.
서대문 구치소에 가서 의뢰인과 만나 얘기하던 순간이었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떨떠름했다. 그때 한 남자가 조용히 그 자리에 나타났다. 고시 3관왕에 국회의원까지 된 변호사였다.
“엄 변호사 미안해.”
그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꺼져 달라는 표정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구치소 앞의 언덕길을 터벅터벅 내려오고 있었다. 중풍인 아버지에 어머니 동생 그리고 딸과 아들. 나는 온 가족의 가장이었다. 애써 잡은 들어온 먹이를 다른 강한 포식자에게 빼앗긴 느낌이었다. 저녁노을이 지고 있었다. 서글펐다. 그때의 서글픔이 내가 남의 것을 빼앗는 구실이 되어 있었다. 그 국회의원은 내게 사과하지 않았다.
다른 변호사가 하는 사건을 빼앗는 것은 업계의 윤리에 어긋났다. 거절해야 했다. 그런데 나는 남이 잡아놓은 물고기를 훔친 것이다. 그 사건을 맡고 법정에 나갔다. 변호인 대기석에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선배 변호사가 어슬렁어슬렁 법정으로 왔다가 나를 보았다. 담당 변호사가 바뀌어 있는 걸 그가 알아챘다. 당황한 그의 눈에 낭패감이 비쳤다.
“엄 변호사 미리 말이나 해 주지.”
그의 목소리에서 허탈감이 느껴졌다. 정말 미안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무리 궁해도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가슴이 납덩이같이 무거웠다. 진땀이 났다. 알고 한 일이다. 양심이 쿡쿡 쑤셨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후회가 일었다. 그 일은 앙금이 되어 가슴 밑바닥에 오랫동안 쌓여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쯤 지난 어느 날 밤이었다. 육십대 중반을 넘긴 내가 텅 빈 지하철 2호선의 경로석에 앉아 성경을 읽고 있었다. 맞은편 좌석에 칠십대 중반쯤의 노인이 보였다. 이마와 뺨에 골 깊은 주름이 나 있었다. 그 노인이 얼핏 나를 보았다. 나도 그를 쳐다 보았다. 무심히 눈길을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노인의 눈매가 어딘지 낯이 익었다. 바로 그 선배 변호사인 것 같았다. 가슴 속에서 쿵쾅쿵쾅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마음속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래? 너를 알아보지도 못하잖아? 그냥 모른 척 하고 지나쳐.’
지하철이 섰다. 정거장에서 문을 열고 몇 명 남은 손님을 토해놓고 다시 출발했다. 그가 아직 앉아 있었다. 그가 내려버리면 영영 다시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마음 안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아.’
밤의 텅 빈 지하철은 레일 위를 구르는 바퀴소리만 끊임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뜨뜻미지근한 태도로 기회를 놓치면 평생 양심이 아플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다가갔다.
“혹시 김 변호사님 아니십니까?”
“네 그런데요?”
그가 의아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 봤다. 그는 나를 몰라보고 있었다.
“저 엄상익 변호사입니다.”
“아, 그러세요? 나도 아까 얼핏 눈이 마주쳤을 때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많이 변해서 알아보지 못했어요.”
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전에 선배님 사건을 빼앗았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진심으로 빌었다. 그가 잠시 과거를 떠올리는 눈빛이었다.
“아이고 무슨 그런 말씀 하십니까? 저도 경쟁을 하면서 남의 사건을 가져오기도 하고 그랬는데요. 변호사업이라는 게 다 그런 거죠.”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저도 어느새 일흔여섯 노인이 됐어요. 지금도 친구가 죽어서 문상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예요.”
그동안 똥을 누고 밑을 닦지 않은 느낌이었다. 정직한 사과가 이렇게 시원한 것인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분은 덥지도 차지도 않은 뜨뜻미지근한 걸 싫어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