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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기대(期待)로부터 온다 엄상익(변호사)  |  2020-02-25
텔레비전 화면에는 무대 위에서 아이 네 명이 나와 율동에 맞추어 구성지게 트롯 가요를 하고 있었다. 시청률이 높다는 ‘미스터 트롯’이라는 성인 프로그램이었다. 아홉 살, 열한 살의 아이가 어른들의 트롯가요를 음정 박자까지 맞추어 완벽하게 뽑아내는 걸 보면 그 분야의 천재였다. 바둑에서 소년들이 어른들을 꺾고 입단하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성인가수 수백 명이 즉석에서 기량을 평가받고 합격과 탈락이 결정되고 있었다. 치열한 경쟁 사회의 모습이 압축된 무대였다.
  
  네 명의 가수가 함께 율동과 노래연습을 했어도 심사위원들은 그중 한 명이나 두 명만 합격을 시켰다. 같이 연습을 하던 동료 사이에 극단적인 기쁨과 슬픔이 갈렸다. 선발된 사람은 탈락한 동료를 옆에 두고 기뻐할 수가 없었고 탈락한 가수들은 합격한 동료를 부러워하면서 진한 눈물을 흘렸다.
  
  그 속에 끼어 있는 아이들은 감정을 조절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열한 살 먹은 아이가 심사를 기다리면서 울먹울먹 하는 표정이었다. 검은 테의 안경 뒤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이는 자기가 탈락할 것을 직감한 것 같았다. 그 옆에 있던 아홉 살짜리 최연소 트롯 가수도 울음이 터졌다. 본능적으로 자기는 안 될 것을 느낀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이 우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심사위원이 두 꼬마의 탈락을 선언했다. 꼬마 두 명이 부둥켜안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온통 가수 신동(神童)이 났다고 칭찬과 박수만 받았을 것 같은 아이들이 처음 겪는 실패의 장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들의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인생이란 그렇게 탈락되면서 그 슬픔을 참아 나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그걸 보면서 문득 열네 살 무렵의 중학 입시에서 탈락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 당시는 중학교부터 일류 이류 삼류 사류를 공개적으로 구분해 놓고 있었다. 교복과 배지도 달랐다. 중학교 입시만 치르면 자신이 일등품 이등품 삼등품 사등품으로 분류되는 것 같았다. 같은 반 벽에도 일등부터 꼴등까지 등수가 적힌 성적표가 시험 때마다 벽에 붙었다. 가난 때문에 고등여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어머니가 나를 일등품으로 만들고 싶은 기대가 대단했었다.
  
  나는 중학 입시에서 떨어졌다. 절망감이 엄습했다. 이차시험에서도 또 떨어졌다. 삼류나 사류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과 마주쳤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아이들이 일류를 상징하는 다이아몬드 배지를 단 교복을 입고 가는 걸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부모님의 무리한 기대 때문인 것 같았다. 재수를 해서 다음 해에 중학교에 들어갔다. 대학입시 때였다. 어머니는 아들을 최고의 명문대 법대에 넣고 싶은 기대에 부풀었다. 나도 그랬다. 실력이 받쳐주지 않는 기대는 고통이었다.
  
  고시 공부를 할 때였다. 매년 기대하고 번번이 떨어졌다. 가슴이 쓰리고 아팠다.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합격을 하고 나만 떨어진 해가 있었다. 친구들의 성공은 상대적으로 나를 아프게 했다. 친구들은 내 앞에서 미안해서 마치 죄를 발각된 사람같이 어쩔 줄을 몰랐다. 겉으로 보이는 세상은 성공한 사람만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승리자 뒤에는 수천 명의 탈락자가 눈물이 섞인 술잔을 들고 있다.
  
  어느 분야나 피라미드 구조 속에서 모두들 제일 위의 정점(頂点)에 도착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빠르고 늦는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느 순간 모두 탈락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 정상을 차지한 사람조차 허허로운 깃발을 그곳에 꽂아놓고는 곧 내려왔다. 고통은 삶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고통은 항상 나의 기대로부터 왔다. 살아보면 인간관계에서도 기대가 분노와 원망으로 바뀌는 수도 있었다.
  
  나는 자신을 품삯을 받는 지식노동자로 생각해 왔다. 부자들을 보면 돈을 줄 듯 줄 듯 기대감을 갖게 하다가 나중에 주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원래 그렇게 해서 부자가 된 것이다. 당연했다. 내 기대감이 나를 화나게 하고 고통받게 한 주범이었다. 공직생활을 할 때였다. 대부분의 상급자들은 진급의 혜택을 줄 듯 말하면서 부하들을 부린다. 한 계급 올라가겠다는 기대감에 사람들은 충성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다 진급에서 탈락되면 절망하고 상관을 미워하기도 했다. 그런 고통은 사실은 자신의 기대 때문이었다. 어느 순간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고통은 삶으로부터 오는 게 아니라 고통은 기대로부터 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홍표정 2020-02-27 오전 8:43:00
    평소, 좋은 글 읽고 감사 드립니다.

    다만, 이번엔 '자기 성취'에 대한 겸손을, 타인(패자)에 대한 배려를 말씀하신듯 하나, 사실 '기대'없는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 아닐까요. '기대'는 곧 '희망'도 될듯 싶습니다만... '분수(分數)'의 문제도 클 듯싶어서요.
  • 정답과오답 2020-02-25 오후 1:30:00
    감탄이 나오는 명문 이지만
    저는 오늘도 작은 욕심이나마 버릴수 조차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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